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라는 말? 그래, 무엇이더냐?”
“아버지를 죽이려 한 이무기가 멀리 달아나기 전에 잡으러 가야 하니 짧게 전하겠습니다. 오라버니가 한 말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언제 자물쇠를 뜯고 바구니를 발로 걷어찼냐는 듯 공수 자세를 취한 심청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세자 저하께서 친히 살펴 주고 계시다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무사히 풀려나기 전까진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숙부님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결코 없게 할 것입니다. 마음 편히 계시면 소자가 직접 모시러 갈 터이니 다시 뵐 날까지 무탈하기만 해주십시오. 그것 하나면 됩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도겸의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잇는 이가 여린 여인인지라 참으로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듣던 심오균이 물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한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비교적 한참 전에 제가 했던 말을 저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아이가 아닌가.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심오균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누가 내 조카를 두고 겸손하다 한다던가. 이리 오만한 녀석인데….”
소자라니, 겨우 그 말 하나로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잠시 뒤 자세를 바로하며 꼿꼿하게 정좌한 심오균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도겸이 녀석에겐 나는 되었으니 해주에 있는 내 아내만 무사하도록 신경 써 주면 된다, 그리 전해주면 고맙겠구나.”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버지.”
전혀 효심 없는 눈으로나마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는 심청도, 제법 잘 교육시킨 것 같아 흐뭇하기만 했다. 심오균은 심란하던 머리를 깨끗하게 비웠다.
“그럼 가거라. 나는 녀석의 말대로 무탈할 자신이 있으니.”
“…예.”
어스름한 빛을 등지고 선 심청이 느긋하게 허리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은 심오균이 흡족하다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소리 없이 사라졌다.
“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해주의 목사로 지내며 웬만큼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는 다 겪었다 여겼건만, 앞으로도 이것만큼 신묘한 일을 겪어 보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게 심오균은 홀로 자물쇠가 풀린 감옥 안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뒤늦게 깨어난 의금부의 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 들어올 때까지.
***
도겸은 새삼 깨달았다.
“대체 어딜 가는…!”
동해로 가며 산을 넘을 때 청은 상당히 저를 신경 쓰며 데려가 주었다는 것을.
저를 거칠게 휘어잡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조설아와의 체격 차이로 인해 부득이 팔다리가 여기저기 부딪치느라 도겸은 오늘 밤 안으로 사지를 잃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몸을 움츠리기가 바쁘게 여기저기 찍기 바빴다. 여기저기 긁히고 충돌하는 충격이 상당했지만 아플 겨를조차 없었다.
길이 없는 수풀을 헤치며 가고 있는 것일까.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빠른 속도로 스치며 나아가는 소리, 그리고 간신히 들이쉬는 숨에 묻어나는 냄새가 이전에 청과 함께 산을 넘을 때와 같았다.
“…조설아!”
“닥쳐!”
그래봤자 조익환의 집으로 가 고초를 겪을 거라 예상했던 도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기실 생각할 겨를조차, 그러는 와중에도 여기저기 부딪치고 있던 터라 숨을 쉴 틈조차 없었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강제로 머리를 굴리게 했다.
도겸은 맹렬히 가진 정보와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조설아의 생각을 가늠해보았다.
아마도 조익환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이전에 청이 조익환의 집을 거하게 박살낸 적이 있기 때문일 터. 그때 조익환을 거의 죽이려 하였기에 섣불리 일을 키우진 못할 것이었다. 그때도, 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 않나.
도겸은 가까스로 허리춤을 뒤적여 무기를 찾았다. 전보다 더 호신에 신경 쓰게 된지라 넝마가된 도포 속에서도 장도를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손쉽게 꺼낼 수 있게끔 틈날 때마다 연습을 해두길 잘했다. 그 부단한 노력은 바로 지금 빛을 발했다.
“아악!”
칼을 뽑아 들자마자 함께 다칠지도 모른다는 각오와 함께 휘둘렀다. 그리고 뭔가를 그었다는 느낌이 든 뒤에서야 비로소 조설아에게서 자유로워졌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던지라 이무기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는 점이다.
“너, 너 정말 죽고 싶어?”
아까부터 인정사정없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는 조설아에게 가까스로 부러진 곳 없이 두 다리로 일어난 도겸이 대꾸했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나보군.”
잠시라도 구속에서 벗어나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무의미한 행동 같았지만 옷을 털어내며 물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숨겨둘 생각이었던 것이냐? 설마 청이가 날 찾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닐 터인데.”
빼앗는다 하기에 그 말에 조설아가 씩씩대며 역정을 냈다.
“…겨우 너 하나 숨기거나 죽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래봤자 용이 뭐 얼마나 신경 쓴다고!”
…아마도 조설아는 모를 것이다. 방금 그 말이 도겸에겐 상당히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을.
“그러면 하나를 빼앗겠다는 말은….”
“내 목숨이겠지.”
그때 서늘한 체온이 도겸의 팔을 잡았다. 애타게 기다린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을 때, 도겸은 저도 모르게 막혀있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어쩌면 다신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각오하던 차에 들은 목소린지라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고 안도했다.
“…청아.”
울컥하며 청을 부르자마자 손에 뭔가 잡혔다. 익숙한 촉감의 물건은 지팡이였다.
“네가 이걸 아무 데나 떨어트리고 다닐 리가 없지.”
“…….”
“납치당한 거 알려주려고 일부러 두고 간 거지?”
청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놔버리다니, 말도 안 됐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면야 곁에 선 여인에게 맥없이 빠져들 일도 없지 않았겠나. 도겸은 닥친 상황도 잊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근데 피로 흔적 남기고 온 건 좀 멍청한 거 아니야? 한 번 다치면 잘 낫지도 않으면서.”
“…설마 그걸 노린 것이겠느냐.”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오는 기지를 발휘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저기 혈흔이 남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뒤늦게 온몸에서 퍼지는 크고 작은 통증을 실감한 도겸이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희희낙락이야!”
그때 거센 힘이 도겸을 와락 끌어당겼다. 그리고 등 뒤로 뭔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떨어진….”
“바위.”
간단하게 답한 청이 도겸에게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돌려세웠다.
“무, 무엇하는 것이냐?”
“그대로 걸어가면 돼. 낭떠러지는 없으니까 좀 넘어져도 지금보다 더 다치진 않을 거야.”
그대로 등을 떠미는 손길을 도겸이 정색하며 다시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좌상이 없을 때 조 낭자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아야…!”
“이 대화에 끼면 너는 죽어, 최도겸.”
그러나 단호한 대꾸에 말허리가 잘렸다.
“…뭐?”
“내가 잡지 않았으면 넌 저 바위에 깔렸을 거잖아.”
“…….”
“가. 지금 여기 있어봤자 넌 죽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거기다 청은 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도겸의 손을 매정하게 놔버렸다.
“아, ‘심청’의 아버지는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이 보이지 않는 도겸은 손을 뻗어도 다시 잡을 수 없었다. 만질 수 없는 목소리만 들렸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옆에 있다 죽지 말고 가. 적당히 헤매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용이다. 용이 설마 이무기에게 당하기라도 하겠는가. 머리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청아…!”
이미 전신이 아픈데 눈까지 다시금 열이 올랐다. 어떻게든 용과 이무기가 무력으로 충돌하지 않고 대화로 이어 나가게끔 주도해야 하건만, 때가 좋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건 여기 있어. 이거 찾는 거지?”
눈을 감싼 틈에 청이 먼저 이무기에게 도발하며 훌쩍 멀어졌다.
“…내 거 내놔. 저 인간 안 죽이고 살려줬잖아!”
“눈이 달려있으면 봐. 저게 산 사람 모양새야? 그러니까 네 여의주도 쟤랑 비슷한 꼴로 만들어 돌려주면 어떨까 하는데.”
“너… 거기 서!”
조설아가 악을 쓰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금세 사위가 적막해졌다. 아마도 청이 이무기를 유인해간 듯싶었다. 나무가 쪼개지고 뭔가가 충돌해 부서지는 소음도 점점 멀어졌다.
“어찌….”
청이 찾아다 준 지팡이가 없었다면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도겸은 잘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갔다. 청의 말대로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몇 걸음인가를 갔을까.
꽈르릉! 순간 등 뒤쪽에서 난데없이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도 모자라 연이어 쾅쾅, 겁이 날 정도로 무섭게 지면을 울렸다. 도겸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리 전조도 없이 내리치는 벼락이라면 이전에도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다. 바로 독에 당해 죽을 뻔한 날에 들은 소리였으니까. 캄캄한 숲 가운데 선 도겸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무기가 내리는 벼락이었다.
“…겨우 너 하나 숨거나 죽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내 목숨이겠지.”
청이 질 리가 없지 않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심장이 들끓고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조마조마해졌다. 잠시 잊을 만하던 눈의 통증이 격렬해졌다. 도겸은 결국 두 눈을 감싼 채 주저앉고 말았다.
“큭…!”
하늘에서 지상으로 활을 쏘기라도 한 듯 짓쳐드는 벼락소리, 거기다 마치 눈알이 뜨거운 물에 내던져진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통어린 소리가 절로 새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청에게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연모라는 게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보다 먼저 위하고 아끼게 되는 감정임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눈이 터지든 심장이 부풀어 터지든 둘 중 하나는 오늘 밤 안으로 일어날 일이 아닐까.
콰르릉!
그 순간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
그리고 잠시 뒤 도겸이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