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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6)화 (111/197)

“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닐까 걱정이 되어 말이다.”

“풀어헤치고 다닌들 넌 제대로 묶어주지도 못하잖아.”

물론 청에겐 당해 내기가 어려웠지만.

“그…래서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제대로 단장을 하였는지 확인을 해두려는 게 아니냐?”

“화월이라는 인간이 해 줬어. 근데….”

“근데?”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아. 아니,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어디….”

무심히 올라가 보드라운 머리칼을 만지려는 손에 족쇄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꾸 닿아서 정이 쌓이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도겸은 아닌 척 뒷짐을 지며 아무런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그럼 화월에게 살살 하라 말을 했어야지.”

“그걸 어떻게 말해?”

대뜸 쏘아붙이는 청의 반응에 도겸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대책 없이 한 말이긴 했지만 청이 단박에 끓는 물처럼 반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왜 아프다고 말을 못 하느냐?”

“아프다고 말하면!”

약간 커졌던 청의 목소리가 힘없이 기어들어 갔다.

“…겨우 인간한테 지는 것 같잖아.”

“뭐?”

“그리고 그다지 아픈 것도 아니었거든?”

비록 얼굴은 볼 수가 없었으나 목소리의 온도만 봐도 씩씩대는 청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청은 화월과의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에서 지기 싫어 머리를 아프게 해 주는데도 꾹 참았다는 뜻이지 않나. 청이 친하지 않다고 하여 그런 말을 못 할 성격이 아닌데다 설령 이유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라 의아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정말이지….”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용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리 순이처럼 어리게 굴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왜 웃어?”

신중히 행동해야 했거늘, 자칫 불똥이 튀고 말았다. 제게 화살을 돌린 청을 서둘러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 훨씬 고달파질 것이 자명하기에.

“내가 언제 웃었다 그러느냐.”

“…웃었는데.”

어쩐지 살갗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청이 정말로 화가 나면 의지와 상관없이 독과 같은 냉기를 뿜어낸다는 것을 아는지라 도겸은 절로 긴장하며 헛기침했다.

“크흠, 그, 청아. 그러지 말고….”

“나리.”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고민하던 차, 뒤에서 화월이 불렀다.

“이제 한양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마침이라기보다는 하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에 화월이 나타났다. 도겸은 화월과 청이 또 무의미한 줄다리기를 하지 않도록 슬쩍 청을 가리고 섰다.

“…그래. 생각보다 늦어져 서둘러야할 듯싶구나.”

“조금 더 계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소인이 한양까지 모시고 싶은….”

“아니!”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친 도겸이 다음 순간 어조를 가다듬고 차분히 거절했다.

“그… 그럴 필요 없다. 행수가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나리께선 우리 수장이 아니십니까. 고을 입구까지라도 모시겠습니다.”

“최도겸은 나랑 같이 갈 건데.”

기어이 튀어나온 청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고을 입구로 곱게 안 나갈 거라서.”

“…어째서 곱게 안 나간다, 그리 말씀하십니까?”

어쩐지 가벼운 기싸움이 아닌 듯 했다. 머리를 단장하는 일일 뿐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만 듣던 도겸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기, 어쩐지 서로 너무 냉담한 듯한데, 조금 차분하게….”

“곱게 안 가니까 곱게 안 간다고 하는 건데 왜, 직접 경험해 보고 싶어?”

그러나 소용없었다. 벽처럼 키가 큰 도겸이 가로막아봤자 두 여인은 살벌하고도 우아하게 언쟁하기 바빴다.

“나리와 함께 갈 수야 있다면 얼마든지요. 아씨야말로 제대로 답해 주십시오. 곱게 안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묻지 않습니까? 우리 나리처럼 귀하신 분께서 어찌 그리 험한 길로 가셔야 하는지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만.”

“화월아….”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저인데, 어쩐지 두 여인이 저를 보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풍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도겸도 기어이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말하는 고운 길은 그럼 뭔데?”

“그야 당연히 가마꾼들을 데려다 가마에 나리를 모시고 한양까지 안전하게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가면 한양까지 석 달 열흘은 걸리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나리를 고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네 나리와 함께 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다고?”

정확한 이동 방법을 알 리 없는 화월이 오해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청의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럼 네 그 뭉게구름 같은 머리채를 잡아 들고 가면 되겠구나.”

“처, 청아!”

다행히 청이 지척에 있었다. 도겸은 청을 잡아 제 뒤로 물리며 화월이 있는 쪽으로 섰다.

“둘 다 그만하여라. 어찌 이리 맥락도 없이 싸우느냐?”

“안 싸웠는데?”

“어찌 제가 함부로 ‘아씨’와 싸우려 들겠습니까?”

싸우지 않았다며 고집을 부리는 말투들부터 가시가 잔뜩 돋혀 있다는 걸 두 여인은 모르는 듯 했다. 도겸은 우선 둘을 떨어트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월이 너는 함부로 움직일 생각 말거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나를 무능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송구합니다, 나리.”

“그리고 청이 너는 약한 것들을 지키겠다 하였으면서 어찌 그리 쉽게 힘을 드러내느냐?”

“…뭐?”

청이 되묻는 틈에 도겸은 화월까지 엄히 다스렸다.

“화월이 너는 괜히 가마꾼들을 부를 생각 말거라. 요란하게 갈 생각도 없으니. 나와 청이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드러내선 안 된다. 왈패들이 그 틈을 타서 광에 가두어둔 놈을 구하러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야 걱정 없습니다. 우리 여각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저자의 왈패들 머릿수에 두 배는 달한다는 것을 알지 않으십니까?”

화월이 나름의 이유를 댔지만 도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야 알 수 없는 일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고 너는 자중하며 자리를 지키거라. 청이가 사람이 아님을 알지 않느냐. 가는 길도 걱정할 것 없다. 신속하게 갈 것이니.”

“하면 정녕… 이대로 가신다는 것입니까?”

그 순간 뒤에 있던 청이 도겸을 홱 끌어당겼다.

“왜 그러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한 도겸이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도겸한테 손대지 마.”

다만 화월에게 경고하는 청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질 뿐이었다.

“…최도겸한테 다른 인간 냄새 배는 거 싫으니까.”

화월이 제게 손대려한 모양이었다. 도겸은 제 팔을 부러트릴 듯이 잡는 청의 손을 어렵사리 떼어내며 난데없는 싸움을 중재했다.

“청이가 냄새에 워낙 민감해 이러는 것이니 네가 이해 해다오.”

“…예, 나리.”

청이 싫다 하니 함부로 화월을 다독일 수도 없었다. 가뜩이나 눈이 보이지 않은 직후로는 더 조심스러워진지라 도겸은 청을 데리고 돌아섰다.

“곧 다시 보자꾸나.”

“나리!”

다급히 부르는 화월 때문에 도겸은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느냐?”

“꼭… 오셔야 합니다.”

어쩐지 울먹이는 목소리였지만 제 눈이 이리되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런 듯했다. 저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도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까지 너도 몸 성히 잘 지내야 한다.”

“예.”

화월을 뒤로하고 도겸은 청과 함께 여각 밖으로 나섰다.

***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직제학 송 씨와 임 씨는 파리해진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송 씨에게 임 씨가 다그쳤다.

“설마 우리가 움직여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정녕, 그리 된 것인가?”

아침 일찍 파루가 치고 얼마 되지 않아 두 직제학의 집으로 날아든 소식은 바로 누군가의 부고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얼마 전 함께 술을 마시며 우애를 나누었던 정3품 통정대부 도승지의 죽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식을 들은 임 씨가 갓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혼이 나간 듯 송 씨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곤 마찬가지로 충격에 휩싸여 있던 송 씨와 머리를 싸매고 내내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도승지는….”

내내 말이 없던 송 씨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인 것이네.”

“무어?”

도승지를 찾아다니며 설득했던 일이 설마하니 숨통을 조이는 일이 됐을 줄이야. 그야말로 숨이 턱 막혀 버린지라 송 씨의 낯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죽인 거야! 내가 도승지를 몰아붙인 게지. 그런 게지!”

간밤에 도승지는 기어이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최근까지 열렬히 쫓아다니며 설득하려 했던 송 씨가 그 죄책감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정신 차리게!”

자리에서 일어난 임 씨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송 씨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 것뿐이지 않나.”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던 송 씨가 눈물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도승지는 이미 오래도록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네. 다만 혼자 모든 책임을 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게지. 한데 그런 사람을 내가 내몬 게야.”

며칠 전부터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한다 들었지만 기어이 이런 결론이 나고 말았다. 며칠간 소장 중인 귀중품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나누어 자식들에게 남겼다더니, 설마하니 주변 정리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혹시… 타살은 아니겠지?”

그저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르는 송 씨를 두고 임 씨가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했다.

“그, 간택령이 내려진 이후로 자결했다던 처녀들과 양상이 유사하지 않나.”

“며칠 전 도승지가 휴직계를 올리고 요양을 한다 하였을 때, 찾아간 적이 있었어.”

고개를 저은 송 씨가 음울한 얼굴로나마 힘겹게 대꾸했다.

“물론 문전박대를 당하였지만 그 집이나 주변 분위기는 알 수 있었네. 거의 일개 군대 하나가 도승지의 집 안팎에 포진하여 있다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었지.”

“…그 말은.”

“그래. 도승지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던 것일세.”

고개를 든 송 씨가 붉어진 눈으로 임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언제고 죽임당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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