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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6)화 (101/197)

순이와 달리 의견을 묻지 않고 골라서 꽂아 주긴 하였으나 언짢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은으로 만든 줄기와 이파리 모양의 섬세한 틀에 색색의 보석을 달아 만든 머리꽂이가 청의 마음에 퍽 들었기 때문이다. 제법 안목이 있는 인간이었다.

“아, 영향력이라는 게 실은 별 것 아닙니다. 그저 평소엔 다른 장사치와 다를 바 없이 물건을 사들이고 되파는 일을 하다가도 요즘처럼 어려운 시국이 되면 그동안 모아둔 자본을 조금씩 풀어 민생의 안정을 돕는 식이지요. 미처 상감마마의 성은이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분을 대신하여 이웃들을 살피기도 합니다.”

단체의 성격을 듣는 순간 딱 최도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크게 표가 나선 안 됩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이상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련할까.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인간들은 내쉬는 숨 한 자락에도 복잡한 감정을 담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돌아앉으시지요.”

청을 돌아앉게 한 화월이 이번엔 줄줄이 작고 동그란 항아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청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화장품이었다.

“저희는 모두 오갈 곳 없이 비루하게 살던 자들입니다. 전 대사헌 어르신의 은혜를 입거나 나리께서 직접 거두어주시기 전까지는요. 저만 하여도 기루에서 일하던 일개 기생이었습니다만 그만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관노가 될 뻔하였는데….”

화월은 손끝으로 미안수를 찍어 청의 얼굴에 살살 발라주었다. 그러던 화월이 이야기를 하던 것도 잊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피부는 난생처음 보는군요. 백분이나 연분도 필요치 않은 촉촉하고 매끈한 피부… 아마 조선 팔도에 이리 고운 피부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 사람이 아닌데 어찌 사람과 비교를 할까. 사실 저마다 모두 다른 생김새와 개성을 가진 인간들이 왜 똑같은 화장품을 바르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청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래서 평소엔 이거랑, 이것만 조금 썼어.”

그저 조선의 법도려니, 그렇게만 이해하며 뚜껑도 열지 않은 작은 항아리들을 가리켰다. 지켜보던 화월이 흠칫 놀라며 뚜껑을 열어보니 붉은 연지와 검은 미묵이 드러났다. 각각 입술을 붉게, 눈썹을 검게 칠하는 화장품이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홍화랑 묵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어떻게 몰라? 저건 쌀가루, 그 옆엔 동백기름, 이건 돼지기름으로 만든 면약(面藥, 고려인들이 제조하여 사용한 화장품)이잖아.”

“…과연, 나리의 말씀대로시군요.”

화월이 잠자코 붓을 들어 청의 입술에 연지를 발라주었다. 연지는 이미 붉은 빛을 띠는 입술보다 새하얗다 못해 약간 창백하기까지 한 청의 뺨에 발라 혈색을 만들어 주는데 더 요긴하게 쓰였다.

“뭐라고 말했는데?”

“혹시라도 나리께 무슨 일이 생기면, 장례 이후에 무조건적으로 도와야 할 귀한 분이 계시다는 말씀을 각 지부장들에게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성수청 무녀들의 위치를 찾기 위해 흑매향의 보부상들을 적극 활용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게 업인 사람들인지라 뭔가를 찾기에 아주 최적이니까요.”

미묵을 옅게 칠해 눈썹의 모양을 내는 것으로 단장을 마친 화월이 화장품을 정리했다.

화월의 설명을 가만 듣던 청이 불쑥 물었다.

“근데, 최도겸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왜 네가 해 주는데?”

“그야 어차피.”

달그락거리며 경대까지 접어 내린 화월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씨께선 금방 이 땅을 떠나실 분이 아닙니까?”

“…….”

그 말에 순간 왜 바로 긍정하지 못했을까. 청은 반발심에 묶인 제 혀가 왠지 제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유서와 다름없는 서신을 받고 한동안 불안했었죠. 미리 흑매향의 여러 사람에게 유언을 남겨 그분의 의지가 왜곡되지 않게 하시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더라도, 이번엔 어쩐지 그 서신을 받고 꿈자리가 좋지 않더라니….”

청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와중에도 바삐 움직이던 화월의 눈에서 기어이 다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리께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저희에게 일절 말씀을 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아씨께서 알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가련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내는 화월의 눈엔 독기가 그득 차 있었다.

“…나리를 저리 만든 자가, 누굽니까?”

그리고 청은 이미 꽃처럼 화려한 화월에게서 독하게 불타오르는 죽음의 기운을 읽어낸 뒤였다.

***

“나리, 소인이 먹여드리겠습니다. 아 하셔요, 아!”

“괜찮네. 식사 정도는 혼자서도….”

“여기서 얼마나 머무르시나요?”

“글쎄, 되도록 빨리 나서야 하지 싶은데.”

“며칠을 계시든 그것보다 더 계시면 아니되어요? 아니면… 그냥 저랑 여기다가 살림 차리셔도 되는데.”

식사 대신 물만 한 주전자를 부탁해서 시원한 물만 마시고 있는 청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아주 가관이었다.

방에서만 해도 부정한 기운을 시커멓게 뿜어내던 화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도겸의 입에 밥을 떠먹여 주기 바빴다. 지나치게 딴판인지라 혹시 이무기가 모습을 훔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청은 이 여각을 나서는 즉시 최도겸을 물에 담가 씻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붙어있다면 화월의 독한 향기가 밸 게 뻔했으니까.

“그만두어라.”

그때 도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멎었다. 그가 화월의 손길을 밀어냈다.

“눈을 잃었다만 손까지 잃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예?”

“이미 삼득이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어 혼자서도 식사는 어렵지 않으니 너는 그만 가서 일을 보거라. 내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불러다 앉혀놓은 꼴이 아닌가 싶구나.”

“소, 송구합니다. 나리.”

화월이 슬그머니 도겸의 팔을 놓고 떨어졌다. 맞은편에 앉은 청은 물을 호로록, 하고 마셨다.

“한데, 나리를 이리 만든 작자는 참으로 알려 주지 않으실 건가요?”

못내 미련이 남았는지 화월이 도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치댔다. 도겸이 반찬을 제대로 집어오지 못하면 몰래 밥 위에 올려주는 식이었다.

“말했지 않느냐. 이 일은 흑매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그러나 도겸이 잘라 말하며 거리를 두는 터라 화월이 입술을 비죽였다.

“저도 흑매향의 일원으로 여쭙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해친 사람, 두 번은 못 해치겠습니까? 보복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성차윤!”

먹던 음식 그릇과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둔 도겸이 드물게 고스란히 노기를 드러내었다.

“한 번만 더 그런 불경한 소릴 내뱉는다면 너는 흑매향에서 제명될 테니 그리 알거라.”

칼날 같은 그의 통보에 사색이 된 화월이 당장 무릎을 꿇었다.

“…나리, 송구합니다. 소인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 그리 험한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이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화월이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면 성차윤이라는 이름도 화월의 것인가 보다, 청은 그렇게 이해했다.

“아무래도 내가 일어나야 네가 할 일을 하겠구나. 그만 가봐야겠다.”

삼득이 준비해 준 손수건을 더듬어 입가를 닦은 도겸이 지팡이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리.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가시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문가에 앉아 대기하던 삼득이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벌떡 일어났다.

“필요한 볼일을 모두 마쳤으니 그만 가봐야겠다. 오래 있어봤자 사람들 눈에만 띌 터라 좋을 것도 없지. 청아, 일어나거라.”

청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일어났다.

“네, 오라버니.”

도겸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각을 나갔다. 어쩐지 지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 길을 그는 겁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뒤에서 화월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바라보다 뒤를 따라간 청이 물었다.

“그쪽으로 가는 거 맞아?”

그 물음에 무작정 앞으로 걷던 도겸이 우뚝 멈춰 섰다.

“…혹, 뒤에 아직 화월이 있느냐?”

“아니.”

“하….”

그제야 한숨을 내쉰 도겸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손으로 벽을 찾아 기댄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이 들어 큰일이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청의 의문에 도겸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어렵사리 화월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저 아이는 본래 거문고와 춤에 퍽 재능이 탁월하던 기녀였지. 한데 수년 전 기생이라며 낮잡아보고 무작정 겁탈하려는 사내에게 저항하다 그만 비녀로 사내를 찔러 죽이는 바람에 사형을 당할 뻔하였다. 만약 죽은 이의 신분이 양반 이상이었다면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란 꿈에서도 어려웠을 테고.”

이쯤 되니 청은 조금 궁금해졌다. 최도겸이 구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가까이는 집에 있는 순이부터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지 않나.

“그때 어찌 목숨을 구해 이제는 기생도 아니고, 재능이 많은 아이인 만큼 복수에 눈이 멀어 헛된 선택을 할 아이가 아닌데 저러는구나. 그게 속이 상하여 체면도 잊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어.”

“그 대상이 너라서 눈이 먼 것 같은데….”

제가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굴하지 않고 은연중에 우위에 서려 행동하던 화월을 기억하고 있었다. 청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도겸이 옅게 웃었다.

“내게 은혜를 입고 빚을 졌다 생각하여 그리 무르게 구는 것이지.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선뜻 손을 내미는 이에게 완전히 무방비해지기 마련이거든. 그때 내가 한 것이라곤 그 아이를 옥에서 꺼내기 위해 보석금을 대고 죽은 이의 가족에게 얼마간 보상을 해 준 것이 전부인데 말이지.”

어쩐지 도겸의 주머니는 너무 쉽게 열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청은 가늘어진 눈으로 도겸을 노려보았다.

“넌 그렇게 남에게 다 퍼주고 다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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