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4)화 (99/197)

“으악, 내려… 내려줘!”

“이 땅에선 그렇게 장유유서가 중요하다고 가르쳐대는데 왜 이렇게 따르지 않는 인간이 많은 거야?”

청이 투덜거렸다. 왠지 제압한 아이보다는 도겸이 들으라고 말하는 듯하여 절로 헛기침이 나왔다.

“청아, 그만 내려주어라.”

“이 인간 품속에서 네 물건의 냄새가 나는데. 네가 준 거야, 뺏긴 거야?”

역시 어렵지 않게 염낭의 존재를 눈치챈 청이 물었다.

“그건….”

한차례 소금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천천히 아이와 청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도겸이 팔을 뻗어 아이를 높게 들어 올린 청의 손을 잡아 내렸다.

청의 키를 고려했을 때 아이를 최대한 높이 들어 올리고 있던 것 같았다. 아이가 소리치며 겁을 먹을 만도 했다.

“이제 그 아이의 것이다. 그러니 내려주어라.”

“…….”

도겸의 설명에 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아악!”

청이 아이를 내려 주는 대신 손에서 힘만 뺀 모양이었다. 폭신한 모래 바닥 위로 뚝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아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도겸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냐?”

그의 친절에도 궁지에 몰린 아이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저… 저리 치워!”

도리어 매섭게 굴기까지 했다. 그러곤 잘게 부스러지는 모래를 마구 튀기며 줄행랑치고 말았다.

“잡아다 줄까?”

“아니, 괜찮다. 그냥 두어라.”

한숨을 내쉬며 숙인 허리를 일으키는 도겸에게 청이 냉랭하게 다그쳤다.

“도대체가 너는, 네 것에 대한 욕심도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는 투라 도겸은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느니 청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나에게 있던 염낭은 저 아이에게 가서 더 큰 값어치를 할 것이다.”

“그래서 표낭도를 그냥 놔준다고? 관아에 넘기는 것도 아니고?”

“저 아이 하나만 잡는다고 뿌리가 뽑히진 않을 것이다. 아마 반드시 힘없는 아이들을 표낭도로 부리는 패가 있을 것이고 그 패의 우두머리가 있겠지.”

“그럼 놔줄 게 아니라 가서 직접 뿌리를 뽑으면 되는 거 아니야? 눈이 안 보여서 그래?”

“그게 아니라….”

청의 성격상 그저 있는 그대로를 물은 것이겠지만 어쩐지 도겸은 속이 쓰렸다.

“놈들은 한 번 발각되어 벌을 받는다고 해서 결코 쉽게 반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용당하던 아이들만 분풀이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피해가 생기겠지.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아마 이 지역의 패가 진장이나 관아와 연계되어있다면 일은 더 커질 것이다.

과거 해주에서처럼.

“그러면?”

“착취당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당사자로부터 확실히 증언을 듣고 파악하여 모두를 구해 내야만 해.”

“그럼 왜 놔준 거야? 저 애가 그 당사자니 보낼 게 아니라 붙잡고 물어보면 될걸.”

“혹시라도 그런 패에 속한 아이가 아니라 그저 좀도둑일 수도 있으니 양심의 선택에 맡겨둔 것이다. 반대로 붙잡아 실토하게 만든다 하여도 패거리에 함께 엮인 사람이 있다면 함부로 말할 수 없었을 테고. 그러니 적어도 도움을 줄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 함께 몸을 피할 시간을 주는 것이지.”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러게나 말이다.”

도겸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청을 향하는 대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보며 섰다. 천천히 들어 올린 손가락 사이로 나부껴 빠져나가는 바람결을 느끼던 차, 청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패거리의 우두머리도 어린아이면 어떻게 할 거야?”

“음?”

“잡아넣을 사람 없이 전부 어린애들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어려도 사리분간은 다 할 수 있고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잖아.”

“간혹… 그런 무리도 있긴 하지.”

“인간들은 부정한 기운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분간하는데?”

청에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 주어야 할까. 입을 떼기도 전에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바람이 빠져나가던 손아귀를 강하게 쥐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죄상이 가볍진 않겠다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 먼저 배웠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살아온 시간이 극히 짧은 만큼 왜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부터 배우고 스스로 깨달을 시간을 주어야 해. 내 한 걸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것을 배워야만 스스로 과오도 씻어낼 수 있을 테니.”

“…….”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아이들에게 배워 나가는 시간은 기회이자, 형벌이 되는 것이다.”

도겸은 청이 있을 방향을 보며 물었다.

“너는 순이가 과거 표낭도였다는 사실을 알지 않느냐? 그런데 가장 순수한 아이라며 곁에 두려 하였지.”

“응.”

“그럼 너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이들은 아직 스스로 저지른 부정을 씻어낼 기회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그리고 무엇보다… 과오는 무턱대고 혼을 내거나 벌을 주어 다스린다고 씻기는 게 아니니까.”

“인간들은 길게 살지 못해서 그렇게 시간에 집착하는 거야?”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구나. 단죄하기엔 너무도 어렵사리 살아남은 목숨들이니 말이다.”

“흐응….”

이미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온 청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던 그녀가 문득 떠오른 듯 다른 이야길 꺼냈다.

“근데 말이야.”

“말해 보아라.”

“이 땅의 바다는 왜 이렇게 짠 거야?”

“…뭐?”

“별로야. 물속에서 조금만 더 오래 있었으면 남산댁이 맨날 항아리 열고 들여다보는 젓갈이 됐을지도 몰라.”

손끝이 쭈글쭈글하다며 투덜대는 여인을 앞에 두고 도겸은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왜 웃어? 누군 소금기 씻어내느라 머리도 옷도 전부 엉망인데.”

“그럼 퍽 곤란하겠구나.”

“뭐 꼭 그렇진 않은데… 너 뭐 해?”

여인을 앞에 두고 스스럼없이 도포의 옷고름을 풀어낸 도겸이 한 손을 내밀었다.

“이 손 잡아보아라.”

“손?”

청의 차가운 손이 제 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높이를 가늠한 도겸이 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청의 몸 위로 연보랏빛 도포를 덮어주었다.

“설마 아직도 내가 추위를 탄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내겐 순이처럼 네 머리를 다시 곱게 땋아줄 능력이 없으니 장옷이라도 주려는 것이다. 네가 머리를 이리 산발하여 다니면 내가 욕을 먹지 않겠느냐?”

사실 누군가가 청에게 욕을 한들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한양처럼 이목이 중요한 곳도 아닌데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러나 어쩐지 제 눈이 일일이 살피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눈이 청에게 멋대로 와 닿는 게 거슬렸다. 아니,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싫었다. 그렇다고 이 터무니없는 감정을 청에게 터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겸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음에도 인간들의 거짓말과 속내를 파악하는 것까지 학습되지 않은 청은 진지하기만 했다.

“…내가 산발인데 왜 네가 욕을 먹어? 이 땅에 그런 법도도 있었어?”

이 순간에 천진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을 청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도겸은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바람 소리에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바닷속 구경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냐?”

“뭐, 내 바다엔 없는 게 이것저것 꽤 많던데.”

왠지 그 ‘이것저것’을 듣는다면 천기누설을 들어 버리는 상황이 될 것 같아 더 묻지 않기로 하였다. 도겸이 바다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럼 이제는 확실히 가보아야겠구나.”

“어딜?”

도겸은 복잡한 심정을 옅은 미소에 숨기며 답했다.

“돈도 잃고 멀쩡한 행색도 잃어버린 우리를 위한 곳 말이다.”

***

“설아야.”

“그건 싫다고 했잖아요!”

빽 소리치며 역정을 낸 조설아가 등을 보이며 돌아앉았다. 좋아할 만한 장신구며 노리개를 상자 하나 가득 채워 방으로 찾아왔던 조익환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쓰레기 내버리듯 치웠다.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러는 줄 아느냐? 다 네 여의주를 찾아오기 위함이다!”

“그래도… 그건 안 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조설아니까!”

그래 봤자 인두겁을 벗으면 흉측하고 거대한 구렁이에 불과한 요물이 원하는 것도 많았다. 잠시 이무기보다도 더 싸늘한 눈으로 조설아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조익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달랬다.

“딱 한 번이다. 내가 언제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더냐?”

“싫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싫다고요!”

“네가 이 일을 해 주지 않으면 여의주를 찾는 일도, 네가 세자빈이 되는 일에도 차질이 생긴대도 싫으냐?”

“하지만….”

“기어이 아비가.”

어조를 낮춘 조익환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겹겹이 뾰족한 산 모양의 3층짜리 정자관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이런 소리까지 하게 만드는구나.”

어깨를 움츠린 조설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설마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아비는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돕지 않으면 나는 내일이라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무슨… 장례요?”

“누구긴 누구야. 오래전에 죽은 설아의 장례식이겠지.”

“……!”

“그렇지 않느냐, 이무기야?”

순간 이무기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

청과 도겸은 장터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포구로 향했다. 포구 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되도록 피해 가려 했지만 청이 옷을 갈아입으려면 여각에 들러야 해서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도겸에게 땡전 한 푼 없는지라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을 해둘 것을 그랬구나. 그럼 마중을 나와주었을 터인데.”

“연락을 해서 나올 사람이 여기 드나드는 사람들도 전부 다 치워줄 수 있어?”

“음? 그건 아니다만.”

“그럼 한 사람이라도 적은 게 나아.”

“그 정도로 사람이 많은 것이냐?”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겁 없는 인간이 많네. 물에 빠지면 숨도 못 쉬면서.”

“물길을 따라 다니는 게 훨씬 빠르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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