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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2)화 (117/197)

헛숨을 들이켠 행랑아범은 저도 모르게 더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반쯤 돌렸다.

“이, 이것은 별것 아닙니다. 며칠 낯선 곳에서 머물다 길이 익숙지 않은 참에 그만 언덕진 곳에서 굴러 생긴 것이라서요….”

“그래?”

“예.”

평소에는 먼저 말을 붙이지도 않던 사람이 어찌하여 이리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일까. 행랑아범은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주위가 쌀쌀하다 느끼며 괜스레 팔을 쓸어내렸다.

“상단에서 지낼 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는 못 들은 것 같은데.”

“나리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그저 그, 안 그래도 살필 게 많은 분이신데 괜히 걱정하실까 하여 그런 것이고요. 그러니 아씨께서도 되도록 모른 척해주시면….”

“네가 순이도 아니고 겨우 언덕진 곳에서 굴렀다고 그렇게 더러워진단 말이야?”

“예?”

그런데 이번에도 청이 다른 이야길 했다.

“지금도 그렇게 불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도 그 더러운 냄새는 가시지 않는 걸 보니까 너 역시.”

언뜻 푸른 안광을 본 것 같아 행랑아범이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누군갈 해친 적이 있는 거잖아.”

“그…!”

결정적인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은 것인지 뒷걸음질 치다 못해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뒤엔 장작이 무섭게 타오르는 아궁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끄악! 뜨, 뜨!”

꼼짝없이 손이며 엉덩이가 불에 지져질 것이라 여겼다.

“뜨….”

그런데 뜨겁지 않았다. 도리어 매캐한 냄새만 났다. 행랑아범은 힐끔 눈을 뜨고는 그대로 숨 쉬는 것도 잊고 말았다.

“아니 분명히, 장작을 넣었는데 이게 어찌 된…!”

직전까지 타오르고 있던 아궁이의 불이 꺼진 채였다. 다음 순간 행랑아범은 짙게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졌다. 손과 엉덩이는 타들어 가는 대신 흘러나오는 잿물에 까맣게 젖어 들었다.

“…그냥 타 버리게 둘 걸 그랬나?”

아, 눈앞에 누가 있었는지 잊고 있었다. 행랑아범은 연기가 걷히는 틈으로 손바닥 위에 구형의 물 덩어리를 들고 있는 청을 보며 그저 입만 떡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그, 저.”

“너는 앞으로 최도겸 옆에 얼씬도 하지 마.”

“…예?”

“최도겸까지 부정 타게 하지 말라고. 지금도 그 인간은 충분히 아슬아슬하니까.”

매서운 경고에 행랑아범은 차마, 아니 함부로 토를 달 수도 없었다.

“아,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게 뭐든 일단은 무조건 따라야 함을 알았다. 그것은 살기 위한 본능과도 같았다. 순간 늘 작고 여린 체구의 여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청이 어쩐지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 위용에 짓눌려 감히 숨 쉬는 것조차 두려울 만큼.

도겸을 모시면서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경외감, 아니 공포심이었다. 팔다리가 절로 굳었다. 행랑아범은 무릎걸음으로라도 그 자리를 달아나려 했다.

“근데 너 혹시 어딘가에서 구른 게 아니라….”

그런 행랑아범을 가만 내려다보던 청이 뭔가를 물으려던 차였다.

“문을 여시오!”

누군가 대문 밖에서 고함을 치며 문을 두드렸다.

***

“어서 죄인 최도겸을 추포하라!”

해가 져 어두워진 참에 대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다시피 한 소유(所由)들이 횃불을 들고 마당을 가득 채웠다. 행랑 마당으로 뛰어나온 순이가 겁을 집어먹고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청의 뒤에 숨었다.

“아, 아씨….”

면면들이 흉흉한 사내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은 조그만 아이를 투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너 잡으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숨어?”

“아자씨들이 무섭게 생긴 걸 우째유….”

“생긴 걸로 때리는 것도 아니잖아. 내 옷 잡고 늘어지지나 마.”

“무, 무섭단 말이어유!”

투닥거리는 소녀와 아이에게 소유들의 시선이 와 닿았다. 단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모여든 눈들은 어쩐지 청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른 곳으로 돌린다 해도 힐끔대며 다시없을 미인을 이리저리 살피기 바빴다.

그중에 가장 지체 높아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죄인은 어디에 있나! 다 알고 왔으니 순순히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어야 했나. 청이 아니꼬운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볼 즈음, 사랑채 쪽에서 도겸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나를 추포하라 명령하는 이의 소속이 어찌 되오?”

다소 긴장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어쩐지 그는 더 여유 있어 보였다. 그의 물음에 푸른 철릭 차림을 한 사내가 답했다.

“그것은 어찌 묻는 것이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의관으로 알아차릴 수 없어 그런 것인데, 묻지도 못하는 것이오?”

하필 도겸의 곁에 함께 나오는 사람이 또한 당상관인 규장각의 직제학인지라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사헌부 지평 황모찬이오.”

“사헌부라. 설마 거기까지 손을 뻗친 것인가….”

도겸이 뭔가를 생각하는 틈에 직제학 송 씨가 버럭 소리쳤다.

“이 무엄한… 어디 감히 정5품 지평이 규장각 직각에게 그리 함부로 구는가!”

윗사람의 역정에 사헌부 지평이라는 이가 움찔 놀라면서도 꼬박 대꾸했다.

“횡령의 혐의가 더없이 무거운데 어찌 대우한단 말입니까?”

“혐의가 무거운들 죄가 확정되어 처벌을 받는 상황도 아니지 않나! 사헌부 지평이라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은 겐가!”

“직제학 영감께선 물러나 계십시오. 아무리 영감이시라 하여도 사헌부의 집행을 막으실 순 없습니다!”

지평이 손짓하자 소유들이 도겸을 직접 체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붙드는 손을 매섭게 뿌리친 도겸이 물었다.

“이 집에서 증좌를 찾아내었다 들었소. 그게 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는데 이리 막무가내로 추포부터 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그야 당연히 들통날까 싶어 집을 비우고 도주했기 때문이 아니겠소? 충분히 사건을 은폐할 우려가 있어서 다시 도주하기 전에 추포하는 것이니 잠자코 따라가는 게 좋을 것이오!”

“말이 되는 소릴. 설령 그게 도주가 맞다 한들 이리 버젓이 돌아올 리는 없을 텐데. 그리고 집을 비우고 도주하면서 누가 그리 보란 듯이 증좌를 남기고 간단 말이오?”

도겸이 조목조목 짚으며 체포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지평은 막무가내였다.

“그야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지! …그래, 거기 있는 처자는 심오균의 딸이 아니오?”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지평이 어둑한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청을 발견하고 물었다. 청은 잠시 고민하다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만.”

청과 눈이 마주친 지평도 다른 소유들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잠깐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달싹이다 간신히 본분을 되찾았다.

“그… 사건의 관계인 또한 함께 가 주어야겠소. 무엇 하느냐!”

“예!”

소유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제까지 비교적 점잖게 굴던 도겸이 느닷없이 버럭 화를 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시오!”

“뭐요?”

이미 상황을 장악했다 생각했는지 지평은 도겸을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도겸은 결코 웃지 않았다. 도리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경고할 뿐이었다.

“절대, 손대지 마시오. 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청이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할 게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힘 조절을 할 수 있어서 죽일 일은 없는데, 새삼스럽게 너무 과히 경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청이 다 서운해질 지경이었다.

“…뭐야.”

도겸을 노려보던 청이 문득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더 몰려오네. 겨우 최도겸 하나 잡겠다고 사람을 더 보내는 건가?”

아니, 조익환이라면 충분히 저를 경계하려 들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씨, 방금 무어라 허신 것이어유?”

곁에 있던 순이가 의아하게 물었지만 답은 또 한 번 대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이 대신했다.

“멈추시오!”

이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의 복색은 사헌부 지평이나 소유들과 사뭇 달랐다. 제법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다행히 아직 추포하기 전이었군 그래.”

목소리만 듣고 누군지 알아차린 도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 저하!”

깜짝 놀란 지평과 소유들 모두 대문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은 높은 대문의 문턱을 넘어온 언과 눈이 마주쳤다. 언은 별말 없이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세자 저하 오셨습니까!”

남산댁은 물론, 그와 제법 안면을 익힌 행랑아범과 순이, 점희도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였다. 얼굴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만 여전히 순이의 곁에 서서 아이가 부정 타지 않게 지킬 뿐이었다.

“최 직각의 추포를 당장 멈추게.”

늘 느물거리던 언은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매서운 눈을 한 그가 소리쳤다.

“어명일세!”

***

한바탕 사헌부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소란스러웠던 도겸의 집은 다시 고요해져 있었다.

다만 해가 저물어 우선은 쉬고 날이 밝는 대로 집을 정리하자 했건만, 아직 밖에서는 깨진 살림을 치우느라 간간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그러신 것입니까, 저하.”

다른 때는 웃음소리도 심심찮게 들리던 사랑방에 오늘은 침울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도겸의 나직한 물음에 찻물을 들이켠 언이 무안한 기색을 숨기며 툴툴댔다.

“그리 비실대는데 어찌 볏짚이나 대충 깔아 둔 옥에다 자네를 가둬 두겠나? 며칠 버티지도 못할 터인데.”

언은 어명을 받아내기 위해 임금과 담판을 짓고 온 것이었다. 그는 감히 세자의 자리를 걸고 책임을 지겠다며 도겸의 투옥을 막았다고 했다. 대신 도겸에겐 스스로의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금족령이 내려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분명 청이를 통하여 전해 달라 한 말씀이….”

“그 약조라면 자네가 먼저 지키지 않겠다 하여 내가 연을 끊지 않았던가?”

단칼에 잘라 말하는 세자 때문에 도겸이 드물게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그 기세를 죽였다.

“…하면 연을 끊으신 분께서 어찌하여 이리 나서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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