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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9)화 (114/197)

“넌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을 터이니 지루한 구경이었겠구나.” 

조금 뚱한 말투에 도겸이 또 부드럽게 웃었다. 내내 헛다리를 짚은 게 고의적이었음을 알고 나니, 어쩐지 최도겸이라는 사람이 선하고도 다소 음흉하게 보였다.

“지루해지기 전에 나한테 넘겼으면 될 일이잖아.”

“사람의 힘으로도 충분히 부정을 찾아내고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인데 어찌 네게 기대겠느냐.”

“어쨌든….”

정신없는 와중에도 청은 들고 나온 돈주머니와 보따리를 도겸의 품에 안겨주었다.

“내가 고른 거 함부로 저런 판에 걸지나 마. 선물인데 부정 탈 뻔했잖아.”

혹시 모르니 정기를 담은 물에 좀 담가둘까 고민이 됐다.

“아,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하였구나. 어차피 찾아올 것이라고만 여긴 터라.”

“근데 그냥 저렇게 두고 가도 돼?”

생각보다 도겸이 뒤처리를 제대로 해놓지 않고 손을 터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자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어차피 판을 깨려고만 한 것이다. 대낮에 대놓고 노름판을 벌이는데 관아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잡아다 관아에 넘겨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가만 듣던 청은 이미 지나간 대화의 연장선상에서 물었다.

“…이런 세상인데도 모여 살고 싶어?”

그리고 도겸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다만 의연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세상이기에 더욱 모여 살아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지팡이를 세워 땅을 짚은 도겸이 한결 가뿐해진 얼굴로 청에게 말했다.

“이제 더는 지체하지 않으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어느덧 물 냄새가 짙은 고을과도 이별할 시간이었다.

***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 데는 역시나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늦게 출발한 탓에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모든 것이 고요하게 잠들 무렵이었다.

“역시 물이 줄었어.”

텅 빈 서촌의 집으로 돌아온 도겸은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샘물을 찾았다. 하지만 청이 신물을 들고 먼 지역으로 다녀온 뒤인지라 수위가 전보다 많이 낮아져 있었다.

확실히 물맛도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체감하고 나니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을 마시던 도겸은 울적해하는 청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그래도 네가 돌아왔으니 또 금방 차오르지 않겠느냐?”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

“어서 물이 차올라 그 기분이 추슬러지면 좋겠구나.”

무녀의 말에 따르면 반쪽짜리 신물들이 만나 물의 수호를 받는 지역이 훨씬 넓어질 것이라고는 했다. 온전할 때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더라도 말이다.

“근데… 왜 이래?”

“무엇이?”

“집 안이 난리야. 전부 부서지고 깨지고….”

“무어?”

벌떡 일어난 도겸은 설마 예상한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혹시 몰라 집을 비우는 동안 은밀히 숨겨야할 물건들은 믿을만한 곳에 나누어 보관해두었는데, 아주 잘한 일이었다.

“혹,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

“그랬다면 들어오기도 전에 알았을 거야. 사람이라면 죽었든 살았든 너랑 나 둘뿐이야. 그 외엔 아무도 없어.”

청의 확답에 도겸은 우선 크게 안도하며 한숨을 돌렸다.

“다행이구나. 혹 이 집의 식구가 변고라도 당한 줄 알고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

혹시 이무기가 찾아오거나 조익환이 술수를 부릴까 싶어 도겸은 동해로 떠나기 전 가솔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었다.

한양에 있는 흑매향의 상단에 은밀히 호위를 부탁해두었던지라 행랑아범과 남산댁, 그리고 순이와 점희까지 네 사람은 며칠간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비해 둔 것인데, 역시나 집안 꼴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그냥 집에 두지 않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왜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몰래 침입했다면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터인데….”

“냄새가 많아서 잘 분간은 안 되는데 적어도 한둘은 아니야.”

“은밀하게 숨어들어 살림을 마구 부수었을 리는 없다. 아마 큰 소란이 일었을 테니 근처 다른 집에 물어보는 것이 좋겠구나. 아마 누군가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길로 도겸과 청은 옆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집에 있던 사람에게 아는 것이 있는지를 묻기도 전에 도겸을 알아본 이가 깜짝 놀라며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나리! 어딜 갔다 이제 오십니까? 대낮부터 아주 한바탕 난리였습니다!”

역시나 도겸은 공공연하게 곤란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팔다리를 잘라 활동을 제한하려 하는 것을 보면 상대가 누구일지도 뻔해졌다.

“사정이 있어 잠시 지방에 다녀왔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것이… 갑자기 관군들이 들이닥쳐 나리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소인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나리께서 무슨… 횡령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 들었습니다.”

“횡령?”

뜻밖에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인지라 도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물었다.

“혹, 내가 수배되었다던가?”

도성 사대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산을 넘어 은밀하게 들어온지라 수배가 내려졌다면 퍽 곤란했다.

“글쎄요. 소인이 그것까지는….”

“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나? 집을 비우는 중에 가솔들까지 휴가를 보내놓아서 말이네.”

“무어… 도성 내 가까운 곳이라면 소인이 나리께서 돌아오셨노라 소식을 전하러 갈 수 있기야 합니다만.”

“다행히 멀지 않네. 매향상단으로 가서 좀 일러주겠는가?”

“그곳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평소 샘물을 여러 번 길어가도록 허락하고 또 서로 왕래가 잦은 집의 사람이라 대화도, 부탁도 어렵지 않았다. 혹 수배령에 포상금이 걸려있기라도 하다면 상단이 아니라 관아로 달려갈 수야 있겠다만, 돈독하게 지내온 정이 있어 그 점에서도 제법 믿을 수 있었다.

“그럼 우리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 어이없는 시비에 말려든 것 같다만 정히 나를 잡고 싶거든 아쉬운 사람이 오지 않겠느냐?”

다시 집으로 가 행랑 마당을 얼마간 서성였을까. 청이 먼저 반응했다.

“순이 발소리가 나.”

“그래?”

다행히 옆집의 사람이 관아가 아닌 상단으로 바로 가준 모양이었다. 대문 근처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나리!”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는지 순이가 흙먼지 냄새를 풍기며 품에 안겼다. 도겸은 어수선한 와중에 억지로나마 웃으며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래. 순이 왔느냐?”

“을매나 나리가 보고팠는지 몰러유… 나리가 안 계시면은 이 순이 눈알이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간다니께유?”

“무어… 나도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 순이가 생각나더구나.”

아이는 고작 며칠 사이에 조금 큰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를 가뿐히 안아 든 도겸이 나머지 가족들도 챙겼다.

“남산댁은, 아범은? 점희도 잘 있는가?”

“저희도 물론 있지요, 나리.”

언제나처럼 차분한 남산댁이 도겸을 반겼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나리 덕분에 며칠 호강하며 지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리.”

여전히 두 사람은 도겸이 볼일을 잘 봤는지 의례적으로라도 성과를 묻지 않았다. 그저 무사함에 안도하는 투였다.

“뭐야? 너 왜….”

그런데 느닷없이 청이 누군가를 보며 놀란 듯이 굴었다. 도겸이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야.”

청이 떨떠름하게 부정하는 틈에 다른 이들은 난장판이 된 집을 보며 기함했다.

남산댁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함부로 나서선 아니 될 것 같아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내가 횡령에 연루되었다 들었네.”

“상단의 사람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해주에 계신 어르신께 일이 생긴 듯합니다. 공물을 받아 한양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몰래 착복하고 기록을 날조하였다고요.”

분노한 도겸이 기어이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숙부님께서 그럴 리가 없질 않는가!”

남의 것을 탐하다니. 가진 것을 털어 근방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도운 사람에게 어찌 그런 누명을 쓰게 한단 말인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이는 누군가의 흉계가 분명했다.

“당연히 모두가 그럴 리 없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해 주 어르신께서 지금 한양으로 압송되어 의금부 옥사에 계시다 하니 뭔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함이 옳다 생각됩니다.”

생각보다 일이 컸다. 뒷목을 잡으며 주춤하는 도겸을 즉각 행랑아범이 부축했다.

“아범은 어서 들어가 나리의 방부터 정리하게. 서둘러 쉬실 수 있게끔.”

“예!”

“나리, 지가 잡을게유. 이리로 기대셔유!”

서둘러 사랑쪽으로 향한 행랑아범의 빈자리를 순이가 채웠다. 그러나 결코 아이가 들어서 좋을 이야기도 아닌지라, 남산댁은 순이에게도 일거리를 주었다.

“순이 너는 무서 하느냐? 어서 안채를 정리해야 할 것 아니냐? 살림들을 정리하려면 일주일은 걸리겠구나. 속히 움직이거라!”

“…예, 아주매.”

오랜만에 도겸을 만나 들떠 있던 순이가 풀이 죽어 안채로 사라졌다.

“저는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솥에 물부터 올려두겠습니다.”

점희는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섰다. 남산댁은 직접 도겸을 이끌고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별채로 향했다. 일을 들어 알아놓을 필요가 있는 청도 함께였다.

“나리께선 해주 목사이신 어르신과 혈연의 관계로 함께 공물을 횡령하고 그에 따라 번 돈을 착복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아마 나리께서 돌아오신 사실이 알려지면 곧장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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