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있으면 좀 일찍 사뒀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전히 북적이는 장터를 지나며 청이 투덜거렸다. 도겸이 고을을 떠나기 전 굳이 집에 있는 어린 순이에게 줄만한 선물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겸도 나름대로 항변할 사유는 있었다.
“내 눈이 이 모양이니 네가 봐주었으면 싶어 함께 나오려 하였는데 네가 내도록 잠만 자지 않았느냐?”
“그야….”
“혹, 얼마 전 한양서 오신 선비님 아니십니까?”
“음? 그렇소만.”
“잠시만 서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그때 누군가 도겸에게 알은 채를 했다. 멈춰 선 틈에 급하게 다가온 이가 뭔가를 쥐여 주었다. 작은 보자기로 싼 보퉁이는 손의 촉감으로 보건대 이런저런 간식일 것 같았다.
“왜 이런 것을 주는 것이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드리고 싶습니다! 나리가 아니셨다면 왈패놈들에게 엄한 자릿세를 뜯기지 않았겠습니까?”
며칠 동안 도겸은 삼득과 무사들을 동원해 근방을 샅샅이 뒤져가며 천덕과 함께 수배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찾았다.
어찌 뿔뿔이 흩어진 것인지 천덕을 제외하고는 찾아낼 수 없었지만 이왕 칼자루를 빼든 김에 썩어빠진 왈패들을 모두 도려낸지라 도겸은 의도치 않게 고을 상인들에게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뜯긴 자릿세가 워낙 많았던 데다가 온갖 행패를 부려 생계에 위협이 되고 있던 차에 나서서 왈패들을 몰아내 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받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엔 받아두기로 했다. 그나마 청이 입에 대는 간식거리였기 때문이다.
“…고맙네. 하나 나보다 더 이 고을의 사람들을 아끼는 이들은 화월각의 행수와 부행수이니 감사는 그들에게 하게.”
“아휴, 암요. 잘 알지요. 하지만 그분들에게 감사를 올리면 그분들은 그저 한양에 계신 선비님 덕이라 하셔서 저희들은 그간 감사를 할 곳이 없었습니다요.”
“…그런가.”
그 정도는 좀 누리고 살아도 될 터인데 화월과 삼득은 꼬박 공을 제게 돌려온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도겸은 상인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것 좀 먹어보아라, 청아.”
“생각 없어.”
귀한 선물을 통째로 넘겨주는데도 어쩐지 청은 여전히 시큰둥하기만 했다.
“어찌 그러느냐. 헤어지는 마당에 화월이와 투닥거리기나 하고.”
“내 건데 자꾸 쓸데없이 욕심을 내니까 그렇지.”
“무엇을 가지고 싸웠기에?”
“뭐긴 뭐야. 너지.”
“그래, 나… 무어?”
냄새가 밸지도 모르니 닿지 말라 한 것을 듣긴 했지만 설마 정말 저 때문일 줄이야. 도겸이 짐짓 놀란 틈에 청은 더 화를 냈다.
“독점하기로 한 거 잊었어? 나한테는 아는 사람 만들지 말라고 했으면서 너는 왜 자꾸 주변에 여자를 둬?”
난봉꾼이나 다름없다는 뜻이 아닌가. 난데없이 공격당한 도겸은 황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여자라니. 내가 언제 여인을 함부로 가까이 하였다 그러느냐?”
“송유화도 그렇고, 저 화월이라는 여자도 그렇고. 도성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너에게 들러붙지 않았어?”
그때마다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청의 기억력이 나빠졌을 리도 없고. 가만 생각하던 도겸은 무작정 항변하는 대신 뾰족해진 청의 심기를 먼저 가라앉히기로 했다. 억울했지만 청이 화를 내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래. 늘 조심한다고 하였는데 사람들과 사이가 가까워지니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흐려져 스스럼없고 허물없이 대한 모양이구나.”
그러자 청이 도겸의 팔등을 덥석 잡으며 되물었다.
“스스럼없다는 게 내가 아는 의미 맞아?”
“그렇지 않으면?”
“스스럼없이 들러붙으면서 너를 갖고 싶어 안달 난 눈을 하고 있었어, 그 여자.”
“청아, 그건….”
“내가 먹잇감 노리는 눈도 못 알아 볼 것 같아?”
“…….”
“넌 내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다른 인간 냄새 함부로 묻히지 마.”
청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분명 겁을 먹는 게 정상일 터인데 어찌하여 마음이 붕 뜨는지 모르겠다. 도겸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 좋든 싫든 타인을 향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상대가 나와 같은 감정이길, 혹은 다르길 바라는 것도 크나큰 욕심이고. 아무리 내 사람이라 한들 그 마음까지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역시 피곤해. 복잡하고.”
사람이 피곤하다는 것인지 이 조선 땅 자체가 피곤하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복잡한 동물이고 그럼에도 좋은 점이 더 많으니 모여 사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다 문득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청에게 너무 이 복잡한 세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의 조력자인 제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도겸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네게 하나는 약속 할 수 있다.”
“뭔데?”
“누가 노리든 네가 아닌 사람에게 먹힐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러니 부득이 냄새가 좀 묻더라도 이해해 주면 아니 되겠느냐? 물론 나도 앞으론 더 주의하겠다만 누군가와 스치거나 부딪칠 수도 있으니….”
“그 말.”
“음?”
“그럼 나는 너를 잡아먹어도 된다는 뜻이야?”
청의 말에 도겸은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스럽게 묻는구나. 언제는 한입 거리도 안 된다 하더니.”
“뭐… 그렇다면 믿어주고.”
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물의 신물 때문에 심란한 것 같았는데 염려하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여 다행이었다.
“청아, 장신구 상전이 보이느냐? 배가 들어왔는지 사람이 많아져 한 걸음을 나가는 것도 어렵구나.”
“높은 곳에 올라가면 보일 텐데. 보고 올까?”
이목을 끄는 일은 더 벌여선 안 됐다. 도겸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조금만 더 가보자꾸나.”
약속을 하고 나니 도겸은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와 부딪칠까 더 조심스러워졌다. 청에게 제 팔을 잡으라고 해도 될까. 낯선 고을이라지만 이래저래 고민이 됐다.
“댕기부터 비녀, 머리꽂이, 가락지! 없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니 어서 들여가셔야 합니다요!”
와중에 다행히 장신구를 파는 상전이 가까이에 있었다. 호객 소리가 이렇게도 반가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도겸이 상전 앞에 다다랐을 때 청에게 부탁했다.
“청아, 네 안목으로 순이가 좋아할만한 것을 좀 골라 줄 수 있겠느냐?”
“내가?”
“그래. 혹은 그 아이에게 어울릴만한 것도 좋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거침없이 고르는 청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귀찮아서 아무 거나 고르는 것 같았다. 물건을 고르는 틈이 짧아질수록 도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니냐?”
“성의가 없다고? 순이는 나랑 무조건 반대로 고르면 되는데 왜?”
아, 생각이 짧았다. 당연히 청이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이 훨씬 좋을 텐데 또 사람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청을 끼워 맞추려 했다. 도겸은 즉시 실수를 인정했다.
“아… 선물은 고르는 것도 정성이라 생각하여 실언하였구나. 전부 네 뜻대로 하거라. 고르는 김에 남산댁의 것도 골라 주면 좋겠는데.”
도겸의 심심한 사과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청이 다시 선물을 골랐다.
“남산댁은… 이거.”
그나마 남산댁은 스승님이라고 조금 신경을 쓰는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났다.
“무얼 골랐느냐?”
“비녀. 맨날 나무로 만든 비녀만 쓰는 것 같아서.”
“아마도 여전히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럴 것이다. 아무리 품삯을 올려주어도 도통 새 옷 한 벌을 제대로 지어입지 않더구나.”
“…그래?”
“그렇대도. 다 고른 것이냐?”
“아니. 이제 내 거 고를 건데.”
이럴 땐 제 손으로 골라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만 고민하던 도겸이 상전 주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손대는 건 전부 담아주게.”
“…예? 아, 예! 그리 합죠!”
물 흐르듯 매끄러운 머리에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직접 대어 주고 골라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머리꽂이를 대어 주면 시리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골치를 썩이는 신물 대신에 그 조그맣고 하얀 손에 어울리는 가락지를 끼워 주어도 좋았겠지.
그러지 못하여 안타깝고 서글펐지만 아마도 청이라면 소화하지 못 할 것이 없을 터라, 아마 눈이 보였다 한들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도겸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이거 하나면 돼.”
그런데 청이 웬일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만을 골랐다.
“그… 아씨, 겨우 그 댕기 하나면 되는 것입니까?”
주인이 퍽 아쉬운 소릴 했지만 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주인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는 듯 했다.
“급히 가다 보면 어느 산중에 다 내 버리고 갈지 몰라서.”
“예?”
“…그, 계산이나 해 주게.”
반대로 청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은 도겸은 무안한 나머지 서둘러 값을 계산하고 돌아섰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가면 돼?”
그때 장터 한쪽에서 사람들이 우레와 같이 소리치거나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뭐야?”
도겸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청에겐 퍽 새로운 모양이었다. 가만 귀를 기울이던 도겸이 짐짓 미간을 좁혔다.
“…대낮에 노름판이 벌어진 모양이구나.”
대체 관아에서는 일을 하는 것인가 마는 것인가. 이 고을의 관아를 적극적으로 파헤쳐볼 권한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고발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겸은 더 이상 일을 벌여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와중에 재미난 대안이 떠올랐다.
“청아. 저것을 구경하지 않겠느냐?”
“뭐?”
“잠시면 된다.”
의아해하는 청의 손을 잡은 도겸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복잡한 노름판에 끼어들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어디 한번 이 야바위꾼을 이겨보시라! 참가는 단 세 푼, 세 번만 맞추면 석 냥! 이른바 삼삼삼 야바위 되시겠습니다!”
무려 100배를 부풀려 현혹하는 호객행위였다. 재미로 한두 번 해본들 크게 잃는 것도 아닌지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틈을 만들어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다. 간신히 들어가느라 사람들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겸은 필요한 상황에 뻔뻔하기 그지없는 양반노릇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도 한 번 해 봐도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