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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8)화 (103/197)

사람들은 이미 바다에 밀어 넣은 여자가 다시 배 위로 뚝 떨어져 혼비백산한 채였다.

“누구야.”

갑자기 큰 파도가 일어 배가 크게 흔들렸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이 절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하나같이 공황 상태에 빠져

“누가 감히 물에 사람을 버렸지?”

그럼에도 꿋꿋하게 묻는 청은 뱃머리 끄트머리에 고요하고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작은 어깨 뒤로 마치 용이 승천하듯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

“무슨 짓이야! 저 여자 하나 사려고 우리가 얼마씩 모았는지 알기나 해?”

청을 보내놓고 나니 사람들의 원성은 제사의 불청객인 도겸에게 모여들었다.

“없는 살림에 놋그릇까지 팔아 모은 돈이라고!”

“그래. 용왕님이라도 달래드려야 고기가 잡힐 것 아니냐고!”

주변에 제 편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도겸은 굴하지 않고 큰 소리로 사람들을 나무랐다.

“절박한 사정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적어도 이건 아니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늘이 내린 귀한 목숨일진대 어찌 돈을 내었다는 이유로 남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수가 있소? 하물며 주상 전하께서도 백성의 목숨을 귀히 여기시어 함부로 생살여탈권을 휘두르지 않으시거늘!”

“말만 번지르르해선… 우리가 오죽하면 이러겠냔 말이야!”

도겸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기 어디 관군은 없소? 사람을 공양하는, 이 천인공노할 짓을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이오?”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그를 비난하는 아우성만 늘었다.

“뭐야, 행색이 말끔하여 뭐라도 되는 줄 알았건만… 장님이네?”

거기다 누군가 도겸의 상태를 알아보자 줄줄이 더 큰 소리로 조롱하기 시작했다.

“장님이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지금 우리의 절박한 꼴도 안 보이는 게로군!”

“누가 저 빌어먹을 양반 좀 어디 묶어놓으라고! 어렵게 올리는 제사 부정 타게 하지 말고.”

“에잇, 퉤!”

보이지 않는다고 막말을 내뱉거나, 누군가는 거칠게 침을 뱉기도 했다. 낯선 손길이 도겸을 붙잡으려 하기에 반사적으로 쳐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지.”

“저 보시오! 외지에서 온 장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산통을 깨려 들지 않소!”

“잡아!”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휘두를 지팡이에 누가 어떻게 맞을지도 알 수 없다.”

“…뭐?”

“나도 자네들처럼 함부로 생살여탈권이란 걸 쥐어볼까 하여 말이네.”

도겸은 세자에게서 선물 받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피하게.”

마지막 경고와 함께 도겸은 가만 서서 자신의 두 팔을 벌린 범위 안으로 들이닥치는 사람들의 급소를 절묘하게 후려쳤다.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은 사내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뭣들 하는 거야! 겨우 장님 하나를 못 잡아서 이 난리를 쳐?”

오래지 않아 도겸을 제압하려던 사람들이 하나둘 뒷걸음질을 쳤다. 사정거리 안에서 거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움직이는 도겸을 당해 낼 수 없던 탓이었다.

그럴 수밖에. 돌아가신 부모님처럼 언제, 어디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복수심을 가족 삼아 자라온 그였다. 하루도 게으르게 살지 못했음이 당연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외가에 의탁하는 동안 그는 숙부에게 부탁하여 온갖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소년의 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다. 때론 너무 지친 나머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스스로를 혹사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커멓게 응어리진 두려움에 잡아먹힐 게 뻔하지 않나.

그래서였다. 눈을 잃었어도 크게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아니, 지금 저 장님이 문제가 아니야. 저, 저걸 좀 보라고!”

“뭐? …저, 저게 뭐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순간엔 눈이 보이지 않음에 적잖이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청아.”

청이 뭔가를 한 것 같은데 저만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요, 용왕님이 나타난 게 아닌가?”

“저게 용이라고?”

“나리!”

“스, 승천이라도 하는 것인가… 악!”

“커억! 뭐, 뭐야! 이것 놔! 우리도 맞기만 했다고!”

“닥쳐라 이놈들아! 너희들이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를 알기나 한 것이냐!”

그즈음 한바탕 벌어진 소란을 목격했는지 뒤늦게 삼득이 무사들과 나타나 도겸을 호위했다.

“나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바다에 저것은 또 무엇…!”

다급하게 도겸이 괜찮은지를 살피던 삼득이 문득 말이 없어졌다. 어수선한 와중에 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 도겸은 ‘승천’이라는 말을 들어 버린지라 조급해지고 말았다.

“인신 공양이 벌어진다고 하여 막고자 하였네. 한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성적으로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 그것이… 소인도 난생처음 보는 것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도겸이 삼득의 옷깃을 덥석 붙들었다.

“그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은 할 수 있지 않나. 어서 말해 보게!”

그때였다. 삼득을 붙잡은 손등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진 것은.

“…비. 비가 떨어집니다, 나리.”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세찬 물줄기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놀란 사람들이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도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빗물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삼득이 더듬거리며 직전에 본 것을 설명했다.

“바다에 어,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치고… 집채만 한 파도가 일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나리. 바다가 이리 삽시간에 변화무쌍해지는 건 소인이 지금껏 여기 살면서도 처음 보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역시 청이 단순히 소년의 누이를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뭔가 거대한 일을 벌인 듯싶었다.

“…신물 덕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인가.”

조익환이 인위적으로 비를 내린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비였다. 도겸이 멍하니 손바닥을 들어 빗물을 받을 즈음, 차가운 빗물보다 더 차가운 체온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최도겸.”

“…청아!”

가라앉았던 마음에 열이 올랐다. 도겸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괜찮으냐?”

제 마음이 얼마나 널을 뛰고 있는지 모를 청은 직전에 있던 상황을 알리기 바빴다.

“괜찮아. 일단은 물에서 얘 꺼내고 인간들한테 더 이상 바다에 사람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긴 했는데….”

두 사람이 뭔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애타게 누이를 찾던 아이가 뛰어와 소리쳤다.

“누이!”

“석… 석아.”

남매가 상봉하는 와중에도 빗줄기는 도무지 가늘어지질 않았다.

“나리,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데 잠시 여각으로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의 말이 맞았다. 한 번 사람을 해치려 한 이들이 아닌가. 오늘은 어찌 구해 냈어도 또 바다가 거칠어지면 당장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마땅히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삼득이 자네는 이 아이들부터 챙겨 주게. 당분간 데리고 있어야 할 듯싶으니.”

“예, 나리!”

“그리고… 여기 있던 왈패들 중에 천덕이라고 있네.”

왜 청이 알아본 것인지도 이제야 기억이 났다. 도겸은 더 미루지 않고 즉시 삼득에게 명령했다.

“그자는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자라 반드시 잡아야 하네. 지체 말고 그자부터 잡아들여야 해.”

“예? 아, 예, 나리.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삼득이 곧장 다른 무사들에게 천덕의 위치를 파악하라 지시하던 차, 청이 나섰다.

“아까 대충 기절시켜놓고 가긴 했지만 금방 깨어나 도망친 것 같아. 내가 냄새를 기억하니까 가서 찾아올게.”

“무어? 아니다, 삼득이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터인데….”

“이미 한 번 감쪽같이 사라졌던 인간이잖아. 잡아서 여각으로 데리고 갈 테니까 너도 거기 가 있어.”

도겸이 재차 잡기도 전에 청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삼득의 반응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직전까지 계시던 아씨가 어찌 이리 감쪽같이 사라지실 수가…!”

눈을 끔벅이며 마구 비벼 대고 있을 삼득의 모습이 훤했다. 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도통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우리는 그만 여각으로 가 있는 게 좋겠네.”

“예, 나리!”

잠시 동안에도 빗줄기는 가늘어지지 않고 도리어 몸을 때리는 장대비가 되어갔다. 밖에 더 서 있다간 꼼짝없이 고뿔에 들지도 몰랐다. 도겸은 삼득과 함께 여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도겸은 제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던 청의 체온이 쉽사리 잊히질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는 내내, 젖은 소매 속 그의 손은 몇 번이고 쥐었다 펴지길 반복했다.

***

“허억, 허억…!”

천덕은 정신없이 비가 쏟아지는 산속을 뛰어올랐다. 질척하게 젖은 땅은 자꾸만 발을 붙들었다. 가뜩이나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다리인지라 달음박질이 더디기만 했다.

“어서 가야 해. 어서!”

산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컴컴해지는지라 방향도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일단 달렸다.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그 괴물, 괴물한테서… 으억!”

기어이 돌부리에 걸려 볼썽사납게 자빠졌다. 전신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천덕은 입 안으로 들어온 흙탕물을 퉤 뱉으며 꾸역꾸역 일어나 다시 뛰었다.

빗물에 젖은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기만 했다. 기운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뼛속까지 새겨진 공포가 되살아난 탓이었다.

짐이며 노잣돈을 마련해 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잠시 어울리던 패거리의 두목은 물론 형님 동생들에게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했다. 일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옆 마을로 피신해 숨어 있다가 내일쯤, 정신을 차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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