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청이 집에 찾아온 관군들과 대치하다 줄줄이 부상자를 만들어낸 뒤 도겸과 도주하여 죄만 늘어날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까진 구태여 입에 담을 필요가 없었다.
“그 집에선 횡령한 공물을 팔아넘겼다는 장부가 나오질 않나, 한데 집주인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이야. 내 어찌나 걱정이 되었는지 알기는 하느냐?”
얇은 옷이나마 걸쳐 가리려 했지만 젖은 몸을 닦지 않고 급하게 욱여넣은 탓에 하마터면 옷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최도겸이 너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거야. 그런데 최도겸은 담 넘는 걸 무서워하니까 내가 온 거고.”
“그, 아마도 그 녀석은 무서운 게 아니라 부정한 짓을 하지 않으려 한 것일 터인데….”
“어쨌든.”
손끝으로 가볍게 물줄기를 일으키던 청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언의 궁금증을 먼저 풀어 주었다.
“나랑 최도겸은 바닷가에 갔었어.”
“바다? 갑자기 바다엔 어쩐 일로?”
도겸은 이 사달이 날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그의 집은 이사라도 가 버린 것처럼 감쪽같이 비워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찌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혹시 어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그걸 제가 연을 끊는답시고 살피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서. 하필 배치해 놓았던 호위무사들까지 철수시킨 터라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건 지금 당장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옷고름을 매고 돌아선 언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있는 청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럼…!”
“최도겸이 네게 전하라는 이야기는 그다음부터니까 잘 들어.”
음산한 목소리가 욕탕 안을 나직이 울렸다. 잘 듣지 않으면 어딘가 요절을 내주겠다는 것처럼 들려 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우연히 이런저런 사건의 실마리가 되어 줄 사람 둘을 찾았어.”
“사건의 실마리…?”
반문하는 언의 입이 청의 손가락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누군가 오고 있어. 시간 없으니 넌 조용히 듣기만 해. 너만 들어야 하는 내용이라고 최도겸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알아?”
“아니, 내가 명령하면 되는 것을….”
“수배 중인 천덕이라는 녀석과 광연이라는, 과거 세자빈을 모셨던 지밀나인.”
“……!”
청에게 입을 틀어막힌 언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당시 대부분의 나인들은 이미 세자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어떤 음모가 있던 것은 아닌지 추국하는 과정에서 그만 숱하게 죽어 나가지 않았나.
죄책감에 자결을 한 이들도 많았던 데다 출궁을 한 궁녀의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바로 데려오진 못했어. 여기선 증인이라고 하면 전부 죽어 나간다며. 그래서 안전하게 지키다가 때가 되면 이 땅의 왕 앞에 데려오기로 했어.”
언은 천천히 제 입술을 덮고 있는 청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나 약속한 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물론 간신히 참는 것이었다. 증인을 두고 오다니, 그사이에 도주하거나 다른 변고를 당하면 어찌하려고. 당장 떠오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광연이란 아이가 스스로 세자빈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실토했어. 그 과정에 도승지가 관계돼 있었는데… 한양에 와 보니까 죽었다 하고.”
순간 귀를 의심할 만한 내용이 스쳐 갔다.
“잠깐. 그럼… 그 말은.”
“세자빈들은 확실히 자결한 게 아니야.”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서 무너질 뻔했다. 언은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머릿속엔 세자의 여인으로 단 한 철만 피는 꽃처럼 살다 간 세자빈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 너도.”
머뭇거리는 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청이 말했다.
“멈춰 있지 말고 그만 흘러가도 괜찮단 소리야.”
뜻밖의 결론에 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바깥쪽을 의식한 청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최도겸이, 세자 저하께서 부디 희우정 뒤뜰에서 나눈 약조를 지켜 주셨으면 한다고 전해 달래. 무슨 약조인지는 모르겠지만.”
“…….”
물론 언은 기억하고 있었다.
“혹 일을 그르치더라도, 절대 신을 보호치 마시옵소서.”
연을 끊겠다 하였어도 끊지 못했음을, 끊을 수 없음을 녀석은 아는 것이었다.
“청아…!”
뒤늦게 청을 불러 말을 전하려던 차, 자그마한 여인은 할 말을 마치자마자 이미 창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일장춘몽처럼 온데간데없어 허망할 뿐이었다.
“저하, 소인 그만 저하께서 의관을 정제하시게끔 들겠나이다.”
유 내관이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하얀 수증기가 자욱한 와중에 세자만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하? 아니, 이 어찌!”
아니, 홀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그제야 비로소 조금씩 흘러가기 시작한 한 사내가 있었다.
***
“예?”
남산댁이 찻물을 따라 준 잔을 들던 도겸이 멈칫하며 당황했다. 그동안 직제학 송 씨는 한숨을 내쉬며 미리 부탁한 냉수만을 술처럼 들이켰다.
“분명 그 밤에 내게 그리 털어놓았네. 약방 일기를 날조하였다고 말이야. 출세를 하고도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던 모양이네.”
여러모로 절묘하게 때가 맞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도겸은 이미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는 송 씨에게 우선 감사한 마음부터 전했다.
“영감께서 저를 위해 이리 부단히 마음 쓰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말 말게. 그동안 제대로 마음을 쓰지 못한 탓에 자네가 그리된 것 아니겠나?”
“영감이야말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게 마음이 없으셨다면 대사례 때 그리 역정을 내셨을 리 없다 생각합니다만.”
동시에 천덕과 광연에 대해서까진 더 발설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미 도승지 때문에 마음이 무거울 송 씨까지 끌어들여 좋을 게 없었다.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일인 만큼 무조건 최소한의 인원만 알아야 했다.
“자네, 그걸 설마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겐가?”
차분히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머릿속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까맣게 모를 송 씨의 순수한 반응에 도겸은 부드럽게 웃었다.
“좋은 뜻으로 담아 둔 것입니다. 저를 그만큼 아끼고 계셨음에 내심 감읍하기까지 하였으니 말입니다.”
임 씨는 늘 자상하고 좋은 상사였다. 그러나 송 씨는 간혹 호된 꾸지람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문득 아버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겸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기에 이렇듯 두루두루 어버이 삼을 수 있다는, 잃었기에 얻을 수 있는 나름의 이점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상황에 너스레가 나오는 겐가?”
“감사한 마음은 언제든 내비치지 않으면 늦습니다, 영감.”
“무어… 어찌 됐든 간에.”
무안한지 화제를 돌린 송 씨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승지는 나 때문에 그리된 것일세.”
“그리 생각지 마십시오.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기 마련이고, 일찍이 도승지 영감이 그런 일을 벌여선 아니 되었던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사람인지라 내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느낌이 자꾸 들어서 말이야.”
“유서에 자백하는 내용은 없던 것입니까?”
“무어, 그렇다 하더군. 죽기 전에 나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이제는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져서 더 조심하겠다 했었으니까.”
“검시는 끝났습니까?”
“무려 정3품 도승지가 사망한 사건일세. 형조며 한성부에서 득달같이 집으로 찾아가 검시하였다 하던데. 삼검에 사검까지 했다 들었고.”
역시 고관이라 대우가 다르긴 달랐다. 일반 백성들의 변사 사건이라면 초검도 하기 어렵다더니.
“수상한 점은 없었다 합니까?”
“전혀. 유서가 도리어 자결의 확실한 증명이 되었네. 아무도 모르게 갖고 있던 귀한 물건들을 자식들 누구에게 얼마나 남기고자 하는지 그 성정답게 일일이 꼼꼼하게 남겨 놓았거든.”
“그렇다면… 아무래도 타살의 혐의점은 찾기가 어렵겠군요.”
“그렇지. 내가 보기엔 자진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이 자신의 가문과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게 나름의 수를 쓴 것 같네. 무어, 일의 진상이 밝혀져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면야 또 모르겠다만.”
도승지의 부고를 듣자마자 도겸은 조익환을 떠올렸다.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어찌 이리 절묘하게 사건이 맞물려 어그러지는지 납득하기 어려웠건만, 어쩔 수 없이 이런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당시 거절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 말하였는데 말이지….”
“저도 도승지 영감이 단독으로 벌인 일은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어차피 배후에 있는 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다만 도승지가 스스로 자진함으로써 사건 자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을 뿐.
“그보다.”
물그릇을 내려 둔 송 씨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자네가 더 큰일에 휘말려 있는 것 아닌가?”
“아, 제가 횡령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하는 것 말씀이시지요.”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도겸은 기가 차 한숨을 내쉴 수도, 그렇다고 함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자네 집에서 확실한 증좌가 발견되는 바람에 당장 자네를 삭탈관직하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네!”
“…확실한 증좌라 하셨습니까?”
그래서 집이 더 난장판이 되어 있던 것이었군. 도겸이 다 식어 버린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무래도 곧 관군이 들이닥치면 이런 여유도 없을 게 뻔하니 말이다.
***
“너 말이야.”
“아이쿠, 깜짝이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궁이마다 장작을 보충하던 행랑아범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청이 아씨 때문이다.
“아… 아씨, 어딜 다녀오신 것입니까? 아까 순이가 찾으러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잠깐 남의 집에.”
사실 행랑아범은 안채 아씨가 굉장히 어색하기만 했다. 따로 긴 대화라는 것을 제대로 나누어 본 적도 없지 않나. 행랑아범은 어쩐지 꿰뚫어 보듯 서늘하기만 한 청의 시선을 무던히 받아 내기가 어려웠다.
“그, 그러셨습니까? 소인은 어찌 부르신 것입니까? 혹여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최도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 거야?”
그때 대뜸 말허리를 자른 청이 행랑아범을 단박에 긴장케 했다.
“얼굴이 뒷마당의 꽃나무들처럼 울긋불긋해졌잖아,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