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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8)화 (113/197)

“어어… 눈이 보이지 않는 선비님께서 어찌 야바위의 공을 찾으신단 말씀입니까?”

도겸은 보란 듯이 엽전 꾸러미를 꺼내보였다.

“눈을 뜬들 야바위꾼의 손이 보인 적이 없으니 그저 운에 맡겨보려는 것일세.”

“허?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맞춰보시지요! 소인이 그릇을 전부 섞은 뒤 이 나무 구슬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시면 됩니다?”

“좋네.”

곧이어 도겸의 앞에 나무로 만든 밥그릇 세 개가 뒤집어진 채로 놓였다.

“…할 수 있어?”

“아무 말 말고 한 번 보거라.”

“뭐?”

청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도겸은 웃을 뿐이었다.

“자, 갑니다!”

그리고 야바위꾼이 재빨리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어쩐답니까?”

야바위꾼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으로는 도겸의 돈을 날름 챙겼다. 그리고 곁에서 지켜보는 청은 속이 터져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물기둥을 올려 이 판을 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하, 이번에도 틀린 것인가?”

와중에도 도겸은 느긋하게 웃기만 했다. 참으로 분통이 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거 제가 송구할 지경입니다만.”

어느새 도겸이 잃은 돈은 무려 서른 냥, 반대로 딴 돈은 고작 여섯 냥에 불과했다. 단 세 푼짜리 놀이가 어찌하여 이렇게 판이 커졌냐 하면, 간혹 운 좋게 도겸이 맞출 때마다 야바위꾼이 판돈을 높여 자신이 잃은 돈을 단박에 몽땅 딸 수 있게끔 살살 회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겸은 번번이 홀랑 넘어가 가진 돈을 탕진하고 말았다. 처음엔 제법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그가 실없이 돈만 잃자 이제는 하나둘 혀를 차며 멍청한 양반이라며 몰래 흉을 보고 있었다. 도겸의 귀에 들어가진 않는 모양이었지만 못들을 리 없는 청은 속에서 고드름이 얼어갔다.

“어떻게, 한 번 더 해 보시겠습니까요?”

“흠.”

“판돈을 조금 더 올리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한 판에… 열 냥 어떻습니까? 나리께서 구슬을 찾으시면 무려, 쉰 냥으로 드립죠!”

호기로운 제안을 받은 도겸이 선뜻 또다시 엽전 꾸러미를 꺼냈다.

“좋네. 한 번 해 보지.”

“좋습니다! 나리께서 너무 잃으시는 것 같아 소인이 마음이 쓰려서 말입니다.”

돈을 본 야바위꾼이 걸려들었다는 듯 음흉하게 웃다 청과 눈이 마주쳤다. 서늘한 눈빛의 온도를 느꼈는지 야바위꾼이 아닌 척 눈을 피하며 서둘러 구슬을 그릇 안쪽에 넣었다.

“자, 가운데 그릇에 넣었습니다. 옆에 계신 아씨께서도 보셨지요?”

도겸이 짚으려 하면 재빨리 구슬을 소매에 숨기는 것도 다 보았다. 하지만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도겸이 아무 말 말라고 한데엔 왠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번번이 참는 중이었다. 필요하면 도와 달라 할 법도 한데, 청이 있는 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청은 야바위꾼 대신 언제든 행패를 부리는 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곁에 세워 둔 왈패 같은 녀석들을 감시했다. 물의 신물을 얻은 이후 빠지진 않아도 제자리에서 돌아가기는 하는 반지를 살살 굴리면서.

“그럼 섞습니다!”

또 석 냥을 챙길 심산인지 야바위꾼이 전보다 더 빨리 그릇을 섞었다. 나무 그릇 안에서 구슬이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청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럼 골라보십시오!”

한참을 섞다가 드디어 멈춘 야바위꾼이 도겸에게 들으라는 듯 나무그릇을 하나씩 두드렸다.

“자, 어디에 있습니까?”

“흠….”

야바위꾼이 준 단서라곤 같은 나무그릇을 두드리는 소리 셋일 뿐인데, 도겸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첫 번째?”

“아이고, 이걸 어쩝니까!”

당연히 오답이었다. 야바위꾼이 탄식하며 그릇을 뒤집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구슬은 두 번째 그릇에서 나왔다. 도겸은 앉은 자리에서 열 냥을 더 잃었다.

“이런, 오늘은 운이 없는 모양이군.”

그런데 도겸은 느긋하기만 했다.

“…최도겸.”

보다 못한 청이 도겸의 옆구리를 찔렀다. 움찔 놀란 도겸이 응답했다.

“왜 그러느냐?”

“혹시 주머니가 너무 무거워서 비우고 가려는 거야?”

“하하… 글쎄.”

멋쩍은 듯 턱을 긁적인 그가 입가에 더 진한 미소를 띠며 야바위꾼에게 처음으로 먼저 제안했다.

“슬슬 시간이 없으니… 딱 한 번만 더 해 보고 일어날까?”

“아직도 더 잃을 게 있다고?”

“기왕 짐을 비우려면 깨끗하게 비워야 하지 않겠느냐?”

“…뭐?”

그러면서 가솔들에게 주기 위해 산 선물 꾸러미를 통째로 노름판에 내놓는 것이 아닌가.

“이건 직전에 서른 냥쯤 들여 사들인 장신구들이지. 어떤가?”

보따리를 본 야바위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복잡한 인간을 다 이해하지 못한 청이 보기에도 눈독을 들이며 머리를 굴리는 게 보였다.

문제는 이걸 봐야하는 도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 아하하! 좋습니다. 그럼 소인은 백오십 냥을 드리는 것입니까?”

“고작 서푼짜리 야바위판인데, 백오십 냥이나 내어줄 수 있겠는가?”

“아휴, 그럼요! 소인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부렁을 나불대겠습니까?”

야바위꾼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주머니를 마찬가지로 놀이판 위에 올려두었다. 범상치 않은 판이 벌어지는 것을 감지한 구경꾼들이 하나둘 더 모여들었다.

기어이 엄청난 판돈으로 커진 구슬 찾기가 시작됐다.

“자, 섞습니다요!”

가볍게 손을 푼 야바위꾼이 무서운 속도로 뒤집은 그릇들을 섞었다. 청이 보기에도 제법이었다.

어쩌면 구경꾼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더 과하게 섞었을지도 모르는 야바위꾼이 마침내 일렬로 늘어놓은 사발들을 가리켰다.

“다 되었습니다. 고르십시오, 선비님!”

도겸은 마지막이라 하여 전혀 긴장하지 않고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슬쩍 알려 줄까. 잠시 고민하던 청이 도겸의 손을 잡았다.

“저기….”

“괜찮다, 청아.”

반대로 든든히 잡아주며 너그럽게 웃는 도겸은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꼭 얼굴 위로 가짜 얼굴을 또 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 번째로 하겠네.”

드디어 도겸에게 운이 트였다. 구슬이 들어 있는 그릇을 정확히 고른 것이다. 청의 눈이 약간 커졌다.

…흑매향의 수장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런 구슬 찾기 따위로 돈을 벌고 다녔다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세, 세 번째요…?”

역시나 자신만만하게 섞은 야바위꾼이 약간 당황하며 다소 굼뜨게 행동했다. 도겸이 주로 두 번째를 고른 탓에 일부러 세 번째로 옮겨두었음이 분명했다.

“자, 한 번 열어보겠습니다….”

백오십 냥을 잃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이번에야말로 장님을 등쳐먹으려던 야바위꾼을 단단히 혼내주려 벼르고 있던 청은 내내 분노한 탓에 입 안에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며 다시 관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눈알을 굴리던 야바위꾼이 슬쩍 손을 놀리는 게 아닌가.

“아… 이것 어쩌… 크악!”

기어이 청이 손을 뻗으려던 차, 놀랍게도 도겸의 지팡이가 먼저 움직여 야바위꾼의 손을 후려쳤다. 그리고 분명 세 번째 그릇 안에 있어야 할 구슬이 손 안에서 튕겨나갔다.

“어?”

청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구슬을 들어 구경꾼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릇을 뒤집지도 않았는데 어찌 구슬이 나온 거야?”

“…예? 아, 그, 그것은 소인이 혹시 잃어 버릴까 여분으로 들고 있던 것이라!”

야바위꾼이 어설프게 웃으려 넘기려 했지만 도겸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청아.”

“응?”

“사발들을 뒤집어보겠느냐?”

“그…!”

청은 대답하는 대신 재빨리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야바위꾼이나 곁을 지키는 녀석들이 먼저 수를 쓰게 두어선 안 됐으니까. 그리고 반응은 도겸이나 청이 하기도 전에 목을 잔뜩 뺀 채로 주변에 둘러선 구경꾼들이 먼저 내어놓았다.

“어… 없는데?”

“없지?”

“역시, 공갈이었던 게지?”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도겸이 손을 털며 일어났다.

“이렇게 큰 판을 벌이는데도 관아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뒷돈이라도 찔러주고 있던 것인가?”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떨어진 것입니다. 그릇을 뒤집으면서 굴러떨어진 게 분명…!”

“재주가 좋아 제법 손이 빠르긴 하더구나. 하나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고질적인 습관이 남기 마련이지.”

“그 무슨!”

“반드시 내가 고르는 사발의 오른편에 있는 사발로 구슬을 옮기던데.”

“…….”

“처음 한두 번을 일부러 져주며 판돈을 올리고 그 다음부터 빼앗아가는 방법이야 흔하다지만 네 손버릇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그냥 둔 것이다.”

야바위꾼이 이번엔 다른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슬쩍 도겸이 건 장신구들을 가져가려 하기에 막아섰더니 움찔 놀라는 모양이 아주 가관이었다.

“어찌하겠느냐? 잘못을 인정한다면….”

“뭐, 뭐해! 어서 들고 튀어!”

녀석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냅다 판을 도겸 쪽으로 엎고 걸린 돈만 챙겨 달아나려 한 것이었다.

“청아, 조심하거라.”

“뭐?”

답하기도 전에 순간 휘두른 지팡이가 눈앞을 스쳐 갔다. 도겸이 녀석들에게 가차 없는 매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즉각 칼을 뽑아들고 반격하는 사내들 중 하나는 청이 가볍게 후려쳐 때려눕혔다. 그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야바위꾼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크억…!”

“좀 더 잘하지 그랬어. 나도 최도겸이 맥없이 잃는 걸 보고 싶긴 했는데.”

“이, 요망한!”

웃기지도 않게 반격하려는 녀석을 자칫 죽일까 싶어 청은 간단히 녀석을 혼절시켰다. 도겸은 이미 돈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던 다른 사람에게 화월각에 가서 사람을 불러오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더 쉽게 녀석들을 제압하고 나자 나머지는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당장 내 돈 내놓으라는 고성을 지르며 발길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물러난 청은 도겸에게 야바위를 구경하고 난 짤막한 후기를 들려주었다.

“나한테 찾아내라 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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