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 미처 마시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이보다 더한 헛짓이 또 있을까.
“물 마셔.”
“으음….”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도겸을 강제로 깨우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청은 한 손에 든 병과 깊은 잠에 빠져든 도겸을 번갈아 보다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양반의 체면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또 반은 흘리고 마실지도 모르니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또 살려 놓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했지만 눈을 망가트린 게 조금 걸리기도 하고….
결론을 내린 청은 즉각 실천에 옮겼다. 도겸에게 마시게 하지 않고 제 입에 전부 털어 넣었다.
물을 양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대로 삼키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청은 도겸에게 입을 맞추며 그 틈에 천천히 흘려보냈다.
뜨거운 입술은 청에게 불과 같았고 입 안은 용암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좋을 리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 열기를 가라앉히고 싶다는 욕구와 오기가 더 강하게 들었다. 청은 더 깊게 파고들었다.
정말이지, 최도겸은 희한한 인간이었다.
“하….”
간신히 열기로 뿜어져 나오는 부정을 식혀 없애고 일어난 청은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이 눈을 뜨고 있었다.
“…….”
“…….”
전에 심장을 얼릴 듯이 뻗어 나가는 냉기를 뽑아내 준 뒤로 한참이나 피하며 데면데면하게 굴지 않았던가. 아직 그 이유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또 그럴까 싶어 몰래 하려던 건데,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청아.”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을 반쯤 뜬 도겸이 입을 열었다.
“응.”
“이것은….”
그냥 도겸을 기절시킬까 고민하던 차, 그가 물었다.
“꿈인 것이냐?”
청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응, 꿈이야.”
“아니야. 꿈이 아닌 것 같구나.”
뜬금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겸이 불쑥 손을 들어 만져 보려 했다. 청은 휙 피하며 다시 물었다.
“왜 꿈이 아니야? 꿈 맞는데.”
“아니다. 나는….”
비몽사몽에 아무리 봐도 정신이 없어 보이건만, 도겸은 단호했다.
“지금껏 이렇게 다디단 꿈을 꾼 적이 없다.”
“…….”
멈칫한 청은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정기가 맛있긴 했나 보지.”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청은 별수 없이 무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이젠 어느 정도 힘 조절도 할 줄 알게 되어 자칫 죽이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꿈인 거 확인시켜 줄까? 맞아도 아프지 않을걸.”
그 전에 기절할 테니까. 청은 차가운 손가락으로 도겸의 눈꺼풀을 조심스레 덮었다.
“꿈이라면.”
막 내리치려던 차, 도겸이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있어다오.”
“…….”
그러면서 그가 덥석 청의 다리를 베며 파고들었다. 강하게 밀어냈다가 잠이 깨 버리면 어쩌나.
인간은 충분한 잠을 자야 하지만 도겸이 근래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알고 있던 청은 뜻밖에 고민이 됐다.
“조금만….”
술과 잠에 취한 도겸이 순이처럼 조르는 통에 결국 청은 서둘러 도겸을 재우고 술을 찾아 나서려던 계획을 조금 뒤로 미루었다. 대신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도겸을 유심히 관찰했다.
잠든 인간을 이렇게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열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밤공기는 여전히 짭조름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 속에서 조금은 단맛이 났던 것도 같다.
***
천덕이 입을 열기까진 꼬박 사흘이 걸렸다.
“으으, 으… 으!”
그사이에 제대로 먹기는커녕 씻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한 천덕은 제법 수척해진 낯을 하고 있었으나 눈이 보이지 않는 도겸은 물론 알지 못했다.
그저 광 안 전체에 불쾌한 악취가 나는지라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입구 근처에 서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어쨌든 그래서 더 냉혹할 수 있었다.
“그래,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 하였다지?”
도겸의 손짓에 잠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틀어막힌 입이 자유로워졌는지 천덕이 냅다 소리쳤다.
“내…!”
어렵사리 입을 열게 되자 급하게 소리부터 내지르려던 천덕이 사례가 들렸는지 마른기침을 연거푸 토해 냈다. 듣기만 해도 목구멍이 칼칼해지는 소리였다.
“내, 내가 죽어 버리면 나만 한 증인이 또 없을 텐데!”
간신히 기침을 가다듬은 천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청껏 소리쳤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형편없었으나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도겸은 어쩐지 며칠째 아주 날아갈 듯한 몸 상태인지라 상대적으로 훨씬 여유가 많았다.
“사흘을 굶고도 여전히 건방지군. 나는 네가 죽어도 상관없다. 아니, 차라리 아주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고 있지.”
“…뭐?”
“머리가 장식이 아닌 한 생각할 겨를이 많았을 텐데, 아직도 모르겠느냐?”
“…….”
“무려 사흘이나 너를 이곳에 가둬 두기만 하고 한양으로 압송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너는 죄인의 신분일 뿐 그다지 중요한 증인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 하지만 나는 반가의 여인들을 죽이라 사주한 자를 알고 있는데!”
“또한.”
도겸은 전혀 무감한 투로 잘라 말했다.
“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지라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무, 뭐? 누, 누, 누구냐!”
“그걸 내가 왜 이야기해야 하느냐?”
도겸이 무신경하게 굴자 허기에 지친 상태라 극도로 예민한 데다 자제력도 잃어 쉽게 조바심이 난 천덕이 기어이 술술 아는 것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나는… 나는 앵속각이 어디로부터 들어오는지도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함경도가 아니냐?”
“뭐? 그걸 어찌…!”
조익환의 사병들도 바로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 이미 도겸이 부리는 보부상들이 팔도사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후보지들을 전부 탐색한 뒤였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조익환이 암암리에 사병을 키우고 있는 함경도인지라 뭉뚱그려 넘겨짚기만 해도 천덕이 펄쩍 뛰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네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뼈 마디마디를 전부 부수고 살점을 도려낼까 고민이 될 뿐….”
물론 천덕은 모를 것이다. 사실 도겸에겐 정확한 증거가 없음을. 그래서 자신의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귀한 진술이 되고 있다는 것까지.
“뭐, 다른 건 없느냐?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건.”
“그, 그것이… 그것이! 앵속각을 팔아넘긴 투전판이나 기루가 도성 내에 어디 어디인지도 이 천덕이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들어 있는데 말이지…!”
다급해진 천덕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고민하는 척했다.
와중에도 함께 일을 벌인 자들에게 의리는 있는지 이름 한 자를 내놓지 않았다.
“그거야 이미 양귀비에 중독된 자들을 잡아다 심문하면 될 일이 아니냐?”
“아니, 뭐,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영 쓸모가 없군.”
안절부절못하는 천덕을 뒤로하고 도겸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나는 이제 한양으로 갈 것이다.”
“…뭐?”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지는 모르지.”
“그, 그럼 나는!”
“이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아까부터 계속 나리께 불경한 태도냐!”
“으악!”
기어이 발로 걷어차인 천덕이 거의 다 죽어 가듯 우는 소리를 냈다.
“그, 그럼 소인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요?”
겨우 사흘 만에 우위를 점한 도겸은 조금 싱거울 지경이었다.
“글쎄, 죽어 버린다면 그저 산에 가져다 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싶은데.”
그의 가벼운 대꾸에 천덕은 세상이 무너진 듯 기겁하며 극도로 긴장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뭐든지 소상히 털어놓겠습니다. 뭐든지요!”
“겨우 며칠 굶고 입이 터지기라도 한 것인가? 그리 괴롭더냐?”
“응하지 않으면 소인과 동지들은 전부 죽을 목숨이었습니다요!”
“기가 차는구나. 그런 놈이 감히 대낮에 저자에서 여인을 유인하여 산으로 데리고 가 겁탈하려 하였느냐?”
“그…!”
“닥쳐라! 너는 앞으로 내 모든 것을 걸고 하루하루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해 줄 터이니 그리 알아두어라.”
그리고 딱 그만큼 더 화가 났다. 겨우 이런 자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많던가. 울분이 차올랐지만 도겸은 꾹 참아 누르며 광을 나섰다.
“삼득아.”
“예, 나리.”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며 돌보아다오. 한양으로 가 적당한 때에 연통을 하면 그때 데려오고.”
“예. 맡겨만 주십시오.”
믿음직하게 답하는 삼득에게 도겸은 넌지시 따로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끔 놈의 입을 자유로이 해 줄 때에 확실한 배후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게. 그리고 바로 내게 서찰로 알려 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일세.”
“알겠습니다.”
“부탁하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도겸은 청이 기다리고 있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머리도 맑았다. 기분까지 상쾌한지라 과장을 조금 더 하면 몸이 조금 떠오를 것도 같았다.
“청아. 어디 있느냐?”
동선마다 걸음 수를 전부 외워둔 탓에 여각 안을 돌아다니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볼 수 없어 청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필 수가 없으니 아무리 몸 상태가 좋은들 금세 약간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냥 청이 보고 싶었다.
“궁금하구나. 오늘은 무슨 색 댕기를 내렸을지.”
물이나 다름없다는 여인에게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발걸음에도 소리 한 점 없다. 그저 체온이 깜짝 놀랄 만큼 낮고, 목소리가 고아하며 생김새가 한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신비로운 이였다.
그 냉혹한 아름다움을 미처 두 눈에 흠씬 담아두지 못한 게 내도록 아쉬웠다. 열망이 타오를수록 어쩐지 보이지 않는 눈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읏…!”
무심코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지만 환상통인가 싶을 만큼 금세 사라졌다. 혼자 있어도 아파한 게 무안할 정도였다.
“푸른색이야.”
“…무어?”
불티처럼 반짝하고 사라진 통증이 꿈만 같아 우두커니 서 있던 차, 어디선가 청이 불쑥 나타나 답했다.
“푸른 댕기라고.”
이전 같았다면 무안한 나머지 고개도 들지 못했겠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런 장점도 있었다. 도겸은 뻔뻔하게 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