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3)화 (118/197)

“더는 친우가 아닐지라도 자넨 아바마마의 백성이고 내 백성이야. 뻔히 누명을 쓴 게 보이는 백성을 이 나라의 세자가 되어 어찌 그냥 눈감고 지나치겠냔 말이지.”

그 말을 들은 도겸이 서글픈 얼굴을 했다.

“송구합니다.”

“자네가 왜? 누명 쓴 것도 죄가 된단 말인가?”

“그저 행여나 뭔가를 털어 가지 못하게 깔끔히 집을 비워 두기만 하면 될 것이라,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말입니다.”

“그렇다 한들 집에 사람을 두었으면 피바람이 불었을 게 빤하지 않나. 피차간에 다 알 이야기를 입 아프게 할 필요 있냔 말이지.”

언이 으스댔지만 도겸은 쉽사리 침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누군가 침입하여 훔쳐듣는 사람이 없는지를 지켜보던 청은 슬슬 그만 물에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인간들은 명분을 따져 가며 복잡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도겸과 언까지 저렇게 서로 명분 싸움 아닌 명분 싸움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는 두 남자는 청이 보기에 더없이 바보 같기만 했다.

“어쨌든 이런 시기에 투옥되어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질 않나. 자네 숙부는 횡령 당사자로 지목되어 하옥을 피할 길이 없었다만 내 긴밀히 살피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아바마마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알고 계시는지라 명목상으로만 투옥 명령을 내리셨을 뿐 정말 죄인이라 생각지는 않으시니 말이야.”

“망극하옵니다.”

감읍한 도겸이 임금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내비친 뒤,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와 제 생각을 밝혔다.

“아마도 이번 간택에서 청이를 제외하고자 꾸민 계략인 듯합니다. 저까지 음해하여 최소한 파면이라도 시키려는 것이겠지요.”

“나도 그리 생각했네. 너무 뻔하여 기가 찰 지경이다만 날조된 조작이라 해도 명분이 받쳐 주기만 한다면 눈뜨고 코 베이는 것은 순식간일 터라. 어디서부터 무죄를 증명할지 답답할 뿐….”

한숨을 내쉬던 언이 도겸의 곁에 놓인 물건으로 시선을 내렸다. 청을 통하여 선물한 지팡이였다.

“확정적인 증좌가 있었다 들었습니다만.”

“…그래. 알다시피 오랜 기근 때문에 선혜청으로 들어오는 대동미의 양이 평년에 비해 뚝 떨어지질 않았나. 가뜩이나 부족한 공물 때문에 여기저기 예민해져 있던 차에 하필 해주 목사가 한양으로 보내야 하는 대동미를 몰래 빼돌려 취하였다는 투서가 들어온 것이고.”

“투서요?”

“그래, 투서. 거기다 해주 목사가 빼돌린 쌀의 거래 내역을 적어 둔 장부와 따로 은닉해 두었던 재물들까지 발견되었어.”

“제 숙부님께서 그런 걸 적으셨을 리가…!”

“걱정 말게. 자네 숙부가 그런 짓을 벌일 치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은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 그리 흥분할 것 없어.”

도겸을 안심시킨 언이 그럼에도 착잡하긴 한지 소리 내지 않고 미간을 구기며 괴로워했다.

“다만 놈들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어떻게 불식시킬지가 진짜 문제 아니겠나?”

“아마 숙부님을 아는 사람들이 탄원하여 줄 것입니다.”

“그게 지금… 아, 자네 집에서 나온 것도 비슷한 증좌이긴 했는데.”

언이 묘하게 말을 바꾸었지만 도겸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것도 제 필체로 쓰여 있던 것입니까?”

“자네 집에 있던 것들은 심오균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찰과 얼마간의 재물, 그리고 장부 일부였어. 장부야 아랫사람을 시켜 적을 수도 있는 문제라 필체까지 살펴보진 않은 듯했고.”

차분히 대꾸하던 언이 도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덧붙였다.

“자네, 역시 처녀들의 자살을 꾸며 낸 연쇄 살인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게지?”

“제 숙부님께서 그런 걸 직접 쓰셨을 리 없지 않습니까.”

“나도 그래서 장부나 서찰이 날조되었을 가능성을 더 강력하게 말해 보긴 했다만… 자네 숙부가 직접 물건을 빼돌리라 지시하는 모습을 직접 본 이들이 꽤 있다는 게 더 결정적이야.”

“…예?”

“그것도 심오균이 오래 데리고 있던 심복을 비롯해 따르는 가솔들까지 줄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더 곤란한 게 아니겠나?”

왜 도겸의 하옥은 막아 내고도 심오균은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하고 기어이 옥에 가두었는지가 명료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도겸이 드디어 혼란에 빠져 얼이 빠진 표정을 했다.

“설마 숙부님을 그리 오래 따른 이들이 쉽게 변심하였을 리가….”

도겸이 침잠하며 중얼거리는 틈에 드디어 참고 참던 청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간택 참여를 막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하나일 거 아니야?”

조용히 있다 불쑥 목소릴 내는 청에게 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주의를 기울였다. 청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답을 냈다.

“조익환.”

“…….”

“…….”

무언의 긍정이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도 없이 너무 당연한 답이지 않나. 청을 지켜보던 도겸이 고개를 끄덕여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 이번에도 정답이 아니라 어째서 그 답인 것인지 풀이 과정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거라면 지금 당장 가서 조익환부터 잡아 오면 되는 일이잖아.”

커다란 항아리에 넣고 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좀 굴리다 보면 알아서 실토하지 않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는 청에게 도겸이 만류하며 이유를 덧붙였다.

“네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쯤이야 이미 간파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은 당하지 않으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저지른 것이겠지.”

“그 만반의 준비를 내가 모두 파훼할 수 있다 해도?”

“그리하여 조익환을 겁박하는 데 성공한들 그건 결코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조익환이 내 숙부님을 먼저 건드린 이유일 터.”

“흠….”

가만 언과 도겸의 대화를 되새겨 본 청은 어렵지 않게 조익환이 어떤 식으로 술수를 부린 것인지도 파악해 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그리고 조익환이 정확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그게 무슨 말이냐?”

“심청의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변심한 게 아니야.”

“그럼?”

“심청의 아버지가 변한 거라면 몰라도.”

“무슨 소리, 숙부님은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다!”

도겸이 즉각 강하게 반박했다. 그리고 청은 이미 예상한 듯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조익환이 이무기를 데리고 있잖아.”

청의 말을 들은 도겸과 언은 오래지 않아 그 뜻을 이해하고 낯빛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니까.”

잠시간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도겸이 물었다.

“이무기가, 내 숙부님의 모습을 훔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

불빛이라곤 옥사의 입구에 피워 놓은 모닥불이 전부인지라 깊은 안쪽엔 어스름한 여운만 와 닿았다. 백의 차림으로 꼿꼿하게 정좌하고 있던 심오균은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창문 하나 없어 고스란히 고인 퀴퀴한 냄새나 나무 썩는 냄새 따위에도 슬슬 적응이 되어 가는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기습이었던지라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었다.

“그래도….”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심오균은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는, 추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면서도 조금 어이가 없다뿐이지 충격에 휩싸여 치를 떨진 않았다.

그만큼 도겸이 부단히 잘하고 있었기에 이를 잘라 내려 적이 뻗친 마수가 아니겠는가.

도겸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는 것이 잃어버린 여동생과 매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쩐지 걸림돌만 되게 생겼다. 작금에 심오균이 실로 가장 답답하고 화가 나는 부분이었다.

“영감.”

그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놀란 심오균이 고개를 들었다. 제등을 들고 나타난 자그마한 여인은 수십 년을 함께 지내 온 부인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확실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부인?”

“예. 접니다, 영감.”

“해주에 있어야 할 사람이 예까진 어찌 온 것이오? 내 분명 집을 지키라 하였을 터인데.”

“그야 영감이 걱정되어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 말이지요.”

바닥에 주저앉은 김 씨 부인이 제등으로 주변을 밝히고 옆구리에 끼고 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면 보자기를 들춰내니 정성들여 구운 전부터 고기반찬까지 그득했다.

“어서 드시지요.”

묵직한 나무 창살 틈으로 바구니를 들여 줄 수 없는지라, 김 씨 부인이 고깃덩이를 덥석 집어 안쪽으로 넣어 주었다. 그때까지 심오균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 모를 위화감이 뒷목을 서늘하게 감싸는 탓이었다. 맨손으로 집은 고깃덩이를 어서 먹으라는 듯 창살 틈으로 흔드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일었다. 심오균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 밀었다.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잡아 밀며 살짝 스치기만 한 것인데도 유난히 차가웠다. 꽃이 피는 계절인들 밤엔 쌀쌀한 탓일까.

“그보다 먼저, 도겸이는 만났소? 전해 듣기로는 한양으로 돌아와 구금되었다 하던데.”

“알 게 뭐랍니까, 그런 놈 따위….”

“…뭐요?”

깜짝 놀란 심오균이 되묻자 무심히 중얼대던 김 씨 부인이 도리어 펄쩍 뛰었다.

“제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방금, 내 조카를 두고 ‘그런 놈’이라 하지 않았소?”

“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설마 며칠 험한 옥살이를 하셔서 기가 허해진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 어서 드시지요.”

험한 말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온순한 이가 그럴 리 없긴 했다. 심오균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무래도 잠이 좀 부족하긴 했소. 그럼 도겸이는 어찌 만나 보긴 한 것이오? 그 아이는 무탈하고? 이 음식들도 전부 그 집에서 해 온 것일 텐데, 어찌 혼자 온 것이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궁금한 것들이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잠시 당혹스러운지 눈을 굴리던 김 씨 부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드시지요, 영감.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 드시면서 들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금 음식물을 든 손이 깊숙이 들어왔다.

“그, 그렇긴 하다만….”

혹시 몰라 며칠 동안 심오균은 식음을 멀리하고 있었다. 세자의 사람이 따로 가져다주는 것들만 최소한으로 섭취하여 버텼건만, 기어이 부인을 만나니 마음이 약해져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깃덩이 하나가 심오균의 입 안으로 막 들어왔을 때였다.

“삼키지 마시고 그대로 뱉으십시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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