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2)화 (107/197)

“누가 누굴 걱정해?”

“걱정한다고 하여 약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고, 약하다 하여 걱정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됐어. 듣기 싫어.”

수천 년을 강자로 살아왔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두 눈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도겸은 부쩍 청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비도 내릴 수 있게 되었구나.”

안전한 곳까지 물러난 도겸이 그 자리에 털썩 내려앉았다.

“둘로 쪼개졌어도 신물은 신물이라 도움이 돼.”

청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는 것을 보니 곁에 앉은 모양이었다.

“그치만 그냥 반지에 힘을 좀 덜 빼앗기게 된 것뿐이야. 게다가 여기가 물가라 가능했던 거지 한양에서도 될지는 알 수 없고, 또 빗물에 정기를 담는 것도 어렵고….”

“빗물에 정기를 담다니?”

“말 그대로 근방의 물을 끌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내 힘을 담는 거지. 그럼 부정을 씻어 내기도 좋고 내 물을 마시는 생물들은 더 튼튼해지기도 하고….”

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도겸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묘한 기시감을 느낀 탓이었다.

“한데 청아.”

“왜?”

“그 신물 말이다.”

“신물이 왜?”

“네 힘과 제법 유사하지 않느냐?”

“…….”

“근방의 물이 마르지 않게 하며 정기를 돋우어 주니 말이다. 깨지지 않았다면 어떤 힘을 더 발휘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청은 가만 말이 없었다. 이미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며 국무에게서 순순히 넘겨받은 신물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내 집의 물이 오랜 가뭄에 마르지 않았던 것도, 물맛이 좋았던 것도 어머니의 유품인 줄만 알았던 그 신물 덕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너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럼 이 신물은.”

또 한 차례 거친 바람이 지나갔다. 갓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도겸이 다급히 한 손으로 붙들 즈음에도 청은 흔들림이 없었다. 바람 소리에 잘 들리지 않아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단순히 힘을 불어넣은 물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용의 심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신물이 어떤 경위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만 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감히 인간이 거기까지 상세히 알고 있는 것도 말이 되지는 않았다.

“그것까진 내가 알지 못하지만… 네가 가진 본연의 힘과 유사한 것을 보면 그냥 그런 듯하여 말이지.”

신물에 대해 아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던 도겸이 청에게 물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너는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무기도 단박에 알아보았듯이.”

“글쎄. 용의 심장이 된 여의주는 깨트려 보기만 했지 꺼내본 적은 없어서 잘 몰라.”

“…….”

“근데 네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아서 조금 혼란스러워.”

청이 혼란스럽다니, 도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무기의 여의주는 스스로 정기를 만들어낼 수 없거든. 그나마 가망이 있는 건 이게 용의 심장이라는 건데, 용의 심장은 힘이 응축된 결정체야. 한 번 깨지면 힘이 흩어져서 폭발해 버리고. 이렇게 형태를 유지하면서 돌처럼 남는 경우는 본 적이….”

설명을 이어 나가던 청이 말끝을 흐렸다. 파도 소리에 묻힌 것인가. 도겸은 청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본 적이?”

“없어. 없을 수밖에 없어. 심장이 터지지 않는 한 용은 영생을 살고, 당연히 늙어 죽는 일도 없으니까.”

영생이라. 도겸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다. 눈앞의 망망대해보다 막연해서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당연했다.

“…그래. 그랬겠구나.”

그리고 딱 그만큼이, 저와 청 사이에 놓인 거리였다. 청을 만난 덕에 아까까지만 해도 들끓던 분노가 수그러지는 것까진 좋았으나 이번엔 마음 한편이 욱신대기 시작했다. 이건 당장 해결할 방법조차 없기에 문제가 아주 컸다.

아무래도 청의 말대로 연모는 병이 아닐까. 도겸은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상대가 사람이 아닌 용이지 않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이니 더 깊어져 버리기 전에 서둘러 다스려야 함이 옳았다.

옳은데, 마음이란 늘 생각대로 따라 주는 법이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천불이 나던 마음을 다스리니 이번엔 또 다른 색으로 타올랐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

심란한 마음에 짭조름한 숨을 양잿물 들이켜듯 깊게 마시는데 청이 뜬금없이 다른 이야길 꺼냈다. 삿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뜨끔한 나머지 도겸은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음? 뭐? 무, 무어라 했느냐?”

“지붕 위에서 뭐 했냐며. 이 땅은 매일, 시시때때로 하늘이 다른 빛을 띠잖아. 그래서 종종 올려다봤는데 여기선 또 처음 보는 색이었어. 한양은 이때쯤의 하늘이 불꽃색이라 별로였는데 여긴 꼭 하늘에 홍매화가 잔뜩 핀 것 같은 색이거든.”

“아… 벌써 해질녘이 다 된 모양이구나.”

누가 말해 주지 않으면 쉽사리 시각을 알지 못하는지라 도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미묘하게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무력감이 도겸을 좀먹을 즈음, 청이 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사는 땅의 하늘색이 변하지 않았던 이유.”

“…네가 사는 곳은 하늘의 색이 늘 같단 말이냐?”

“응. 그래서 하늘의 색을 정하는 건 왕의 특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왜 그게 가능했는지 알 것 같아.”

아까부터 대화의 맥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도겸은 청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차분히 기다렸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가 흘러가 버리든 그의 눈앞은 암전되어 있으니 조급할 것도 없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려 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시간의 경과를 알아차리지 못해 우울해하고 있었으면서 어찌 이리 사람이 엽전 뒤집듯 바뀔 수가 있을까.

“하늘의 색이 변한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거잖아.”

“그렇지. 한데 신물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하늘로 가 버린 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던 도겸이 멈칫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사이에 청이 드디어 본래의 궤도로 돌아와 설명했다.

“이게 정말 용의 심장이라면 터지지 않을 수 있던 게 어쩌면….”

청의 목소리가 말을 이어갈수록 점차 작아졌다. 저 자신도 확신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신물을 남긴 용이 여기서 나이 들어 죽어서였기 때문은 아닐까.”

“나이가 들다니. 용은 영생을 누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맞아. 그래서 난 지금까지 살면서 나이 들어 죽은 용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

또 한 번 깊은 괴리감을 느끼던 차였다. 청이 용과 시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구심을 던졌다.

“근데 그게 용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라 내가 살던 땅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면?”

“네가 살던 땅?”

“응. 내가 살던 땅은 일부러 정기를 불어넣지 않는 한 작은 싹 하나도 자라나지 않는 곳이야. 그런데 이 땅의 것들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자라고, 꽃을 피워. 정기가 없는 곳에서도 뭐든 그럭저럭 잘 자라는 게 신기했는데… 이제 이해가 돼.”

도겸은 비로소 왜 청이 머뭇거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어머니가 내게 약한 것들을 돌보는 왕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거였어.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말을 하던 순간, 청의 목소리는 답지 않게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내 땅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이라 정기가 없이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고, 실은 용의 수명도 유한하다는 걸.”

그리고 또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

낮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지만, 밤이 되면 역으로 뭍에서 바람이 불어 나간다.

여각의 한구석, 오래 쓰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광에 들어선 도겸도 낮의 온화한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횃불이 어스름히 비친 그의 야윈 얼굴은 갓의 그늘까지 겹쳐 까만 음영이 유난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냥 죽여, 어? 죽이라고!”

그리고 저녁 무렵에서야 일어난 천덕은 전신이 꽁꽁 묶인 채로 버럭버럭 소리만 질러 댔다.

“죽여! 어차피 난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이니까!”

“그런 꼴이 되어서조차 건방지게 목소리가 크구나.”

도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천덕만 더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래! 난 무서울 게 없… 크헉!”

기어이 천덕은 도겸으로 하여금 직접 몸을 쓰게 만들었다. 가슴팍에 대고 뾰족한 지팡이 끝으로 찌르듯 누르자 천덕이 절로 괴로워 버둥댔다.

“죽고자 한다면 재갈을 물려 놓지 않았을 때 진즉 혀라도 깨물지 그랬느냐. 게다가 청이에게 볼썽사납게 잡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는 산을 넘으려 하고 있지 않았나?”

“아, 아, 아파, 아파! 뚜, 뚜, 뚫리겠다고!”

천덕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도겸은 찍어 누르는 힘만 더 가할 뿐이었다.

“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일 만큼 내 귀한 시간이 넉넉하진 않은데 말이다.”

물론, 철저히 감에 의지하고 있는지라 어딜 찍어 누르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한데 아직도, 감히 네 목숨이 네 것인 줄 알고 그리 목청을 키우느냐?”

“끄흑…!”

“아프냐? 겨우 이걸로?”

“끄… 아악!”

분명 이런 용도로 쓰라고 세자가 친히 하사한 건 아닐 터였다. 그러나 도겸은 어쩐지 바닥을 짚기보단 무기로 더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참으로 불경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죽인 부녀자들의 수가 몇인지는 아느냐? 네가 청이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불에 태워 죽여도 시원찮건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도겸이 지팡이를 떼어 냈다. 대신 가볍게 후려쳐 천덕을 쓰러트렸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이미 죽은 이들의 원이 다 풀어지지 않을 터이니 살려 두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되도록 숨을 아껴 쉬는 게 좋을 것이다. 죄질만 따지고 보면 당연히 그 누구보다 일찍 죽었어야 할 놈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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