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0)화 (105/197)

조심스레 마당으로 내려간 삼득이 천덕의 목에 손을 대어 맥을 짚었다.

“…사, 살아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사체가 아닐까 싶었건만 놀랍게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호들갑을 떠는 삼득에게 청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어딜 봐서 죽었다고 의심한 건데?”

“살아 있다고 보는 게 더 이상한… 크흠! 그, 일단 나리께 고하고 오겠습니다. 아씨는 목욕물을 준비하라 할까요?”

“목욕은 됐고 갈아입을 옷이나 줘. 저 녀석 때문에 부정 탔으니까.”

“예!”

삼득이 건물 뒤 안쪽으로 사라졌다. 청은 혹시 천덕이 깨어나 다시 도주를 시도할까 싶어 그 자리에서 지켜보며 그대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자신은 인간들과 달리 비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흠….”

청이 하얀 손바닥을 들어 빗물을 얼마간 모을 즈음, 빗소리를 뚫고 도겸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이윽고 어린 잎 색의 도포를 새로 걸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아, 청아!”

지팡이로 땅을 제대로 짚지도 않고 겁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그의 뒤를 화월과 삼득이 따랐다.

“어디 있느냐?”

직전까지 화월과 있던 모양이다. 청은 도겸에게 먼저 다가가 화월의 냄새가 나는지부터 확인했다.

“네 앞에.”

그러자 도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청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전에 저놈 때문에 다친 적이 있지 않느냐. 또 무슨 약에 당하기라도 할까 싶어 퍽 걱정이 되었다.”

“난 두 번은 안 당해. 그리고 이미 저 녀석은 산을 넘고 있었어. 사람들을 보냈으면 못 찾았을 거라고.”

“그래. 그렇게 따지면 잘한 일인데… 왜 이리 못마땅한지 모르겠구나. 어디 상한 곳은 없느냐?”

“옷이 상했어.”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

“누, 누이! 안 돼!”

순간 안쪽에서 어린 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거친 빗소리를 뚫을 정도로 날카롭고 크게 들리는지라 듣지 못하는 이 없이 모두가 홱 돌아볼 정도였다. 부쩍 소리에 민감해진 도겸이 먼저 나섰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까 그 아이들 같은데, 어디에 데려다 둔 것이냐?”

“그것이, 아까 포구에서 데려온 남매에게 새 옷을 주고 끼니나 챙겨 주라 하였습니다만….”

“누이, 멈춰! 멈추라고!”

“삼득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뜻으로 내지르는 비명은 아닐 것이었다. 화월이 삼득에게 소리쳤고, 삼득이 곧장 남매를 머물게 한 방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며 앞장섰다.

“누이! 안 돼… 제발!”

삼득과 화월이 먼저 향하고 도겸과 청이 뒤따른 건물은 먼 곳에서 온 객들이 숙박을 위해 묵어 가는 공간이었다. 연이어 소란이 일어나는지라 다른 방에 묵던 손님들까지 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별 일 아닙니다. 손님들께선 문을 닫고 들어가시지요.”

가는 도중에 화월이 웃으며 구경꾼들을 능숙하게 정리했다. 그사이 삼득은 일반객들이 머무는 건물을 지나 담으로 분리된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곤 마루 위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

그런데 뭔가를 보고 사색이 된 삼득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청을 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피 냄새.”

직접 보지 않아도 기실 청은 안쪽의 상황을 대충 가늠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역시나였다.

기껏 물에 뛰어들어 구해 낸 여자가 다시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제 누이 좀 살려 주세요!”

방에서 뛰어나온 아이가 삼득을 붙잡고 두 손을 싹싹 빌며 엉엉 울어 댔다. 청에게 멱살을 잡혔을 때도 되바라진 눈을 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소인은 주… 죽고 싶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난장판이 된 방 안, 소녀는 그릇을 깨트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목에 대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그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어 청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졌다.

“너.”

다소 정신이 없어 보이는 소녀에게, 청이 주저 없이 다가갔다. 아직 제대로 씻지도 않은 소녀에게서는 물비린내와 함께 청이 극도로 불쾌하게 여기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청이 대뜸 물었다.

“사람 죽인 적 있어?”

“……!”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헐떡이던 소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빨갛게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주륵 흘렀다.

“아니, 있는 거지?”

“그, 그것을 어떻게…!”

소녀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청은 눈 깜짝할 새에 방 안으로 들어가 소녀가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빼앗아 벽 쪽으로 내던졌다. 단단한 흙벽에 부딪혀 부서져야 할 사기 조각이 푹 박혀 들어갔다.

방 안의 상황 지켜보고 있던 삼득의 입이 또 한 번 쩌억 벌어졌다. 그사이 홀로 오직 들리는 것들로만 사태를 읽어 내던 도겸이 삼득에게 물었다.

“삼득아, 저 아이를 사고판 자들을 잡아 오라 한 것은 아직이냐?”

“아, 곧 올 텐데…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소년을 달래던 삼득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방 앞으로 걸어온 도겸이 벌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너는 동생을 두고 어찌 그리 무책임하게 죽으려 하는 것이냐?”

겨우 말 한마디 건 것에 소녀는 움찔 놀라며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도겸은 방에 들어오는 대신 마루에 걸터앉았다.

“동생은 누이를 따르며 지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몸값으로 받은 돈이면… 석이가 당분간은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말인즉, 스스로 자매문기(自賣文記, 조선시대 자기 자신 또는 처자를 노비로 팔기 위해서 작성하던 문서)라도 쓰고 몸을 팔았다는 것이냐?”

“자… 자진하느니 차라리 목숨값이라도 받아 챙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국법이 지엄하거늘!”

버럭 화를 낸 도겸이 벌떡 일어나며 화월에게 지시했다.

“저 아이의 자매문기는 내가 다시 살 것이다. 그러니 화월이 너는 삼득이가 저 아이를 사고판 자들을 잡아 오거든 되도록 값을 높게 쳐 주고 문기를 받아두어라. 자진한다면 석이라 하는 동생에게 모두 변제토록 할 터이니.”

“…예?”

“아… 아니 됩니다!”

구석에 박혀 있던 소녀가 두 팔과 두 다리로 벅벅 기어 나와 돌아선 도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석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벌하시려거든 소인만, 소인에게만 벌을 내려 주십시오, 나리!”

“그럼 말하여라.”

다시 돌아선 도겸은 청이 그간 보지 못한, 아주 엄하고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누굴 죽이고 그리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것인지.”

“……!”

정곡을 찌르기라도 한 것인지 싹싹 빌던 소녀가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도망치고 싶은 듯했다.

“화월아.”

도겸이 갑작스레 다시금 화월을 불렀다. 화월이 즉각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예, 나리.”

“석이라는 아이는 제대로 끼니를 챙긴 것이냐?”

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자결하려는 소녀가 밥상을 뒤집기라도 했는지 엉망이었으니까.

상황을 파악한 화월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아니요. 먹지 못했을 듯합니다.”

“그럼 데리고 가서 밥부터 먹이거라.”

“싫습니다. 누이 곁에 있을 겁니다!”

떼어 놓으려는 것을 눈치챈 소년이 누이의 팔을 붙들었지만 도겸은 냉정하게 굴었다.

“네 누이는 아느냐?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그런 것까지 전부 터놓고 이야기해도 된다면 여기 함께 있어도 좋다.”

“그, 그건…!”

당혹스러워하는 소년에게 도겸이 지팡이를 매만지며 부드럽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힘 있는 어조로 되물었다.

“왜, 장님 주제에 너를 알아보니 언짢으냐?”

“…….”

“세상에 어디 손쉽게 얻어지는 게 있을까. 지금은 잠자코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이를 두고는!”

“가거라. 적어도 나는 네 누이를 죽여서 이득을 볼 생각이 없으니 왈패들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그의 말을 듣고 대번에 낯빛을 굳힌 화월이 매정한 손길로 소년의 등을 바깥쪽으로 떠밀었다. 누이에게 표낭도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소년은 별수 없이 화월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을 뒤로한 도겸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했다.

“자, 이제 어디 한번 속 시원히 말해 보아라.”

비가 내려 공기 중에 물기가 많다 보니 소녀에게서 풍기는 부정한 냄새 외에도 온갖 냄새가 더 진하게 다가왔다. 소녀의 손과 목에 난 상처에서 나는 피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친 자극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아래를 본 청의 눈에 사시나무 떨리듯 가늘게 떨리는 소녀의 손끝이 들어왔다.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손톱이 제대로 붙어 있나 의심이 될 만큼 너덜너덜했다.

아마 도겸이 저걸 보았다면 성격상 또 마음이 약해졌을 게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는 멈추지 않고 냉혹하게 굴었다.

“그리 죄책감에 자진할 만큼 괴로웠다면 차라리 관아에 자백하고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낫지 않겠느냐?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해서라도.”

“…….”

“그렇게 하겠다면 자매문기 일은 내 선에서 전부 없던 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네 동생이 누이의 몸값으로 겨우 얼마간을 연명하지 않도록, 확실히 돌봐줄 수도 있지.”

“그… 그것은 소인이 믿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기가 차는구나. 나를 믿을 수 없다 받아치면서 저자의 왈패들은 어떻게 믿고 네 목숨값을 네 동생에게 주라 하였느냐?”

“그야 이미 받은 돈을 석이만 아는 곳에 숨겨 두었으니….”

“하면 왈패들이 이 고을의 어부들에게 너를 공양물로 알선하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아느냐?”

되바라지게 또박또박 대꾸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일 터. 게다가 한 수, 아니 두 수 앞을 내다보는 도겸을 이길 순 없었다.

한쪽 벽에 기대어 도겸을 바라보던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적어도 네게 준 금액에 세 배는 될 것이다. 아니, 열 배가 될지도 모르지.”

“그,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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