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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6)화 (121/197)

“내 여의주 내놔!”

조설아가 무서운 힘으로 나무를 마구 쓰러트리며 격분했다. 청은 유유히 피하며 넘어지는 나무를 애도했다. 피할 수도 없이 비명만 내지르며 넘어가는 가련한 것들에게 다음이란 없기 때문이다.

“…나무, 해치지 마.”

청이 나직이 경고했지만 철없는 이무기는 더 날뛸 뿐이었다.

“내 여의주 내놓으라고!”

“싫어.”

마른 숲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금방 화르륵 타오를 듯이 건조하기만 했다. 아마도 청이 물을 전혀 끌어다 쓸 수 없게 나름의 수를 써서 이쪽으로 유인해 온 듯싶었다. 그렇다 한들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내가 분명히 나무 쓰러트리지 말라고 했지.”

“닥쳐! 이깟 나무 따위 이곳에 뿌리 내린 것들이 잘못…!”

순간 가공할 만한 속도로 튀어 오른 청이 단박에 거리를 좁혀 조설아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두 번은 당하지 않으려는지 이무기는 잽싸게 도망쳤다. 도리어 더 깊고 더 척박한 곳으로 용을 이끌었다. 틈만 나면 벼락을 내리기도 했다.

“정기도 부족한 땅에서 능력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아니면 무분별하게 떨어트리기만 해서 딱히 힘을 쓸 필요가 없는 건가? 이무기치고는 제법 혈기왕성한지라 잘만 가르치면 꽤 대단한 용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이렇게 조익환에게 휘둘리며 부정 타게 두기엔 아쉬웠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정말 죽일 거야. 네가 여기서 정붙인 것들 전부!”

“이미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어머니의 모습을 훔친 것 아니었어? 해주에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훔쳐서 횡령을 저지르는 척했던 거고.”

“…내가 언제?”

그래, 아쉬웠다. 못된 인간에게 나쁜 것만 잔뜩 배운 것 같아서.

청은 이무기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네가 조설아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

“그건…!”

청이 멀뚱히 대답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는지 조설아는 다시 한 번 벼락을 내리쳤다. 물론 직전까지 청이 있던 자리만이 까맣게 타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자욱한 연기와 함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게 번져선 안 되기에 급히 공기 중의 물을 끌어와 불을 잡아 눌렀다. 그러나 이미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불이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전부 진압하기 위해선 동해에서와 달리 이미 있는 비구름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없는 물을 끌어다 강제로 넓게 뿌려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어디에 있어? 내가 조설아니까 그렇지!”

“귀찮게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이 인간들과 일시적으로 부모 자식의 인연을 맺고 있긴 하지만 너처럼 내가 정말 심청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고. 왜 네 본질을 흐리는 거야? 그럴 거면 능력을 쓰지 말고 인간으로 살든가.”

이 땅에서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던데, 용족 망신은 이 어린 이무기가 다 시키는 꼴이었다. 청은 할 수만 있다면 이무기를 얼음으로 만든 알에 가두고 다시 키우고 싶었다.

“나는, 나는… 조설아야.”

거리를 두고 있어도 조설아가 바들바들 떠는 게 보였다. 여의주와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기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예민해져 있는 게 보였다. 청이 기다린 게 바로 지금이었다고 한다면, 이무기는 금방이라도 온 힘을 다해 청을 공격할 게 뻔했다.

“너, 죽은 조설아에게 뭔가 큰 은혜를 입었던 거지?”

보이는 족족 불을 끄고 있었지만 이미 마른 풀을 타고 넓게 번져 가는 불은 미처 잡히지 않았다.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청은 눈앞에 있는 이무기보다 어른인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조익환을 무너뜨리는 것과 별개로 청은 이무기의 정신머리를 꼭 고쳐주고 싶었다.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거야? 부정 탈 일 마구 저질러 가면서?”

“참견하지 마! 네가 뭔데?”

“뭐긴 뭐야, 너 승천하면 다스려 줄 왕이지.”

기어오르는 것만 보면 기껏 보관 중인 여의주를 그냥 깨부수고 싶어졌다. 잠시 고민했지만 청은 인내심을 발휘해 한 번 더 참아 주었다.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왕은 무슨. 그리고 땅에 다시 떨어진 것부터 너는 더 이상 용이 아닌 거 아니야? 모습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면서!”

“말했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고.”

물의 신물을 갖고 있어서일까. 그래도 견딜 만했다. 나무들의 비명에 귀가 괴로운 것을 빼면.

적당히 구슬려 이무기를 회유하고 조익환의 목적을 알아내고자 했건만 쉽사리 캐내기가 어려웠다.

“어린 애들 돌보는 건 최도겸이 잘하는데….”

보내지 않고 곁에 두었다면 좋았겠지만 높은 가능성으로 벼락을 맞았을 테니 어쩔 수 없다. 청은 무력으로 이무기를 제압해 이번에야말로 인두겁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지부진하게 굴어서야 좋을 게 없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난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청은 심장의 힘을 모아 근방의 물을 끌어냈다. 문제는 물을 한곳에 모았을 때 일시적으로 주변의 공기가 더 메마르기 때문에 이미 타고 있던 다른 쪽의 불이 더 커진다는 점이었다. 한쪽의 불을 끄면 또 다른 쪽이 커지며 점점 악순환이 됐다.

아마도 이무기가 노린 게 바로 이런 상황 아닐까. 이를 막아 내려면 최대한 멀리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그러기엔 깨진 신물이 보조해 주는 힘이 충분치 않았다.

“이 땅에서 꺼져!”

점점 골치가 아파지는 판에 이무기는 보란 듯이 벼락을 떨어트렸다. 청은 몸을 움직여 이무기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번엔 이무기도 단단히 작정을 한 탓일까. 본모습을 드러내며 더 매섭게 들이쳤다. 거대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청을 꿀꺽 삼키려 했다.

훌쩍 뛰어오른 청은 거대한 이무기의 몸을 타고 내달렸다. 죄 없는 나무들을 더 타들어 가게 할 순 없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여의주는 곱게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청이 막 머리에 주먹을 꽂아 넣으려던 차, 절묘하게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간 조설아가 이리저리 피하며 소리쳤다.

“곱게 돌려주지 않으면 심오균부터 죽일 거야. 최도겸도 죽이고, 네가 머무는 자리의 모든 것을 다 죽일 거라고!”

“그럴 생각 없는 거 알아.”

그렇지 않고서야 최도겸을 멀쩡히 살려 보내도록 가만 기다려주었을 리가.

“내가 그럴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네가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 그럴 생각을 ‘절대’ 할 수 없게 생겨난 종족이니까. 함부로, 재미로 다른 뭔가를 해할 마음 따윈 먹지 않으니까.”

“…….”

“그러니까 네가 누군지부터 그 머릿속에 바로 세워.”

“나는…!”

“네가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 조익환이야?”

둘의 공방에 바위가 깎이고 토사가 무너져 내렸다. 청의 물음에 이무기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아?”

그 대답으로 인해 청은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이무기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은 조익환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뻔히 조익환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면서 굳이 말해 주지 않으려 하는 건 그만큼 그 대상이 소중하다는 의미이지 않겠나.

청은 확신을 얻기 위해 남은 보기를 내던졌다.

“네가 누군갈 해치며 은혜를 갚는 걸, 진짜 조설아도 원하는 거야?”

“……!”

조익환을 말할 때만 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던 이무기의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청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무기는 조설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조익환의 딸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너는 끼어들지 말라고. 너는…!”

불같이 화를 낸 이무기가 더 빠르게 청에게 벼락을 내리꽂았다. 바로 뒤는 거센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청은 불길로 뛰어드는 것보다는 당연히 이무기와 몸싸움을 벌이는 쪽을 택했다.

“나는 약한 것들을 지켜.”

그리고 이무기가 은혜를 갚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택한 것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더했다.

“약한 것들 따윈!”

“그 약한 것들엔 너도 포함이고.”

한계치 이상으로 벼락을 떨어트린 이무기는 직전보다 더 하얗게 창백해진 채였다. 비교적 힘을 비축한 청은 이때다 싶어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세상을 알려 준 존재이자, 내가 처음으로 갖지 못한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는 방법이야.”

이무기와 부딪친 나무가 쓰러지고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무기의 목을 잡아 바닥으로 메다꽂으려 했다.

“…비겁하게 자꾸 인간처럼 무기를 쓰려 하네.”

그사이에 이무기는 청의 옆구리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박아 넣고 있었다.

“축하해. 너야말로 이무기한테 죽는 최초의 용이 될 수도 있겠네?”

바짝 약이 오른 이무기는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였다. 청은 무심히 옆구리를 한 번 내려다본 뒤로 이무기의 목을 더 강하게 조였다.

“버릇을 고쳐 줘야겠다. 웬만하면 남산댁한테 배운 것처럼 점잖게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난, 혼자는 안 죽어…!”

나뭇가지를 쥔 이무기가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청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손에서 살짝 힘이 빠져나간 틈에 벗어난 이무기가 품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 와중에 근방이 모두 불길에 휩싸여 새빨갛게 타올랐다.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어서 물가로 가 물을 끌어와야 했다. 여기서 이무기와 더 실랑이를 벌일 틈이 없었다.

“이렇게 불을 질러서는 좋을 게 없을 텐데, 불부터 좀 끄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청의 말에 이무기가 히죽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난 이게 전부 네 탓이라고 할 건데.”

도리어 칼날을 번쩍이며 청의 목덜미로 무섭게 쇄도하려던 차였다. 우선 근방의 불부터 잡기 위해 손을 든 청이 순간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어딘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뭐야.”

잘못 느낀 인기척이라 재차 확인하려 했다. 그 틈에 이무기가 청에게 칼을 휘둘렀다.

“죽어!”

타앙!

그러나 쇄도하는 칼날보다 불타오르는 산중에 웬 사나운 총성이 울리는 게 더 빨랐다. 화염을 가르고 뻗어 나온 탄환은 이무기의 몸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이무기도 제 몸에 난 구멍을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무슨….”

청은 짙은 연기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최도겸.”

바로 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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