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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4)화 (119/197)

“……!”

난데없이 어둠 속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심오균이 입 안의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그대로 삼켜 버린 것이었다.

“큭…!”

얼결에 삼킨 것은 야무지게 목에 걸려 심오균을 고통스럽게 했다. 눈앞의 부인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더니 멀뚱히 남편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부인의 뒤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심오균이 딱 한 번 본 적 있는, 이름만 빌려준 새로운 딸 심청이었다.

“분명 삼키지 말라 하였지 않습니까?”

어쩐지 두 눈이 푸르게 빛나는 듯한 심청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작은 손으로 단단히 잠겨 있는 자물쇠를 단박에 뜯어냈다. 마치 종이를 찢듯 가벼운 손짓이라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끄, 큭, 크헉!”

그런 와중에도 심오균은 커다란 고깃덩이가 목에 꽉 막힌 탓에 숨이 넘어가는 터라 괴로운 신음 외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아플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꼬박꼬박 심오균을 아버지라 부르는 심청이 별안간 그의 등을 후려쳤다. 순간 눈알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력한 힘이자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충격이 일었다.

그리고 다행히 눈알 대신 기도로 넘어가 숨통을 조이던 고깃덩이가 입 밖으로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놀란 마음은 둘째 치고 아직 남은 통증의 여파로 심오균은 숨통이 트이자마자 한참 잔기침을 토해 내야만 했다.

“그, 그… 이게, 무슨… 부인…!”

왜 느닷없이 나타나 삼키지 말라고 한 것인지, 삼키려다 목구멍에 대차게 걸려 그대로 숨이 막혀 죽을 뻔한 심오균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부인의 행동은 또 무엇이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급히 아내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라 생각하여 바라본 창살 바깥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심오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안다는 듯 심청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뭐, 뭐라?”

“그저 모습을 훔친 것이지요. 저 음식을 아버지에게 먹이기 위해서.”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심오균은 쉽사리 믿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

어두운색 도포를 걸친 헌칠한 사내가 달빛 아래 의금부의 높은 담벼락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다. 꼭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처럼 그늘진 표정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금부옥사는 동궁보다 더 경계가 삼엄할 터인데….”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찾아오기엔 이래저래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당연히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숙부를 지키고 있는 언에게 부담을 더 얹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아직 올 때가 안 된 것인가?”

기다리는 입장이 되다 보니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하늘을 살필 수도 없으니 더욱 그랬다. 그저 순간이 영겁과도 같았다. 오지 않는다고 함부로 찾으러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지 않나. 도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궐에도 별일 없이 다녀왔으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터….”

속에서 치솟는 답답함을 입안에서 읊조리며 풀어내던 차, 도겸이 우뚝 멈추어 섰다. 또다시 눈 안쪽에서 퍼지는 이유 모를 통증 때문이었다. 홧홧한 열기에 순간 안쪽에서 뭔가로 눈을 태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신경통이 아닐까. 어쩐지 청을 걱정하고 마음이 들끓을 때마다 그 열기가 눈으로 모여드는 것만 같았다.

“하기야….”

당장 청이 의금부 옥사에 들어갔다가 벌어질 수 있는 일만 최소 백여 가지는 머릿속을 스쳐 가고 있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탁! 눈을 덮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감을 줄이며 번민하던 도겸의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희미한 소리였지만 뭔가 바닥에 떨어진 듯한,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착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청이냐?”

이 시점에 담을 넘어 뛰어내릴 사람이라면 하나이지 않나. 기다리던 여인일 것이라 도겸은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뭔가 떨어진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소음이었는데.

시력을 잃은 이후 나머지 감각이 급격히 예민해졌다. 어쩌면 육감이라는 것까지 살아났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척에 떨어진 뭔가가 청이 아니라는 예감이 이리 강하게 들 수가 없었다. 도겸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부디 별다른 소리가 아니었길 빌었다. 떨어진 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직후에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어야 할 터인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내 여의주, 어디 있어?”

간절히 바랐건만, 도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코 청이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갖고 있어?”

“…조 낭자.”

조설아가 의금부 옥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청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여긴 어쩐 일이오?”

…숙부. 도겸은 덜컥 내려앉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표정을 굳혔다.

“낭자가 의금부 옥사에, 그것도 이리 담을 넘어 다니며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내 여의주 어디 있냐고.”

목소리로 전달되는 거리감이 점차 좁혀지는 게 느껴졌다. 물러나거나 도망쳐봤자 소용없음을 아는지라 도겸은 차라리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건 나도 알지 못한다만.”

“…그럼.”

가까이 다가온 조설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겸이 의아해할 즈음이었다.

“하나 빼앗겼으니 나도 하나 빼앗아야 맞겠지.”

부지불식간에 뻗어온 거친 손길이 도겸의 옷깃을 뜯어낼 듯 틀어쥐었다.

***

“바깥을 지키는 무사들이 모두 혼절해 있었습니다. 오라버니가 지나치게 아버지를 걱정하기에 이야기를 전하러 왔건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 나간 심청이 발끝으로 음식물 바구니부터 뒤집어엎었다. 차곡차곡 바구니를 채우고 있던 음식물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와중에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부, 부인은 어디에….”

“아마 잘 계시겠지요, 해주에. 이런 식으로 모습을 알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고 보니 처음 마주친 이후로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심오균은 자세를 바로 하며 침착하게 물었다.

“하면, 너는 내가 봤던 아이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대화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아이인지라 목소리마저 생경했다. 심오균의 물음에 약간 몸을 숙여 음식물의 냄새를 맡아 보던 여인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읊었다.

“자칫 세자빈으로 만든다고 하여도 그다음이 더 문제겠지. 정쟁의 허수아비가 되든 갈대가 되든, 이리저리 휘둘릴 게 자명하다. 그러다 결국 최씨와 심씨 두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꼴만 보게 될 테고!”

“……!”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어쩐지 익숙했다. 그리고 곧 심오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심청이라는 이름을 빌려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고 한걸음에 한양으로 가 도겸을 다그칠 때 제가 한 말이 아니던가.

“네, 네가 그걸 어찌!”

“그다음에 오라버니가 한 말도 읊어 볼까요?”

“아니… 아니, 되었다. 그런 식으로 너를 증명하라는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제야 자물쇠가 부서져 다시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심오균은 퍽 난감함을 느꼈다.

“도겸이가 알려 준 것이냐? 그 자리엔 분명 나와 조카만 있었는데.”

심오균의 의심에 심청이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보는 저를, 아버진 설마 아직도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뭐라?”

“생김새는 비슷해도 보통 제 또래의 처녀들은 자물쇠를 뜯어내지 못한다던데, 그것도 아니었나요?”

“…….”

“앞으로 숙부님 외엔 저 아이의 민낯을 볼 이가 없을 겁니다.”

배움이 빠른 아이라 했던 것도, 웬만한 무인보다 나을 거란 말도 모두 저 아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허.”

거기까지 생각하던 심오균은 새삼 도겸이 이 일에 얼마나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이 아닌 것을 마주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기보단 그게 더 먼저 와 닿았다. 그 진심에 마음이 절로 침잠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혼란하던 머리가 개운해지고 생각이 뚜렷해졌다.

“어쨌든 계속 여기에 있다 들키기라도 하면 네가 의금부의 군사를 해하고 침입하였다 큰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럼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질 터인데.”

뭐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다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여기던 차, 심청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버지께선 앞으로 저런 이무기에게 속지나 마십시오.”

“…….”

꼬박꼬박 아버지라 붙이는 호칭에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혀 불경하지 않은 말투와 행동이었음에도 어쩐지 그 맑고 청아한 눈엔 존경의 감정이 터럭도 담겨 있지 않기도 했다. 어쩐지 부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던 침입자가 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참으로 묘했다. 지푸라기를 깔아 둔 감옥 안팎을 오고 가는데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서일까. 심오균은 내심 아직 이 상황이 꿈속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도겸이는 무탈한 것이냐? 듣자 하니 이미 변고를 당해 눈이 보이지 않는 지경이라 하던데.”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겸이 가고자 하는 길에 그런 시련이 있다면, 심오균은 조카가 너끈히 이겨 내길 바랐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꿋꿋하게 삶을 바치고 목적을 완수하겠노라 결연하게 다짐하던 아이였으니, 충분히 해내리라 믿었다.

“무탈하다는 게 살아 있다는 뜻이라면… 네, 뭐 대충 살아 있습니다. 늘 꼿꼿하게 타들어 가는 인간이라 유연하게 흐를 줄 몰라 혐의를 뒤집어쓴 자들끼리 만날 수는 없다면서 저만 보내긴 하였으나….”

…믿었으나, 심청의 답을 듣자마자 심오균은 다시 퍽 불안해졌다.

“오라버니가 전하라는 부탁한 말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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