한밤중에 난데없이 연달아 벼락이 떨어져 한양 서쪽의 산에 큰불이 났다. 그런데 금화군이며 화재를 목격한 근방의 백성들이 너도나도 급히 물을 퍼다 산에 도달할 즈음, 느닷없이 치솟은 용천수가 넓게 퍼진 불을 잠재웠다. 마치 산이 스스로 몸에 붙은 불을 끈 형국이었다.
연달아 벌어진 기이한 사태에 백성들 중 누군가는 잿물이라도 좋으니 귀한 용천수를 얻겠다며 물동이를 들고 찾아왔고, 누군가는 벼락을 맞은 희귀한 나무를 얻겠다며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려 했다.
“따지고 보면 용천수가 맞긴 하군.”
샘 앞에 앉은 언이 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피해가 막심했을 것이다. 간밤엔 마른 바람이 상당했던 데다 산길이 가팔라 금화군의 진입도 어려운데 민가는 가까이에 있으니 말이야.”
그 말을 듣는 도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청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그 모든 상황은 고려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렇습니다.”
물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청을 바라보는 표정도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자네도 눈을 되찾았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언이 밝게 웃으며 도겸을 격려했다. 도겸은 쓰린 속을 숨기며 억지로 웃었다.
“…예.”
제 손을 내려다본 도겸은 새삼 청이 툴툴대며 직접 도와주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노심초사했던 이유까지도.
“조금 더 보이지 않았다간 명이 짧아졌을지도 모르겠군.”
도겸이 무얼 생각하는지 알아차린 언이 혀를 찼다. 도겸은 성치 않은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 청이가 전했겠지만 심 목사는 다친 곳 없이 멀쩡했네. 입구에서 습격당했던 이들도 잠시 기절했던 것일 뿐 크게 다친 이 하나 없었고.”
“…다행이군요.”
“이상한 건 이무기가 가져왔다는 음식이 은수저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것이네. 심 목사가 넌지시 내게만 전한 말에 의하면 청이가 유심히 보았다던데, 자네에겐 별말 없었나?”
“그런 이야기까지 나눌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멀쩡할 자신이 있다 하였으면서, 어찌 또 긴 잠에 빠져든 것일까.
“웃긴 것은 회강에 들어온 좌상에게 넌지시 조설아에 대해 떠보았더니 무어라 하는 줄 아는가?”
도겸의 복잡한 속을 아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언은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딸아이가 환절기에 갑자기 몸이 나빠져 피접을 갔다더군.”
“…….”
총에 맞은 상처가 쉽게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움찔 굳어진 도겸은 붉은 화염 속에서 저를 경멸하듯 바라보던 청의 눈빛이 떠올라 괴로워졌다.
“어쨌든 간택 전에 이번 일만 정리하면 되겠지. 당분간은 이무기가 훼방을 놓고 다닐 일은 없지 않겠나?”
언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겸은 심경이 복잡한지라 뉘엿뉘엿 따라 일어났다. 전신이 삐걱댔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어서 사랑으로 가게. 자네 집에서 나온 증좌인데 자네도 봐야 하지 않겠나?”
“예.”
함께 사랑으로 건너가다 마주친 가솔들이 모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도겸은 유난히 깊게 허리를 숙이는 행랑아범을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쳤다.
“순이라는 아이가 자네의 회복을 가장 기뻐하겠군. 자네가 사경을 헤맬 적에 책거리로 함께 꽃구경을 가지 못한다며 퍽 아쉬워하던데, 이젠 갈 수 있지 않나?”
“그야 그사이에 아이가 책을 다 익히지 못하여 아직 가지 못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거참, 어찌 그리 짜게 구는 겐가? 나라면 살아나자마자 아이의 소원부터 이루어 주었을 텐데.”
“죽었다 살아났다고 해도 사람이 그리 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사랑채의 마루로 올라선 언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어쨌든 자네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건 확실한 게 아닌가.”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죽을 때가 된 게 맞지 않을까. 본분도 잊고 청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앞뒤 재어 보지도 않고 무작정 이무기를 죽이려 했으니 말이다.
“…들어가시지요.”
도겸은 다만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고 먼저 사랑의 문을 열며 언을 방에 들였다.
“청이가 있다면 주변에 혹 몰래 듣는 귀가 있는지 지켜봐 주었을 터인데.”
아쉬워한 언은 괜스레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병풍 뒤를 살피고 갑자기 창을 열어 보았다.
“걱정하시는 침입자는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저하.”
“어찌 장담하는가?”
의심스러운 듯 언이 곁눈질로 사방을 살피며 상석에 앉았다. 도겸은 맞은편에 앉으며 장난스레 답했다.
“눈을 잃었을 때 희미하게나마 여섯 번째 감각에 눈을 떴다고 하면 믿으실지….”
그러자 갓을 벗던 언이 멈칫하며 도겸을 바라보았다.
“자네.”
“예.”
“요새 하도 희한한 것들을 마주하다 보니 이젠 자네 말도 허투루 들리질 않아. 그러니 농이라면 거기까지만 하게.”
“…송구합니다.”
“거 보따리나 풀어 확인해 보게.”
“예.”
도겸은 멋쩍게 헛기침하며 언이 몰래 빼 온 증좌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 점희가 차를 내어왔다며 알려왔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조심스레 들어온 점희는 유난히 주눅이 든 채였다. 아무래도 세자가 있는 자리라 하니 더 겁을 먹은 듯싶었다. 도겸은 개의치 않고 장부를 훑어보았다.
“장부의 내용은 전부 앞뒤가 맞는 것입니까?”
“내용 자체는 맞지만 실제 거래 당사자들이 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이 되지 않았어. 사헌부에서 장부의 내용을 토대로 거래하였다는 자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들었네.”
청이 곁에 있었다면 전처럼 냄새로 장부를 만진 사람들을 찾아 달라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가만 증거물을 살펴보던 도겸은 문득 다과상을 내려놓고 조심조심 일어나던 점희를 불렀다.
“점희야, 이리 와 이것 좀 보겠느냐?”
“예?”
화들짝 놀란 소녀가 눈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난감해했다. 도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려 재촉했다.
“괜찮으니 이리 오너라.”
“흠, 그러고 보니….”
뒤늦게 점희를 알아본 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구태여 점희가 한 일을 입 밖에 내어 상기하진 않았다.
“최 직각의 말대로 네가 좀 봐다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소, 소인이 어찌 감히….”
“괜찮다. 날조가 된 장부 같은데 혹 특이 사항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말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일이니 지푸라기라도 단서가 된다면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자 저하.”
무릎걸음으로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아주 가까이 오지 못한 점희가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였다. 언이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래, 이 집에서는 지낼 만하느냐?”
“예? 아… 예. 나리께서 돌보아 주신 덕에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호사라?”
“제 어머니의 장례까지 전부 치러 주시고 저를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잠들 수 있게 살펴 주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 싶었던 일까지 하게 해 주시니, 이보다 더 큰 호사는 없지 않겠습니까?”
점희의 대답에 언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던 것도 결국은 네 복이 아니겠느냐?”
“예. 소인도 그리 생각합니다.”
공손히 답한 점희가 도겸이 내어 준 장부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소녀는 그때부터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눈을 반짝였다. 냄새도 맡아 보고, 앞뒤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처음엔 도겸과 언의 사이에서 잔뜩 긴장하더니 갈수록 무아지경이 되어 갔다. 어쩐지 기대보다 더 진지하게 집중하는 터라 두 사내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른 대화도 줄여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점희가 결론을 내었다.
“제가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 상관없으니 뭐든 편하게 말해 보거라.”
“일단 이 장부는 날조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들어 버린 두 분의 대화를 미루어 보아도 이 장부는 내용만 끼워 맞추었을 뿐, 아마도 사실이 아닐 가망이 높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언이 흥미롭다는 듯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점희는 즉각 긴장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지만 그래도 입까지 굳히진 않았다.
“그것이… 본디 이런 장부라 하면, 일정 기간마다 조금씩 적어 나가는 것인지라 먹의 농담이며 필자의 필체도 그날그날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지.”
언이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도겸은 계속해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의 호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점희가 직전보다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한데 이 장부는 날조한 자가 그다지 전문적이진 않은 듯합니다. 한 사람의 필체를 일정하게 따라 쓰긴 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먹의 농담이 미세하게라도 달라지는 것 없이 지나치게 정갈한 탓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던 언이 신기한 듯 되물었다.
“이런 것을 날조할 땐 먹의 농도까지 조절한단 말이냐?”
“예. 세책을 만들 때엔 굳이 그런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만, 그 외엔 제법 이런저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보통 필체에 남은 습관까지 모방하지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 장부는 더더욱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점희가 두 손으로 장부의 맨 앞쪽과 맨 뒤쪽을 번갈아 보여 주었다.
“보십시오. 내용만 보면 적어도 2년, 3년 동안 꾸준히 쓴 것인데 처음과 전혀 달라진 게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이렇게 오래도록 적었는데 책지가 낡거나 변색되지도 않았고요. 그다지 상등품의 책지도 아닌데요.”
차근차근 이야기를 듣던 도겸이 심오한 얼굴로 점희의 의견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