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한 척씩 드나들 때마다 사람들도 뭍으로 썰물처럼 올라오고 밀물처럼 배에 올라 사라졌다. 처음 한양의 시전을 보고도 정신이 없다고 느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냄새와 소음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긴 확실히… 전보다 사람이 더 많게 느껴지는구나.”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머리가 아프거나 짜증이 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가 느끼는 자극에 일일이 집중하기보다는 제법 느긋하게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낼 수도 있게 됐다. 낱낱이 분리되어 느껴지던 감각들이 조화라는 이름으로 엮여 분위기가 되었다.
이 땅과 저를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하던 과거에 비해 청은 비약적인 속도로 조선에 흡수되어 있었다.
“청아.”
말 없는 청이 걱정되었는지 도겸에게서 벌써 몇 번인지 모를 질문을 또 받았다.
“괜찮으냐?”
“여기 사는 물고기 떼가 더 크다고 생각하면 괜찮아. 물속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
“왜?”
“…아니다.”
도겸이 인간과 물고기를 비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번 꼬인 심사는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이렇게 툭툭 불거져 나왔다. 이렇게 뾰족하게 굴 때마다 도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모든 것을 감내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옷은 잘 쓰고 있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네게 이목이 집중되면 퍽 곤란할 터라 걱정이….”
“그렇게 걱정되면 눈까지 가릴까? 난 상관없는데.”
“…괜한 걱정이었구나.”
도겸은 알지 못했다. 간신히 눈만 내보인 저보다 훤한 인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에게 훨씬 많은 시선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도겸의 근처에서 말을 걸까 말까 어쩔 줄 모르며 심장 소리를 키우는 소녀들을 봤을 때 청은 뜻밖의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박동이 커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길을 물을 필요 없이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보이느냐?”
인간들의 세계이니 당연히 하나의 의문에 하나의 답만 나오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 도겸이 물었다.
“응. 다 왔어.”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 땅에 뚝 떨어진 건 백번 생각해도 억울한 일이었다. 그나마 소원을 빌 인간을 따로 찾을 필요 없게 당사자 앞에다 데려다주었으니 심란한 와중에 다행이지 않나. 이미 소원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도 하고….
아니, 잠깐.
“되도록 조용히 다녀가고 싶었는데, 별수 없게 되었구나.”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낀 청은 도겸을 낱낱이 파헤칠 듯 날카로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최도겸, 너 말이야.”
“그래. 말해 보아라.”
이 땅에서 지내는 동안 청은 인간들이 얼마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미물들인지를 익히 겪었다. 그런 결이라면 비단 도겸의 소원 또한 그리 단순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너 혹시….”
“나리!”
청이 마음에 맺힌 의문을 즉시 털어내려던 차, 큰 건물 앞에 서 있던 거구의 남자가 도겸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여기저기 짐을 이고 나르는 이들이 대부분 수수한 무채색의 차림인지라 깨끗한 복색을 한 청과 도겸이 자연스럽게 눈에 띈 모양이었다.
“어찌 연통도 없이 오셨습니까?”
만면에 화색을 띠며 반기는 이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거친 수염과 뜨거운 햇볕에 익은 듯 검붉게 물든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도겸은 목소리만 듣고도 용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아… 삼득인가?”
“예, 접니다! 한데….”
도겸의 곁에 있던 청은 그의 팔을 잡고 살짝 옆으로 틀어 사내와 마주 보고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방향을 약간 튼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미처 전달할 겨를이 없었다만 일이 좀 있어 이리 되었네.”
“그 무슨… 아이고, 나리! 어찌 미리 알리지 않으신 것입니까!”
도겸이 당한 변고에 놀란 삼득의 눈망울이 금세 붉어졌다. 어찌할 줄 모르고 당혹스러워하던 그는 우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안쪽을 가리켰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행수님도 계시니… 한데, 함께 오신 분은 뉘십니까?”
눈만 드러내고 있던 청이 슬그머니 도겸의 장옷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삼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이 아이는….”
도겸이 손을 내밀기에 청은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더없이 하얀 손을 따라 절로 시선을 옮긴 삼득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전에 말한 바 있을 것이네. 내 사촌 누이, 청이라고.”
“예? …아, 그!”
짧은 비명을 내지르려던 삼득이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도겸은 자연스럽게 청에게도 소개했다.
“너에게도 말한 적이 있지. 이 땅에서 내가 가장 너를 만족시킬 사람인 이유, 그리고 설령 내가 죽어도 너를 책임질 수 있는 이유. 기억하느냐?”
“응.”
“그래. 바로 나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라 하였지. 네가 보고 있는 삼득이가 바로 그들 중 하나다.”
“도련님!”
그때 분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화려한 복색의 여자가 난데없이 청과 도겸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곤 갑자기 도겸을 덥석 끌어안으려 하기에 청이 즉시 그 팔을 잡아 꺾었다.
“어찌… 아악!”
청의 과격한 행동에 삼득이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고 도겸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 팔, 내 팔이…!”
“이, 이,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 행수님이십니다!”
조금만 더 꺾었다가는 삼득의 숨이 먼저 넘어갈 것만 같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도겸마저 차분히 청을 타일렀다.
“경계할 필요 없는 사람이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니 그만 놓아주어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소인의 팔이 끊어지는 듯하였습니다.”
도겸이 편을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는지 행수라는 여자가 대놓고 고통을 호소했다. 청은 나름의 이유를 대며 놓아주었다.
“갑자기 내 오라버니를 덮치려 한 건 그쪽이 아닙니까?”
여자는 아마 모를 것이다. 팔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으스러질 뻔했다는 것을.
“오…라버니?”
욱신대는 팔을 매만지던 여자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눈을 부라리며 도겸에게 확인을 구했다.
“나리, 혹시 그…?”
“그래. 서신으로 전한 적이 있지. 바로 그 아이다.”
이쯤 되니 청은 대체 그 서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도겸의 설명에 여자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으니 말이다.
“아….”
여자가 청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동안 도겸이 청에게 소개했다.
“청아, 인사하여라. 이 여각의 주인인 화월이다. 또한 우리의 사정을 아는 이지.”
삼득이 내내 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과 달리 화월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지 아까부터 도겸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나리. 어찌… 소인을 봐주지 않으십니까?”
“아 그게…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다.”
그러나 도겸이 말하기도 전에 화월은 이미 그가 짚고 있는 지팡이까지 본 뒤였다. 도겸이 더 설명하기도 전에 털썩 주저앉은 여인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찌, 어찌….”
오가는 사람들이 지역에서 가장 큰 여각의 주인이 바닥에 앉아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이리 오십시오, 아씨. 단장을 해 드리겠습니다.”
눈이 퉁퉁 부은 화월이 온갖 장신구를 늘어놓고는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청을 불러 앉혔다. 청은 아까부터 제 머리숱보다 두세 배는 많아 보이는 화월의 화려한 머리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입을 열지 않고 가만 자리에 앉았다.
“…아씨는 혹, 나리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그냥 밤낮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
화월은 빗을 갖다 대기만 해도 미끄러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일정하게 나누어 천천히 땋기 시작했다. 말을 잇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작게 코를 훌쩍였다. 아직 울음이 그치지 않은 탓이었다.
“상세히는 모르시는 군요. 그럼 흑매향(黑梅香)은 아십니까?”
“흑매향?”
“역시 말씀하지 않으셨군요. 흑매향은 말 그대로 검은 매화의 향기,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주상 전하를 보필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전국 팔도사방에 흩어져 있고, 소인은 동래(지금의 부산광역시)를 포함한 이 지역 전체를 책임지고 있고요. 나리께서는 우리 흑매향의 수장이시지요.”
“최도겸은 이미 대놓고 주상 전하를 보필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밤낮없이 바쁘신 게 아니겠습니까.”
의외인 건 화월이나 삼득이 청을 보고 처음의 도겸처럼 까무러치게 놀라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부상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훨씬 많다며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하긴, 이무기도 세자빈이 되겠다고 날뛰는 판국이지 않나. 청은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저도 바쁘게 살아왔다지만… 나리께서 하고 계실 일들을 생각해 보면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에요.”
손이 빠른 화월은 금세 청의 긴 머리를 땋고 댕기를 내렸다. 늘 온갖 댕기를 늘어놓고 하나하나 대어보며 고민하느라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내던 순이와는 달랐다.
“근데 은밀히 보필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참으로 아무 말씀 없으셨던 게로군요.”
청이 내려다보고 있던 경대의 거울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화월이 청의 옆머리에 머리꽂이를 대어주었다. 순이가 이것저것을 대어주며 청에게 원하는 것을 직접 고르게 하던 것과는 달랐다. 화월은 청에게 도통 취향을 묻지 않았다. 마음대로 몇 개를 대어보던 화월이 하나를 결정해 꽂아 주었다.
“나리께선 전국에 열 개가 넘는 상단과 크고 작은 객주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당연하지만 거기에 속한 행수들 모두 흑매향 소속이고요. 검은 매화가 칠흑 같은 밤에 젖은 꽃이듯, 우리 흑매향은 그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으나 다만 퍼져나가는 향기와 같이 영향력을 행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