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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0)화 (115/197)

우선 몸을 피하는 게 맞을까. 아니다. 도망치는 즉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도겸이 고민하는 사이 남산댁이 다른 소식도 덧붙였다.

“거기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나리. 그사이에 도성 안에서 당상관의 부고도 있었습니다.”

“…당상관의 부고라니. 누가?”

도겸은 이제 뒷골이 당길 지경이었다. 남산댁이 더 조심스럽게 어조를 낮추며 고했다.

“도승지 영감이 며칠 전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합니다. 유서가 있었고요.”

“지금, 도승지 영감이라 하였는가?”

“예.”

“하….”

하필 도성에 오자마자 찾아야겠다 마음먹고 있던 사람의 부고였다.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광연이 세자빈의 죽음에 깊게 연루되어 있는 사람으로 지목한 이가 바로 도승지였던 탓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 말 한 번 섞어보기도 이런 일이 벌어져있을 줄이야. 차라리 천덕의 자백을 기다릴 게 아니라 빨리 한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후회는 늘 기회를 놓친 자의 몫임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상단에서 집 근처를 지켜보게 한 사람에 의하면 도승지 영감이 그리되신 이후 규장각 직제학께서 나리를 찾아 이 집에 자주 들렀다 합니다.”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겸이 퍼뜩 일어났다.

“직제학 영감께서? 직제학이라 하면 두 분이 계신데, 어느 영감을 말하는 겐가?”

“이야기를 전한 자의 말로는 생김새는 고상한 편인데 배가 튀어나오고 희끗한 수염이 난 양반이라 하였습니다.”

직제학 송 씨다. 생각해 보니 직제학 송 씨와 임 씨는 도승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이력이 있지 않나. 뭔가 알고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전해 주어 고맙네. 남산댁은 당장 행랑아범에게 직제학 송 씨 영감댁으로 가 만남을 청하여도 되는지 여쭙고 되도록 빨리 약속을 잡아오라 하게.”

“예.”

남산댁이 즉각 일어나 움직였다. 그리고 도겸은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직제학도 직제학이지만 사실 도겸이 이 순간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세자였다.

하지만 애먼 혐의를 뒤집어쓴 상황에 세자를 만나도 되는 것인가. 언에게 괜한 폐를 끼칠까 고민이 됐다.

“광연이 그 아이와 천덕이놈을 찾은 건 저하께 어떻게든 알려야할 텐데.”

한양에 오자마자 급속도로 피로해짐을 느꼈다. 가만 호흡을 고르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데 조용히 곁을 지키던 청이 물었다.

“해주 어르신이면, 진짜 심청의 아버지 아니야?”

“그렇지. 너도 지난번에 뵌 적이…!”

단순히 대꾸하며 다른 생각을 하려던 도겸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역시.”

이후의 상황만 생각하던 와중에 이 일이 어디서부터 벌어진 일일지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네 간택을 막으려는 것 같구나.”

배후에 누가 있을지 까지도 선명해지는 건 당연했다. 도겸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고민하던 차, 청이 불쑥 제안했다.

“세자한테는 내가 다녀올까?”

“…뭐?”

“네 상황 알려야 한다며.”

“그렇긴 한데 네가 나설 필요는….”

당장 만나는 게 곤란하긴 했다. 그런데 청이 댄 이유가 의외였다.

“너랑 세자는 절연했지만 나는 아직 세자랑 친구니까.”

“…….”

하필 그런 이유를 대는지라, 도겸으로서는 되었노라 단호히 잘라낼 수가 없었다.

***

“너무 호사스러운 목욕이 아니냐?”

욕실로 들어선 언이 옷을 벗으려다 말고 언짢아했다. 목욕물에 꽃잎까지 풍성하게 띄워 놓은 탓이었다.

“백성들은 당장 마실 물도 없다 하는데 어찌 세자 된 도리로 이리 과하게 몸을 씻을 수 있겠냔 말이야.”

그의 질책에 유 내관이 핑계나 변명을 대기보다는 즉각 허리를 숙이며 간청했다.

“송구합니다, 저하. 다음부터는 저하의 예체가 겨우 들어갈 만큼 작은 목욕통을 준비하겠나이다. 부디 오늘만 소인의 어리석음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가련히 봐주시면 아니 되겠나이까?”

세자가 이리 솔직함에 무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조금은 얄팍한 수였지만 언은 모른 척 두 번 잔소리 하지 않았다.

“무어… 이미 뿌려 놓은 꽃잎이 아까우니 오늘은 그냥 몸을 씻겠다만.”

“사실 근래 저하께서 목욕을 게을리하시어 걸음하실 때마다 적잖이 악취가 난다는 소문이 있는지라….”

“무, 무어라?”

겉옷을 벗던 언의 손이 미끄러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 어떤 입이 내게서 악취가 난다고 나불거리더냐!”

버럭 소리치고 나니 더 무안해졌다. 아직 물에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민망한 나머지 벌써부터 뺨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부채질을 하고 싶어도 목욕탕에 부채를 들고 들어올 리 없는지라 언은 괜스레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20년이 넘도록 세자의 곁을 지켜온 유 내관은 상전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 심기를 바로 알아차렸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저하. 소인은 아직 고뿔이 다 낫지 않아 저하께 어떤 냄새가 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옵니다.”

물론 안다고 해서 짓궂은 농담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 나가 보아라! 내 서둘러 몸을 씻고 남은 회강 준비를 하여야 하니.”

“소인이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농담인 걸 알면서도 언은 홀로 있기 위해 더 토라진 척했다.

“됐네. 악취 나는 세자라 혼자 있고 싶으니 유 내관은 갈아입을 옷이나 준비해 두고 나가게. 다른 이들도 내가 다 씻을 때까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 하고!”

언이 단호하게 잘라 말해도 유 내관은 훌쩍이는 콧물처럼 질척댔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적어도 소인은 자리를 지켜야….”

“고뿔 걸린 내관 억지로 부릴 생각 없으니 자네는 나가서 따뜻한 차나 한 사발 하게!”

기어이 유 내관까지 내쫓고 나서야 비로소 언은 목욕탕 안의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왕 아까운 물이니 최대한 청결히 씻기 위해 그는 속적삼까지 모두 벗어 두고 탕으로 들어갔다.

“…후우.”

찌뿌드드한 몸이 더운 물을 만난 얼음처럼 스르륵 녹아들었다. 욕탕의 벽에 기대어 앉은 언은 가만 눈을 감았다.

혼자 있든 아니든 머릿속은 텅 빌 줄을 몰랐다. 욱여넣어야 하는 수많은 서책의 내용들도 그랬지만 근래 조정 안팎으로 심상치 않은 일들이 속출하는지라 보통 심란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저보다야 당장 귀한 신하를 잃고 며칠째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계시다던 아바마마가 더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이런 와중에 해주 목사의 횡령 건에 도겸까지 연루되어 있지 않나. 심증으로는 당연히 음해 공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누군가가 억지로 꾸민 계략이라는 증좌가 없었다. 착잡한 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찰랑이는 물소리 틈으로 욕실의 문이 열리는 희미한 경첩의 소음이 들렸다.

“…유 내관, 벌써 차를 사발로 들이켜고 온 겐가? 혼자 있겠다 하였을 터인데.”

그러면서도 혹시 몰라 가까이에 둔 검집으로 손을 뻗으려던 차, 얇은 휘장 바깥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유 내관이라면 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 말하는 거야?”

언이 그대로 흠칫 굳어졌다. 당연히 유 내관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전혀,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여인의 목소리가 욕실 안에 울렸다. 언은 하마터면 체통도 없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너…!”

눈을 부릅뜬 언은 한 손으로 발을 걷어 올린 채 가만 저를 내려다보는 청과 눈이 마주치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너, 너!”

“다른 사람 들어와도 되면 소리쳐도 상관없긴 한데 그렇게 된다면 편히 대화하긴 어렵겠지.”

청의 나직한 경고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언은 입을 꾹 다문 채 뒤늦게 탈의를 한 몸부터 가렸다. 다시 옷을 입으려니 너무 멀찍한 곳에 벗어 두어 도통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는 슬쩍 돌아앉으며 꽃잎으로라도 가려볼 심산으로 잔뜩 그러모았다.

“그, 어… 어찌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냐?”

“전할 말이 있어서.”

언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를 무렵, 청은 무심히 하얀 손가락을 내려 신기하다는 듯이 물 위에 뜬 꽃잎들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언은 어쩐지 더 낯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 그러면 낮에 동궁으로 사람을 보내면 될 것이 아니냐?”

“그래도 돼? 최도겸은 무슨 사건에 연루되고, 내 아버지란 사람도 의금부에 하옥돼 있다며.”

“…아.”

그제야 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 한들 어찌 궐의 담을 넘는단 말이냐.”

분통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아무렇게나 던진 지청구에 청이 뜻밖에 현명한 반문으로 응수했다.

“나는 궐의 담을 넘으면 안 되고, 세자는 마음대로 남의 집 규방으로 넘어와도 되고?”

잠시 말문이 막혔던 언은 간신히 뻔뻔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그… 어찌, 그 둘을 비교한단 말이냐? 당연히 궐 안엔 금군이 포진하고 있으니 어느 쪽이든 위험해질까 싶어 걱정이 되었던 것이지.”

그러자 가볍게 물을 가지고 놀던 청이 퉁명스럽게 굴며 욕탕 안의 물살을 거세게 일으켰다. 언은 목욕탕 안에서 폭포수를 맞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

“안 들킬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너랑 최도겸은 정말이지, 걱정이 너무 많아.”

서둘러 눈을 가리는 물기를 치워 낸 언은 청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혹여 너를 얕잡아보았다 생각은 말거라. 그게 다 관심이고 애정인 것이니까!”

“관심이 있다면 내가 그 관심을 받고 싶은지도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었던 언은 드러난 속살을 황급히 가리며 별수 없이 대화의 물길을 틀었다.

“그래. 대체 너희 집 사람들은 그간 어딜 가고 없었던 것이냐?”

이리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인 이는 단연코 청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부디, 마지막이 되길 바랐다. 언은 별수 없이 돌아 일어나 최대한 자연스레 속적삼을 찾아 입었다.

“피신한 덕에 줄줄이 추포되어 들어오는 꼴을 보진 않아 다행이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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