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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3)화 (108/197)

도겸은 아주 음산한 목소리로 천덕을 벼랑 끝까지 천천히 밀어 보냈다.

“아마도 저승에 가면 당연히 허투루 들이쉰 숨 하나하나 전부 죗값을 치르겠지만….”

솔직히는 몇 마디 말로 겁박을 할 게 아니라 당장 고문을 하여 진실 하나하나, 낱알까지 모조리 털어놓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기껏 진실을 끄집어낸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얻어 낸 진술이 아닌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자칫 고문에 의해 억지로 쥐어짜 낸 흔적이 남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수가 있다. 애석하게도 그 점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지라 도겸은 더 몰아칠 수가 없었다.

잊어선 안 됐다. 여기서 도겸의 역할은 천덕의 주둥이를 흐물흐물하게 풀어놓는 동시에 목숨을 부지한 채로 추국장의 형틀에 앉혀 놓는 것임을.

“행여 조금이라도 미리 죗값을 치르고 싶다면 마음에 없는 소리나 할 게 아니라 머리통에 든 것을 좀 꺼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에도 뭔가를 털어놓으라 종용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잠시 틈을 두어도 천덕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도겸은 기어이 강수를 두어야만 했다.

“흠… 삼득아, 저놈은 당분간 입에 재갈을 물려 두어라.”

기다렸다는 듯이 문가에서 기다리던 삼득이 공손히 대꾸했다.

“예, 나리.”

“재, 재갈을 물면 말을 하지 못하는데 양반 나리 괜찮으시겠나!”

그제야 천덕이 다급히 소리쳤다. 청에게 호되게 당했으면서도 어찌나 목청이 큰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바라던 바였다. 도겸은 아닌 척 되물었다.

“마냥 죽이라고만 하기에 전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 그야…!”

“나는 급할 게 없다. 너도 갑자기 잡혀 와 정신이 없을 터, 충분히 생각할 겨를은 주어야 인지상정 아니겠느냐?”

“…….”

“무어… 네 목숨이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도겸은 재차 삼득을 불러 지시했다.

“이리 꽁꽁 묶어 두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놈에게 밥을 줄 필요도 없겠구나. 그저 하루 두 번쯤 재갈에 물이나 적셔 주어라. 그것만으로도 이놈이 숨을 붙이는 데 차고 넘칠 테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어서 나만 죽는 줄 아나! 우리 다 죽어! 다 죽는다고!”

힘센 사내들이 들이닥쳐 재갈을 물리려 하자 천덕이 고성을 내질러 댔다. 허름한 광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정말 제대로 된 놈을 잡아 온 모양이군.”

천덕을 뒤로한 도겸은 그제야 지팡이를 제대로 활용하며 문턱을 짚어 바깥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틈으로 입이 틀어막힌 채 내지르는 천덕의 먹먹한 비명이 새었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뒤를 따라 나온 삼득이 조심스레 물었다. 차분히 걸어 나가던 도겸이 멈춰 섰다.

“아예 진을 빼놓으려는 것이다.”

“진이야 지금도 충분히 빠진 것 같은데….”

“섣불리 입을 열게 하여서는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며 거래를 하려 들 테니까. 아마 사소한 것부터 원할 테니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져 비위를 맞춰 주게 될 터이고, 종국엔 주객이 전도되지 않겠느냐?”

아무리 겁을 주어도 아마 천덕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도겸이 결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아마 한동안 버티려 들 게 뻔했다.

결국 진실을 향한 공방은 인내심 싸움이고 주도권 싸움인 것이다.

“…아,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만.”

이해는 했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는다는 투로 삼득이 덧붙였다.

“아씨만 앞에 앉아 계신다면 아마 저놈은 줄줄 입을 열 터인데요.”

삼득의 반박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도겸은 가차 없이 잘라냈다.

“반대로 청이 없으면 입을 열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지.”

도겸은 자신의 방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확실히 진을 빼놓아야 어떤 상황에서든 입을 열 것이다. 자포자기한 상태라면 때에 따라 감히 잔머리를 굴리려 하지 않을 테니까.”

하루 만에 일을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기대했건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한마디로, 거의 혼이 쏙 빠지도록 괴롭히실 거란 말씀이시군요.”

“뭐, 심정 같아선 그것만으론 한참 부족하지만 말일세.”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목숨만 간신히 붙여 놓은 채로 가하고 싶은 고문만 수백, 수천 가지였다. 지나치게 가혹하여 금지된 형벌이나 고문 방법들을 정리한 서적까지도 도겸은 읽은 적이 있었으니까.

“소인이 정말 가끔 하는 생각입니다만.”

가만 도겸의 말을 수긍하던 삼득이 퍽 조심스러운 말투로 고르고 고른 말들을 입 밖에 내었다.

“제가 나리의 사람이라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는 말입니다.”

심란한 와중에 삼득이 덕분에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도겸은 방으로 향하다 말고 삼득에게 물었다.

“근데 혹, 청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나?”

“글쎄요? 아씨는 식사도 하지 않으시는 터라 아까 나리와 함께 들어오신 이후로 보질 못했습니다.”

바닷가에서 신물이 용의 심장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 뒤였다. 어쩐지 말이 없어진 청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문에 도겸도 더 심기가 불편해진 뒤였다. 괜한 말을 꺼내어 청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만 추가되었으니 말이다.

“…그래. 또 내가 필요해지면 나타날 테지.”

“그럼 들어가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수고했네.”

삼득에게 수고했노라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문득 솟구친 우울감이 도겸으로 하여금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했다.

“아, 삼득이 아직 거기 있나?”

“예?”

급하게 뛰어오는 삼득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어 필요하신 것입니까?”

심경만 따지면 한 걸음을 내딛기가 바쁘게 도로 한 걸음을 물려야만 하는 답보 상태나 다름없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우니 도겸은 다신 입에 대지 않기로 한 것이 간절해졌다.

“그… 내 방으로 술 한 병만 가져다주겠나?”

“예? 아… 예. 금방 주안상 차려 올리겠습니다.”

“부탁하네.”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긴 하루의 끝, 밤마저 길 것만 같았다.

***

제법 긴 하루였다. 여각의 지붕에 드러누운 청은 비가 갠 밤하늘을 한참 멍하니 올려다보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여기 있으면.”

청은 하늘을 가리듯 손바닥을 쫙 펼쳐 들었다.

“늙는 건가.”

생각보다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놀라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지금껏 모든 것이 멈춰 버린 세계에서 살아왔다 생각하니 조금 부질없게 느껴졌을 뿐이다. 어차피 죽음이야 이 세계에 온 직후로 계속 생각해 오던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 생각에 늙어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영생의 능력이라 여겼건만 그저 세계적 특성이었다니. 무력감이 들긴 했지만 청은 마냥 매몰되지 않았다. 무감하고 무던한 성정이 금세 털고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그리 오래지 않아 주어진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도 있게 됐다.

“그럼….”

예를 들자면 여기서 갖고 싶어진 인간들을 제 세상으로 데려가면 함께 영생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나았다. 청은 제가 제법 우울해하고 있었음을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쩐지 물에 들어가서 자고 싶더라니.

잠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청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젓갈이 되는 건 싫은데.”

차라리 물만 싹 걷어다 새로운 바다를 만들고 싶었다. 그만큼 힘을 쓸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계곡이라도 찾아볼까….”

모순적이게도 바다를 두고 산을 찾아 일어나던 청은 별안간 풍겨오는 반가운 냄새에 그냥 지붕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곤 하나둘 불이 꺼지는 차창들을 사뿐사뿐 지나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최도겸이 그럴 리가 없는데.”

별채 가까이로 가서는 기척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창가로 다가섰다. 그러곤 벌컥 열었다.

그곳엔 막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도겸이 있었다. 멈칫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이 스스로 창을 열지는 못할 터인데.”

“…….”

청이 술잔을 노려보는 동안 창 쪽으로 약간 몸을 튼 도겸이 더 나직이 물어왔다.

“…청이냐?”

답하지 않아도 확신했는지 그가 반색하며 몸을 약간 일으키려던 차, 먼저 방 안으로 뛰어든 청이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너 왜 이걸 혼자 먹어?”

“네가 말도 없이 사라진 탓이 아니겠느냐.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것이냐?”

빼앗기는 게 싫었던 걸까. 도겸이 손을 뻗기에 청은 슬쩍 피하며 술을 날름 마셨다.

눈이 번뜩 뜨였다. 다 같은 쌀을 쓰는 것 같은데 어떻게 다른 맛이 나오는 걸까. 신기하기만 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갈 때 꼭 술을 잘 빚는 인간 한 명은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청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술병을 흔들어 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혼자 다 마신 건가 싶어 눈을 부라리며 도겸을 노려보는데, 어쩐지 작은 주안상 위가 투명한 액체로 흥건했다. 반은 흘리고 반은 겨우 마신 듯했다.

“이럴 거면 그냥 병을 들고 마시든가.”

“어찌 그리 체통에 맞지 않는 짓을….”

“근데 내 건 어디 있어?”

“…….”

대답을 듣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냄새를 쫓아가 찾아서 가져오면 그만이었으니까. 왜 물에 들어갈 생각만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쩐지 저를 향해 뻗은 손을 맥없이 떨군 도겸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앉아서 자는 거야?”

그러기엔 심장 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표정은 더없이 우울해 보였다. 그리고 도겸이 왠지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져 또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전보다 살이 내린 얼굴은 다소 따끈따끈했다.

“너…!”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덥석 그 손목을 붙잡혔다. 본디 체온이 낮은 청이 느끼기엔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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