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전라도? 아니면 아주 먼 함경도로 올라가 숨는 것도 좋겠지. 급한 와중에도 머리가 굴러가긴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양에서 겪은 일이 고스란히 되풀이된다는 것을 본능이 알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리라.
어스름한 빛이 들던 백악산의 검푸른 숲속, 눈을 한 번 끔벅일 때마다 하나둘 픽픽 쓰러지던 부하들과 귓전을 때려대던 비명까지. 생각만 하는데도 다리에 꽂힌 칼날로 인해 괴로웠던 통증마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수배령이 떨어진 일 따위는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닌지라 전혀 두렵지 않았다. 천덕은 무섭도록 아름다운 그 여인을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하필 거기서 또 마주친단 말인가.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천운이지. 천운이야.”
그래. 달아날 틈이 주어진 것은 천덕으로 하여금 한 번 더 살아도 된다는 하늘의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미 홀딱 젖은 옷소매로 눈두덩을 거칠게 닦아냈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빗줄기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지라 얼마만큼 도망쳐 왔는지, 산을 넘으려면 어디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흐억, 허억….”
무작정 본능에 따라 움직이던 발길이 서서히 느려졌다. 포구에서 멀어질수록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는지라 천덕은 비로소 다시 궁리할 수 있게 되었다.
설마 당장 비가 내리는 산속까지 수색하려 할까. 산을 넘긴 해야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무리일 듯싶었다. 자칫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간 꼼짝없이 산에서 횡사하지 않겠나.
주변을 둘러보던 천덕은 그나마 길처럼 보이던 곳을 벗어나 산 중턱의 거대한 바위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다른 바위와 엇갈리며 자연스레 생긴 작은 굴은 그럭저럭 비를 피하기 적당해 보였다.
가만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산을 헤매는 동안 홀딱 젖어 으스스 한기가 올라왔다. 천덕은 주섬주섬 옷부터 벗어 물기를 짜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든든히 먹어둘 것을, 작은 후회도 지나갔다.
“아니지. 일단 목숨을 부지한 게 어디냐. 뭐든 살고 볼….”
내친김에 바지까지 벗으려던 천덕의 눈앞에 갑자기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꼈다.
꿈이라도 꾸는 것인가. 난데없이 탁해지는 시야에 놀란 천덕은 허리춤을 더듬어 늘 차고 다니는 장도를 뽑아 들었다.
“뭐, 뭐냐!”
귀신? 산신령이라도 되는 것인가? 무엇이든 그 여자보다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 할 즈음이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싶어 궁금했는데, 겨우 여기야?”
“…….”
꿈에도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천덕은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커헉!”
아니, 정말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모를 얼음 줄기가 사지를 타고 올라 꽁꽁 묶인 뒤였다. 칼을 쥔 손까지 단단하게 붙들어 버린 터라 어찌 휘두를 수도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천덕은 너무 놀란 나머지 달달 떨리는 턱으로 말도 잇지 못했다.
“이, 이, 이게….”
그리고 하얀 안개를 가르고 눈앞에 나타난 이는,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단 한 방울도 맞지 않은 보송한 모양새로 나타난 심청이었다.
“사, 살려…!”
“네 목소리 듣고 싶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여자는 천덕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곧이어 살을 에는 얼음이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 중에 가장 어이없는 게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천덕은 부릅뜬 눈으로 조금 더 관찰하고 나서야 알았다. 여자에게 쏟아지는 빗물이 즉시 수증기가 되어 흩어지고 있음을.
“꼭 남의 목숨은 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
천덕의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기묘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서운 상황이었다.
천덕은 나름대로 한양을 쥐고 흔드는 패의 두목으로 살아온 강성의 혈기왕성한 사내였다.
그런데 어쩌다 어느 산속 구석에서 자그마한 여자를 앞에 두고 눈깔이 뒤집어지며 고꾸라지게 되었을까.
“겨우 제 목숨 하나는 어찌 될까 벌벌 떨면서 오줌을 지리더라. 지금 너처럼.”
“…….”
기어이 까무룩 정신을 놓을 무렵, 청이 표정을 지우며 서늘하게 덧붙였다.
“…사실 난 진짜 죽일 거라면 그럴 틈조차 안 주는데 말이야.”
얼음에 갇힌 천덕은 마치 타들어 가는 듯한 격통 속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생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임이 분명했다.
***
여각으로 돌아와 더운 물에 목욕을 마치고 새로이 의관을 정제한 도겸은 좀처럼 빗소리가 잦아들지 않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 헌칠한 모습을 감히 욕심내듯 몰래 훔쳐보던 화월은 이내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관아에서조차 묵인한 일이라 소인이 미처 막지 못하였습니다. 고을의 처녀며 아이를 가진 부녀자들 대부분은 여각에서 일을 주며 보살피고 있었는데도 설마하니 왈패들에게서 사람을 사왔을 줄은….”
“아니다.”
보이지도 않는 창밖의 빗소리에 온 신경을 쏟는 듯하던 도겸이 가만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전하께 상소를 올리든, 직접 알현하여 고하든 하여서라도 조정에 알릴 테니 너는 더 이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만 신경 써다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마.”
“예, 나리.”
거기서 끊기는 듯하던 대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겸이 먼저 물꼬를 트며 더 이어졌다.
“그리고 아까 전엔, 내가 너무 감정이 앞선 탓에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것은 소인이 불민하여 나리께 큰 무례를 끼친 게 아닙니까. 염려치 마십시오. 소인의 탓입니다.”
“차윤아.”
“…예, 나리.”
도겸이 저리 나직한 음성으로 제 진명을 불러줄 때면 화월은 가슴이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한양으로 올라가 서촌의 안주인이 될 준비가 착실히 되어있건만.
“네가 사람을 죽인 일을 아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만, 그로 인해 너 스스로를 지키고 살린 것도 맞지 않느냐?”
“제게 벌써 여러 번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외엔 어떠한 경우라 하여도 그런 생각은 말라, 그렇게도 말하였을 테고.”
할 수만 있다면 뒤에서 끌어안고 싶었다. 그 품에 안긴다면 화월은 다음날 죽는다고 하여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이리 앓은 지도 한참인데, 도겸만 몰랐다. 아마 저리 끝없는 다정함에 마음만 잔뜩 달궈놓아 애달픈 처녀가 한양에도 셀 수 없이 많을 게 뻔했다.
“…예. 그러셨지요.”
“한데 어찌 그리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는지,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그것이 또한 저를 살리는 일이기에 그리 말하였습니다.”
“음?”
하지만 연심을 밝히면 도겸은 또한 점잖고 나직한 투로 달아오른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본디 최도겸이라는 남자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결코 곁은 주지 않는, 아주 냉정한 사내이니 말이다. 화월은 애써 마음을 감추었다.
그게 도겸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임을 알기에.
“나리께선 저를 구하신 은인이십니다. 한데 어찌 나리를 그리 만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네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만, 그래도 아니 된다.”
바로 이렇게, 도겸은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화월은 결국 앞을 보지 못하는 도겸을 대놓고 뾰로통하게 올려다보았다. 화월이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는 도겸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런 말을 하다 보면 정말로 네 마음 안에 살인을 하여도 된다는 당위성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독이 되어 또한 너를 갉아먹게 될 것이니 결코 경계하며 꿈에도 그런 생각은 말거라. 알겠느냐?”
“…예.”
모진 사내 같으니. 꿈에서조차 곁을 내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흑매향의 모든 구성원들이 저마다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며 챙기면서, 자신의 일은 도통 털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화월은 그만 펑펑 울고 싶어졌다.
“나리께서는….”
기어이 화월의 눈망울에 또다시 눈물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참으로 매정한 사내십니다.”
“매정하다니, 나는 그저….”
“나리!”
도겸이 의아해할 무렵 밖에서 삼득이 급히 고했다.
“처, 청이 아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천덕이를 잡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화월은 목격하고 말았다.
“청이가?”
창에서 홱 돌아서는 도겸의 표정을. 그제야 왜 앉지도 못하고 비가 내리는 창밖을 향해 서 있었는지도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차윤아. 내 지팡이 좀 다오.”
그는 매일 거울 속에서 본 얼굴과 닮아 있었다.
도겸을 은애하여 밤낮으로 앓는 제 얼굴과.
“…예, 나리.”
한쪽에 세워두었던 지팡이를 건넨 화월은 차분히 방을 나서는 도겸의 뒤를 따랐다.
목 놓아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문 채였다.
***
청은 여각의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들고 온 천덕을 중앙 마당을 향해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손을 털었다.
그 과정에서 그다지 큰 소음이 난 것은 아니지만, 하필 여각에서 볼일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아래에 있었다. 자연스레 비가 쏟아지는 텅 빈 마당 가운데로 시선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사내를 짐짝처럼 내던지는 작은 소녀라니. 하나같이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하기 바빴다.
“뭘 봐?”
쏟아지는 시선에 청이 퉁명스럽게 되물어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서 보부상들과 물건의 대금을 놓고 이런저런 흥정을 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삼득이 입을 떡 벌리며 기함했다.
“아… 아씨!”
“지금 저 처녀가 사람을 한 손에 들고 들어오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저 처녀는 아까 포구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각자의 생각이 하나씩 더해지다 보니 별안간 걷잡을 수 없이 웅성대는 소란이 커지고 말았다.
“설마 그!”
“어어 다들 여기 좀 보시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삼득이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비, 비가 도통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다들 봉놋방(여러 객이 한데 모여 자는 큰 방) 으로 가 좀 쉬어 가시오들! 이 삼득이가 맛깔난 전이라도 구워 돌리겠소!”
삼득의 눈짓에 부리는 자들이 민첩하게 움직여 사람들을 소 떼 몰듯 방으로 데리고 갔다.
금세 휑해진 마당엔 시체처럼 혼절한 천덕만 내버려진 채로 비를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