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7)화 (102/197)

“무어? 아니… 화월이는 내가 과거에 급제하고 얼마 안 되어 선배들에게 불려가 고초를 겪을 때에 도움을 주면서 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 뒤로 종종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정도였는데….”

도겸이 한창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 청은 포구 쪽에서 악을 쓰는 아이의 비명을 듣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사정을 들었을 때 워낙 딱하다 싶어….”

“잠깐만.”

“음?”

“아까 바닷가에서 네 염낭을 훔쳐갔던 아이 말이야.”

“그 아이가 왜?”

“저쪽에서 마구 소리 지르고 있는데.”

거기다 제법 귀에 익은 또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무어라 소리를 지르느냐?”

도겸이 들리지 않는다니 청은 조금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곤 수많은 소리들 중 하나를 골라냈다.

“누이를… 죽이지 말라고 하고 있어.”

“뭐?”

와락 미간을 구기며 자세를 바로 하는 도겸은, 아마 수년 전 화월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이었다. 아무리 약한 것들을 돌보아 온 청이라 하여도 최우선은 저 자신이었다. 그게 당연하다 여겼다.

“어느 쪽이냐? 당장 가보아야겠구나. 위험에 처했다면 큰일이지 않느냐.”

그러나 도겸은 반대였다. 모두를 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자신을 돌아본 적이 있긴 한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쪽이야.”

청은 도겸을 이끌고 다시 포구 쪽으로 나갔다. 어떤지 길에 지나는 이들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싶더라니,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포구에 바글바글 모여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음에 더해 꽹과리와 북을 마구 두드리는 굉음까지 청의 예민한 고막을 괴롭혀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누이를 놔줘! 놔주란 말이야!”

아이가 내지르는 소리도 더 크게 들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그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고 있었다.

“말 좀 묻겠소.”

겹겹이 붙어 선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다 도겸이 누군가에게 물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오?”

“뭐요? 잘 들리지 않소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물었소!”

점잖게 묻던 도겸도 재차 언성을 높여 물어야 할 정도로 소란한 사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 선비님께선 이곳이 처음이십니까?!”

“그렇소!”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도겸이 간단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작은 터라 앞이 보이지 않는 청은 그저 촘촘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어서 헤치고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간단하게 밀치며 나가거나 훌쩍 뛰어넘어볼까. 그러나 한양처럼 건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청은 별수 없이 인내심을 할애했다.

“요즘 바다에 파도가 어찌나 거센지, 용왕님께서 노하셨다 하여 제사를 지내는 중입니다! 제물로 여자아이를 바다에 내던지려 한다는데….”

“그 무슨, 인신 공양이라니!”

대번에 기함한 도겸이 청의 손을 붙잡은 채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청이 직전에 참은 게 무안할 만큼 거센 힘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원성이 터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멈추시오! 어찌 사람을 제물로 바친단 말이오!”

그리고 드디어 제사가 벌어지는 판에 다다랐을 즈음, 도겸은 웬 험악한 인간에게 가로막혔다.

“진지하게 용왕님께 제사 지내는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엉?”

도겸의 뒤에 서서 가려진 청은 눈을 깜박였다.

“…사람 제물은 필요 없는데.”

무엇보다 공교롭게도 도겸을 막아선 이가 제법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아는 목소리가 하나 더 있더라니, 이 인간이었구나. 청은 도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쏙 내밀어 알은 채를 했다.

“천덕이가 여기 있네?”

“뭐? 누가 나를… 허억!”

청과 눈이 마주친 천덕이 다음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리며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청은 그 틈에 도겸의 앞으로 나섰다.

“청아?”

도겸의 만류에도 청은 벌써 퍼렇게 질린 천덕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 구면인 인간이야.”

“구면? 네가 여기서 아는 사람이….”

“너, 너, 너, 너…!”

“거, 천덕이! 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린아이를 붙들고 있던 또 다른 왈패가 천덕을 보며 소리쳤다.

“감히 용왕님께 드리는 제사인데 부정 타지 않게 잘 지켜야 할 것 아니냐!”

“저, 형님. 그, 그게….”

천덕이 청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골랐다. 청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천덕의 주변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여유롭게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한양엔 곳곳에 네 용모파기가 나붙었는데 수배령이 여기까진 못 미쳤나 봐. 근데 여기선 우두머리도 못 되는 건가?”

“이봐, 천덕이 너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누가 막으면 내쫓든, 아니면 같이 바다에 내던져 버리라고!”

안 그래도 조각난 신물들이 제 힘을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확인해 보고 싶던 차여서 청은 도리어 누군가의 방해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몸을 풀 생각을 하니 온갖 자극에도 기분이 퍽 너그러워졌다.

“누이! 내 누이를 놔줘! 살려주라고!”

그때 다시금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청은 아이가 찾는 누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왈패들이 사방으로 경계하는 커다란 원 모양 안쪽엔 악기를 두드리는 사람들, 그리고 색색의 옷을 입고 칼춤을 추는 사람 주변으로 여러 사람이 바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뭔가를 빌고 있었다. 돼지머리며 이런저런 음식이 놓인 제사상도 보였다.

“…청아.”

뒤에서 도겸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나설 수 없음에 원통한지 그가 이를 갈며 읊조렸다.

“부탁이다. 구해다오.”

“안 그래도 어디 있는지 찾는 중이야. 물에 인간을 버리는 건 나도 반대니까.”

“…….”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청은 슬그머니 도망치기 위해 벌레처럼 사람들 틈으로 기어가던 천덕의 옆구리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으악!”

“어디 있어? 제물이라는 애.”

“이, 이미 늦었다! 공양물을 실은 배는 이미 포구를 떠났으니까!”

“떠났다고?”

청은 즉각 시선을 멀리했다. 먼 바다에 떠 있는 몇 척의 배들 중 어떤 것인지 단번에 가늠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연놈들이 아까부터 이리 신성한 제사를 방해하는 거냐!”

그즈음 천덕이 있는 쪽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고 판단한 왈패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청이 녀석들부터 제압해두려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누가 제사를 망치려 드는 것이오!”

왈패들 외에 기도를 드리던 사람마저 청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에 선동된 이들이 한마디씩을 보탰다.

“파도에 휩쓸려 죽은 이들이 몇인 줄은 아시오? 앞으로도 계속 사고가 나면 이 고을 뱃사람은 다 죽소! 그러니 참견 말고 갈 길이나 가란 말이오!”

“맞아. 그럴 바에야 스스로 목숨 내놓은 저 여자 하나 내놓고 용왕님을 달래드리는 게 낫지!”

어이가 없었다. 듣다 못한 청이 무어라 답하려 했다.

“용왕? 아니, 이 바다에 사는 용이 또 있지 않고서야 나는….”

“청아, 아직 여기 있느냐?”

청을 부르는 도겸의 도포 자락이 바닷바람에 여러 갈래로 나부꼈다. 청은 여전히 천덕을 밟아 제압한 채로 답했다.

“살의가 등등한 녀석들이 최소 열이 넘는데 어떻게 가?”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왈패들만 골라서 제압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자칫 힘 조절에 실패하거나 급소를 때려도 인간은 쉽게 죽어 버리지 않나. 청이 발아래에 있는 천덕부터 기절시키려던 차, 도겸이 앞으로 나섰다.

“여긴 내게 맡기고 아이부터 구해다오. 사람은 물에 빠지면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지 않으냐.”

“…그 전에 네가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네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촌각의 촌각을 다투는 순간 짧게 고민하던 청은 결국 도겸의 뜻대로 움직였다.

“오래 안 걸리겠지만 그래도 죽지 말고 있어. 그 화월이라는 여자에게서 도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도겸에게서 어떤 답을 듣기도 전에 청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탄성이 뒤를 따랐다.

바람처럼 달려 즉각 포구의 끝으로 향할 즈음, 드디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 중 하나의 뱃머리에서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줄에 꽁꽁 묶인 여자를 바다에 밀어 넣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눈물만 흘리며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어둑한 바닷물의 입 속에 삼켜졌다.

“…사체가 썩으면 물이 더러워진다고.”

설령 이 바다에 또 다른 용이 있다 한들 기뻐할 것 같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게서 좋은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 한 용이 취할 정기는 아무것도 없을 테고, 억지로 인신 공양을 당한 이로부터 좋은 기운이 나올 리도 없으니까. 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저게 뭐야?”

“뭐?”

“저…!”

누군가 화살처럼 날아드는 청을 보고 눈을 크게 뜰 즈음, 청은 배가 아닌 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서는 사람과 달리 더욱 저항 없이 움직일 수 있는지라, 힘없이 물아래로 가라앉는 여자를 빨리 찾아 잡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악력에 놀라 눈을 부릅뜬 여자의 입에서 한 움큼의 공기 방울이 빠져나왔다.

“여기 네 목숨 받고 좋아할 용왕 없어.”

“……!”

“그러니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썩 꺼지렴.”

청은 여자의 몸을 묶은 줄을 잡아 수면 위로 내던지듯 밀어 올렸다. 뒤늦게 발버둥 치는 작은 몸이 물 위로 향하다 못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청은 무서운 속도로 여자를 따라 물 밖으로 나갔다.

“으악!”

그리고 여자를 빠트린 사람들이 타고 있던 뱃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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