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린 아이가 당분간 먹고 살 돈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액수는 묻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소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얼굴엔 낭패감과 당혹감이 그득했다.
“저런 왈패들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하였느냐? 놈들은 너에게 전달한 얼마 안 되는 돈마저도 도로 빼앗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잘 숨겼다 한들 네 동생이 찾을 것을 당연히 예상하였을 텐데 그걸 가만 두었겠느냔 말이지.”
도겸은 늘 아이들이라면 끔찍이 여겼다. 심지어 아까 전 바닷가에서만 해도 아이들을 구해 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의 그는 확연히 달랐다. 아까와 비교할 것도 없이 평소의 온화한 면모라곤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매섭기만 했으니 말이다. 말투도, 어조도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해지려던 차, 여전히 무표정한 도겸이 소녀를 몰아세웠다.
“어쭙잖게 위선 떨 생각은 말거라. 어차피 넌 결코 동생을 생각한 적이 없는, 아주 이기적인 누이니까.”
“아닙니다! 석이가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어찌…!”
“그저 왈패들이 접근해 왔을 때 죽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못 이긴 척 따른 게 아니었더냐?”
도겸은 소녀가 부정하든 말든 제 할 말을 막힘없이 쏟아 내었다.
“누이가 바다에 몸을 내던지며 벌어다 준 몸값을 받을 동생의 심정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테니까. 평생을 저 때문에 누이가 죽었다 자책하며 살게 됐을 동생의 심경 따윈!”
“…….”
“그러고도 동생을 생각했다 말할 수가 있느냐? 아니, 너는 겨우 너의 죄책감을 털어 내고자 동생에게 그 죄를 고스란히 떠넘기며 지옥으로 도망치려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시답잖은 핑계는 댈 생각 말거라. 적어도 목이 터져라 누이를 구해 달라 소리치던 동생의 목소리를 단 한 번이라도 새겨들었다면 말이다!”
손찌검 한 번 당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부서지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얼마 못 가 기어이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무너져 내렸다.
“자백했다간 저만… 저만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순간 멈칫한 도겸이 소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살인에 공조한 공범이 있다는 뜻이냐?”
“동무들이 죽습니다. 함께 생각시 시절을 보낸 동무들까지…!”
“잠깐, 생각시라니.”
뜻밖의 단어를 놓치지 않고 짚어 낸 도겸이 다시 물었다.
“너는… 궁녀였던 것이냐?”
생각시가 뭔지 모르는 청이 갸웃거리는 틈에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인 소녀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 실은 세자빈이신 유빈 마마를 모시던 지밀나인이었습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전까지 단단히 화가 나 있던 도겸의 표정이 변했다.
그것은 청이 인간의 얼굴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기라도 했는지 지팡이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은 그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섰다.
“그… 그럼 네가 죽였다는 사람도 설마.”
눈을 질끈 감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 내는 소녀가 다시금 긍정하며 답했다.
“예. 유빈 마마께서는 자결하신 게 아닙니다.”
“…하.”
비가 멈출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도겸이 기어이 탄식했고, 소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생각시라는 말은 몰라도 세자빈은 아는지라 청도 곧 어렵지 않게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어둑한 밤, 조족등이 비추는 길 위를 흘러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춰 서서 괴로워하던 언이 떠올랐다.
이제는 모든 게 밝혀진다면 겉으로만 웃는 그 세자도 가만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갈 수 있겠다. 청이 그리 생각하는 동안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흐느끼는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빗줄기가 내리지 않고 있다면 마치 시간이 멎은 듯 그대로 고여 침울하기만 했을 광경이었다.
***
신물을 찾고자 시작된 동해 여행은 뜻밖의 일을 만나 시간이 더 소요되는 중이었다.
삼득이 무사들로 하여금 잡아 오게 한 왈패들과 고을의 어부들은 전부 소녀가 스스로 어부들을 위해 죽겠노라 몸을 판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정신없는 체포 과정에서 입을 모았을 리는 없기에 도겸은 모두의 진술을 토대로 소녀, 아니 광연이 실토한 이야기들이 진실이라 판단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도겸의 명령에 따라 뒤탈을 남기지 않고 광연의 자매문기를 사들인 화월이 조심스레 물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저물어 가는 창밖을 향해 선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기 어린 시원한 바람에도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폐부에 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일단은 아이들을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게 좋겠구나.”
마음 같아선 당장 광연을 한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칫 섣불리 움직였다가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알 수가 없었다.
광연을 증인으로 세우는 데 달린 목숨이 한둘이 아닌 문제가 가장 컸다. 당장 광연과 석의 안전부터 시작해서 아직 궐에 남아 있다는 광연의 동무들까지.
도겸은 사건의 관계인이랍시고 신변을 확보해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어 나갔던 일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능한 한 모든 위험 요소들을 제거해 둔 뒤에 한양으로 불러도 늦지 않았다.
“마냥 깊은 곳에 숨겨 둘 필요는 없다. 그저 적당히 허드렛일을 주며 여각 안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다오. 너무 싸고돌았다가 자칫 뭔가 있으리란 소문만 퍼질지 모르니.”
소문은 발이 없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하여도 언제 어떻게 와전되어 한양까지 가 닿을지 몰랐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겸이 덧붙여 당부했다.
“다만 광연이 다시 자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저 아이는 훙서하신 세자빈 마마께서 돌아가신 경위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아주 중요한 증인이니 말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광연을 증인으로 세우기 이전에 확인하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광연이 실제로 궐에서 일하던 궁녀였는지 기록을 확인하는 것부터 어린 궁녀를 살인에 가담하게 한 자를 사로잡는 것까지.
“그리고 천덕이 그놈은 깨어나더라도 그냥 광에 가둬 두어라. 그 인간은 대접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고 철저히 감시하여야 한다.”
“예, 나리.”
세자빈 사건을 해결할 길이 보이니 분명 좋은 일이건만, 어쩐지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아마도 어린아이들까지 가담시킨 악랄한 자에 대한 분노이리라. 도겸이 곁에 둔 지팡이를 찾아 돌아섰다.
“청이는 어디에 있느냐?”
“…글쎄요.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전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알아서 쉬겠다 하시긴 했습니다.”
청이라면 제가 어디에 있든 찾겠지만 도겸으로서는 청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면 도통 찾기가 어려웠다.
“그럼 혹 그 아이가 나를 찾거든 바닷가에 있겠노라 전해주겠느냐?”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청이 저를 찾게 만들면 그만. 도겸이 느릿하게 문 쪽으로 향하자 화월이 당장 따라나서려 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괜찮다.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 너는 그만 할 일을 하여라.”
“하지만….”
“나를 그리 무능한 이로 만들지 말아다오.”
도겸은 화월을 두고 홀로 여각을 나서서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답답한 속이 탁 트일 만큼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다. 여각을 나서서 포구가 아닌 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머릿속에 들어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
발밑이 푹푹 꺼지는 모래 해변으로 나갈 즈음 도겸은 더 이상 지팡이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막연히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걸었다.
바다는 아득히 펼쳐진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이 고을에 오는 게 좋았는데 보질 못하니 퍽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잠시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모래를 밟으며 걸을 수 있으니 되었다 여기는데 누군가 강한 힘으로 팔을 붙들었다.
“죽으려고?”
청이었다. 도겸은 반색하며 돌아섰다.
“어디 있었느냐?”
“여각 지붕 위에. 네가 나더러 알아서 찾아오라며.”
“…들었구나. 너는 또 시끄러워서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것이냐?”
“왜 자꾸 너만 물어? 죽으려고 들어가던 거냐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바닷바람을 맞을 때도 도통 가라앉지 않던 심란한 마음이 청의 목소리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쩌면 필요한 건 바람이 아니라 저를 보고 있을 여인이 아니었을까.
“그럼 물러나. 흠뻑 젖은 너를 말려 주려다 네 피까지 다 말려 버리면 안 되잖아.”
“…그래.”
멀뚱히 생각하던 도겸이 멋쩍게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기껏 자결하려는 이를 구해 놓고 스스로 물에 뛰어드는 꼴이 될 뻔했다.
“어디까지 물러나야 하는 것이냐?”
“좀 더.”
“그래? 그리 깊게 들어간 것 같진 않았는데….”
의식하고 들어보니 물살이 밀려와 모래 위로 젖어 드는 소리가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도겸이 불현듯 중얼거렸다.
“어부들의 말대로 파도가 제법 높은 모양이구나. 물살이 강해 깊게 들어오는 것을 보니.”
“내가 한 거 아니야.”
“뭐?”
의심 한 자락 하지 않았거늘 노파심이 들었는지 청이 득달같이 항변했다.
“파도 말이야. 내가 한 거 아니라고. 나는 아까 물기둥 몇 개 솟게 만든 거 말고는 딱히 건드린 거 없어.”
“아, 그래! 내 미처 물어볼 틈이 없었다만,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 또 코피를 쏟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냐? 물기둥에, 장대비까지 내렸으니!”
청이 무리하려 할 때마다 제 심장이 깨질 듯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도겸이 안절부절못할 때마다 청은 약한 취급을 받는 게 싫은지 대답이 늘 뾰족해졌다.
“날 뭐로 보고? 내가 무리한 게 아니라 여기 물이 많아서 수월했던 거라고. 원래는 그까짓 것, 손가락만 튕기면 그만인데.”
“그래, 그래. 그저 내가 걱정이 많은 탓이니 노여워 말거라.”
무의식적으로 눈이 보일 때처럼 이리저리 살피려는 손길을 청이 매섭게 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