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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3)화 (98/197)

송현익은 그토록 겁을 먹은 도승지의 표정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러니 자네는 어설프게 나설 생각 말고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얌전히 서가에 틀어박혀 태평하게 책이나 읽게. 그게 당연지사 유일하게 살길이니.”

애써 터진 불안을 꾸역꾸역 숨긴 도승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낯빛을 싹 바꾸었다.

“앞으로 자네와 사적으로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군. 이만 가보겠네.”

송현익은 더 이상 멀어지는 도승지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부정을 파헤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탓이었다.

***

습한 바닷바람에 갓끈이 나부꼈다. 도포가 이리저리 갈라져 날렸다. 발아래가 쑥쑥 빠지는 감각은 눈으로 보지 않으니 꼭 늪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도겸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청이 먼저 바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뭐, 빛깔은 마음에 드네.”

청은 도겸을 객주가 아닌 한적한 바닷가로 이끌었다. 도겸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나란히 손을 잡은 남녀는 장터를 나와 물 냄새를 좇았다.

와중에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없었다. 각자 일 보의 전진보다는 열 보의 후퇴에 비참해하기 바빴으니까.

적어도 도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바다는 네 눈동자의 색과 아주 흡사했지.”

그리고 앞으로 동해의 물빛을 굉장히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도.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기억에라도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낮의 바다와 밤에만 푸른 머리칼을 되찾는 청을 한 자리에 두고 상상할 수 있는 나름의 이점도 있었다.

“들어가 볼래.”

그때 청이 물에 들어가겠다며 도겸의 손을 놓으려 했다. 도겸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더 강하게 붙들었다.

“뭐야?”

“…….”

그리고 청은 기꺼이 도겸에게 잡혀주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사람을 내던질 수 있는 용이 이런 관용을 베푸는데 한낱 연정에 휘둘려 어리석게 행동할 수는 없지 않나.

도겸은 반성하며 천천히 손에서 힘을 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바다에 들어간 청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불안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멀리 가진 말고,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

“겨우 눈 하나 잃은 것치곤.”

도겸의 염려에 청이 퉁명스럽게 굴었다.

“너무 쓸모없어진 거 아니야?”

아닌 척해도 소용없었다. 도겸은 마음을 들키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열없이 웃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그토록 많은 것들을 보고 익혔건만 이 순간에 열이 오르는 마음을 식혀줄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청보다 먼저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걱정 마. 네게 남은 필요는 내가 알아서 뽑아 쓸 테니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청이 차갑게 식혀주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네 소원은 조익환이 저지르는 부정들을 모두 드러내고 왕을 지키는 일이잖아.”

“…….”

“그러니까 넌 함부로 죽을 생각이나 하지 마.”

결론을 내는 청의 말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너처럼 불이나 다름없는 사주를 타고날 또 다른 인간을 기다릴 여유 따윈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청은 도겸을 두고 사라졌다. 귓가로 들이치는 해풍과 파도 소리에 인기척이 멀어지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알 것 같았다. 청이 멀어졌음을.

도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반쪽짜리 신물로는 근방의 물을 조금 정화하는 것 말고는 이 마른 땅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국행제 때 하늘에 간곡히 청하였던 것입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동안 군데군데 비어져 있던 조각들을 채워 준 국무의 말들이

“이 땅에 부디 신성한 비를 내려 달라고. 그리고 여기 계신 아씨께서 오신 것입니다. 공교롭지만, 불의 신물과 함께요.”

그게 청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게 큰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어쨌든 하늘은 응답하였다.

“어쩌면 불의 신물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자 의지를 발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물은 이 땅을 어여삐 여기신 하늘께서 내려주신 힘의 산물이기에, 이 땅을 보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신물은 신이 안배한 힘을 다하면 스러져 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일찍이 물의 신물이 깨지고 반쪽이 분실되며 그 균형마저 어그러졌다.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함부로 남은 불의 신물까지 깨트릴 수는 없었노라고 국무는 전했다.

“전란 이후로 백성들이 다시 땅을 일구며 살기 위해서는 불이 꼭,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나 태백산맥을 대들보 삼아 살아가는 조선에 어느 날부터 산불이 지나치게 빈번해졌다. 물은 메마르고 불이 강해지니 사람의 힘으로는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당시의 국무는 불의 신물이 불러일으킨 재해라 여기고 이를 제거하고자 마음먹었다.

문제가 있다면 반지는 돌로 만들어진 물의 신물과 달리 불에 녹지도, 망치에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승천하는 용의 목구멍에 넣어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떠나보낸 신물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것이라곤, 지금의 국무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그리 꽁꽁 묶이고서도 이리 능력을 쓰시는 것을 보면… 하늘이 저희의 응답에 지나치게 큰 답을 내려 준 게 아닐까, 소인은 그리 생각합니다.”

청이 메마른 조선의 한줄기 구원이 될 것임은 도겸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난데없이 보쌈이라도 당하듯 조선에 떨어진 청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코 청의 의지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아씨께서 나리의 눈앞에 떨어지신 것은 나리께서 바로 그 소원의 열쇠를 쥐고 계신 탓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필 도겸이었다.

“나리께선 현재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불의 사주를 가진 사람이시니까요.”

“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소원이라니, 어려서 풍등에 적어 보내던 간단한 기원 같은 것이 전부였지 않나.

“역적의 소탕.”

그것이 소원이라면 이미 청이 잘 알고 있고 또한 지금껏 도와 왔다. 이대로만 이어 가면 자연스레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이를 어쩌면 좋으냐.”

이대로 청과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다, 그런 감정이 더 강하게 발한 것이었다. 보내는 것이 청을 위한 길이고 그래야만 함을 알면서도 곁에 두고 싶어져 버렸다. 도겸은 어느새 본분을 잊은 천치가 됐고 사랑에 눈이 먼 사내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눈이 멀기는 하였으니….”

기가 차 웃음이 터지려던 차, 어디선가 난데없이 국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땅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자는 바로 나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성수청을 나오기 전 국무와는 신물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불의 소원을 대변할 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과 함께.

“불에게 골라서 태우는 법이란 없습니다. 옮겨붙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지요.”

누군가 자신을 농락하는 것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지팡이로 휘둘러보았지만 누군가 반응하거나 맞지도 않았다. 도겸은 혼자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마치 귓가에 대고 말하기라도 하듯 선명하게 들렸다.

“무엇을 태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되시길….”

“아이쿠!”

우두커니 서 있는 도겸에게 웬 아이가 갑자기 뛰어와 부딪친 것은 그때였다.

“소, 송구합니다. 나리!”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겠지만 도겸이 재빨리 긴 팔을 뻗어 덥석 붙들었다.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져지는 게 뼈밖에 없는 건 확실했다.

“어… 어찌 이러십니까?”

잡고 보니 순이보다 약간 더 큰 남자아이였다.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못할 만큼 약했다. 해풍이 살짝 잦아들 참에 도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손재주가 제법 좋은 아이로구나. 부딪친 그 짧은 틈에 내 염낭을 다 챙기고.”

“예?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더듬거려보니 역시 품 안이 비어있었다.

“함께 표낭도질을 하는 녀석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어차피 눈이 멀어 너를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말해보아라.”

“소인은 차, 참으로 억울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분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차고 있던 염낭에 든 금액은 어차피 크지 않았으니 그냥 잃어버렸다 셈 쳐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도겸은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순이 생각이 난 탓이었다. 그래서 허우적대며 저항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염낭에 들어있는 돈의 배를 더 주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키에 비해 힘이 지나치게 약한 것으로 보아 오래 굶었음이 분명했다.

“대신 혹 너에게 이런 짓을 시키는 어른이 있거든 내게 말하여라.”

“…예?”

“어린 네가 어찌 스스로 이런 짓을 하겠느냐? 당연히 네가 남의 염낭을 가로채도록 가르치고 내몬 어른이 있을 터인데.”

아이는 이렇다 할 답을 내지 않았다.

도겸은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부터 아이를 겁먹게 하고 있음을 알기에 칼자루를 넘겨주었다.

“지금 내게 말하기 껄끄럽다면 청대산 너머 고을에 있는 객주에게 말해도 좋다. 도와주마.”

그 말과 함께 손에서 힘을 빼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할 말을 다 했으니 떠나도 상관없었지만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꼭 생각을 바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덧붙였다.

“자의로 그러는 것이라면 이번 한 번만 봐줄 터이니 그 돈으로 배를 채우되 앞으로는 정당하게 번 돈을 쓰거라. 다만 타의로 그러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사실을 알려 바로 잡아야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

“앞으로 너의 선택에 따라 여러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거라.”

“자, 장님 주제에!”

“…아직 있었느냐?”

“아무 것도 안 보이면서 뭘 안다고!”

점차 목소리가 멀어졌지만 아이의 울분은 어쩐지 더 크게 다가왔다.

“웃기지 마! 내 누이는… 아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가 고꾸라져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너는 뭐야?”

그리고 비명 내질러진 곳으로부터 청의 간결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말하는 법을 제대로 못 배운 것 같은데, 내가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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