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리보다 내쉬는 숨이 더 많았다. 도겸은 청이 처음 보는 얼굴로 눈을 느릿하게 뜨고 감으며 차가운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손바닥에 닿은 도겸의 뺨 역시 뜨거웠다.
“내 물음엔 왜 도통 답을 해 주지 않는 것이냐, 응?”
초점 없는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열기를 좋아하지 않는 청은 무심코 손을 빼내려다 말고 도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신물을 준 무녀에게 다시 갔었어. 확인하고 싶어서.”
고요히 눈을 뜨는 도겸이 부쩍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정말 신물이 용의 심장이 맞는지.”
“그랬더니?”
“거기까진 모른대. 근데 맞는 것 같아. 느낌이 그래.”
“…그렇구나.”
어쩐지 도겸이 힘을 주어 청을 조금씩 당기는 듯했다. 그리고 청은 무심히 이끌렸다. 도겸이 저를 해할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는지라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도겸은 툭 치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처럼 가물가물한 눈을 하고 있었다. 청은 도겸과 빈 술병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겨우 저거 마시고 취한 걸까. 청은 피로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유난히 빨리 취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빨리 돌아가고 싶겠구나.”
청이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를 도겸은 아까부터 침울한 낯으로 중얼댔다. 늘 깔끔하게 말하던 것과 달리 말투는 어물어물 흐릿해진 채였다.
“나야 뭐….”
“아니. 오늘은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매정한 말을 듣고 싶지 않구나.”
“…뭐?”
눈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겠지만 비단 도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청도 마찬가지였다. 눈빛을 통해서도 저를 향해 적의를 띠는지 호의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처음 적의로 가득 차 있던 도겸의 눈이 점차 호의로 바뀌어 온 것을 아는 청으로서는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눈빛이었는데.
“근데 너 말이야.”
“말하지 말래도.”
말하지 말라는 건 부정적이고 밀어내는 의사 표현인 것 같은데, 어쩐지 도겸은 청을 더욱 당겨 갈 뿐이었다.
“싫어. 말할 거야. 너 왜 이렇게 갑자기 부정한 기운이 많아진 거야?”
도겸의 바람을 무시하고 제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던 차, 도겸이 청을 홱 끌어당겨 작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게서는 은은한 난향과 독한 술 냄새가 한꺼번에 풍겼다. 잔잔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대범하게도 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에게는 도통 숨길 수가 없구나.”
그러곤 또 한숨처럼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천덕이 그놈을 죽일 뻔하여서 그럴 것이다.”
“죽일 뻔했다고?”
“내도록 도륙을 내주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그나마 본래 도겸의 정신에 깊게 뿌리 내린 복수심보다는 얕은 수준인지라, 청은 즉각 해소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함께 다닐 제 기분이 불쾌해질 테니 말이다.
“왜, 네가 아끼는 인간들을 죽인 녀석이라서?”
“아니, 너를 다치게 한 놈이라서.”
도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전신이 뜨거운지라 청은 남산댁이나 순이가 불을 때던 아궁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던져 버릴까 고민하다 조금 참아 주기로 했다. 아마 너무 뜨거워서 자연스레 찬 것을 찾는 모양이니 말이다.
“처음과 달리 내가 효용 가치가 크게 느껴지긴 했나 봐?”
“…….”
번쩍 눈을 뜬 도겸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 효용 가치라는 것이 왜….”
청의 손을 제 가슴팍에 갖다 댄 그가 서글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자꾸만 머리가 아니라 여기서 우러나오는지 모르겠구나.”
청은 술을 가져와야 한다는 욕구도 잊고 도겸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게 됐다. 어쩐지 느릿느릿한 그는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꺼내 놓고 있었다.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들이 다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길 바라면….”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을 내리깔자 그 아래로 야트막한 그늘이 졌다. 가만 보니 도겸의 얼굴은 제가 살던 곳으로 가도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을 만큼 섬세한 생김새였다.
“그것도 과연 효용 가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잠시 도겸도 제가 아끼는 것들을 모아 둔 물 아래에 가져다 두고 싶다고 생각하던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혹시.”
인간의 복잡한 소원, 어쩌면 지금 도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게 진짜 소원일지도 몰랐으니까.
“그게 소원이야? 내가 돌아가지 않길 바라는 거.”
“……!”
그 물음에 도겸이 헛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라는 게 왠지 긍정적인 반응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 있지. 이 땅엔 나 같은 존재가 없으니 평생 나를 곁에 두고 유용하게 써먹고 싶을 수 있잖아. 조익환이 이무기를 이용하듯.”
“어찌 그런…!”
도겸이 기함하며 펄쩍 뛰었지만 청은 그게 아니고서야 납득할 길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달아오르는 게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나도 돌아갈 때 네가 말한 것처럼 여기서 기념품 삼아 갖고 가고 싶은 것들이 꽤 되니까.”
청은 도겸이 그렇다 답해도 괜찮았다. 아무리 용의 생이 유한하다 한들 설마하니 인간보다 짧겠는가. 오히려 청에겐 단순하게 느껴졌다. 죽을 때까지 곁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차라리 너끈히 해줄 용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소원, 더 복잡해지지 않게 지켜. 인간들은 변덕이 죽 끓듯이 하잖아?”
“…….”
촛불에 일렁이는 도겸의 눈빛이 꼭 불꽃 같았다. 왜 불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깊은 복수심과 부정으로 얼룩진 상태로도 늘 정답을 찾았던 것도 그 자체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게 아니야….”
도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청은 취한 사람이 자제력을 잃고 진심을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야? 그러면 그 소원이 바뀌기 전에 내가 죽으라는 건가?”
“아니 된다!”
눈을 부릅뜬 도겸이 버럭 소리치며 청을 끌어안았다. 용을 이길 만큼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약하다 치부했던 인간이 이 정도로 강할 수도 있구나, 새로 깨달을 정도였다.
“아직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성급하게 굴어선 안 돼.”
“말 그대로 죽으라는 뜻일 수도 있잖아.”
“아니면, 그게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럼 뭐… 죽는 거겠지.”
단순히 잡스러운 반지 따위가 아닌 신물 그 자체라면, 적어도 저보다 강한 존재의 힘이기에 승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의연해진 청이 몸에서 힘을 빼고 물러나려는데 도겸이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그리고 청은 도겸이 반대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래. 얼마 남지도 않은 간택에 들어가기 전에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아니, 그래서가 아니다!”
몇 번이고 청에게 막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도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너를… 잃고 싶지가 않아. 다치는 걸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단 말이다.”
청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치는 거야 그냥 물에 들어가면 낫는 건데 왜?”
“그래도 싫다!”
평소엔 이런저런 근거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조리 있게 말하던 사람이 술에 취하자 막무가내가 됐다. 청은 별수 없이 도겸을 뒤로 밀어 눕혔다.
무력하게 넘어가는가 싶던 남자가 불시에 청을 끌어당겼다. 그의 행동엔 늘 악의가 없기에 무방비하게 붙잡혀 널찍한 품으로 쏟아지듯 안기고 말았다.
“…강한 자들의 맹점이란, 여전히 한결같구나.”
언젠가 했던 말과 함께 도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청이 가슴팍을 짚으며 일어났다.
“너도 한결같이 까부는 것 같은데.”
“어찌하여 나를 밀어내지 않느냐?”
“너는 무해하니까.”
“하….”
긴 한숨을 내쉰 도겸이 손등으로 이마를 가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나를 밀어내겠느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이유를 좀… 만들면 아니 되겠느냐?”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겸이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나의 소원이 계속 변하여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게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어쩌면 죽는 문제보다 더 큰 건 인간의 마음을 잡는 게 아닐까. 여전히 인간의 복잡한 것들을 포용하지 못한 청에게서도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에 인간들이란….”
“너에게 이 땅에서의 시간이 짧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 했었지만 이젠 너무 길어지고 있지 않느냐.”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원을 기다리기보단 이해할 필요가 있어 청은 가만 귀를 기울였다.
“이젠 너무 괴로운 시간이 되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
“…….”
“아무래도 너에게 청이란 이름을 붙여 준 탓이겠지. 그게 시작이었을 터.”
잠긴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너는 이곳에서 살 존재가 아닌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 말을 끝으로 도겸은 잠에 빠져들었다.
멀뚱히 남은 청은 도겸이 남긴 암호 같은 말들을 이해하려 애썼다.
“…넌 여전히 모자란 인간이구나.”
정말 괴로웠다면 신물이고 뭐고 깊은 물을 찾아 숨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방져.”
감히 용을 이해하려 하다니. 혀를 차면서도 청은 품속에서 신물을 꺼내 쥐었다. 그러곤 빈 술병에 정기를 불어넣은 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냥 물을 끌어오는 데 비하면 힘이 두 배로 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눈을 잃은 이후 도겸은 알게 모르게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이 상태가 지속되거나 악화된다면 부정한 기운에 더 쉽게 노출되고 망가져 버릴 것이다.
“이미 술에 취해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걸 보면 말 다한 것 같지만….”
병 하나를 다 채운 뒤 청은 도겸을 불렀다.
“최도겸.”
눈이 보이지 않는 도겸이 어떻게 하면 잠에서 깨어나 이걸 마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청은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