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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12)화 (97/197)

아마도 청이 남은 돌의 조각을 꺼낸 듯했다. 귀를 기울이던 도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랬다. 돌이켜 보면 청이 여유를 찾고 갈증에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사당에서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신물을 찾은 뒤가 아니던가.

그리고 돌조각들이 만나 당장 청의 손에 끼워진 가락지가 빠져 버린다면….

“청아.”

도겸은 저도 모르게 곁에 있는 청을 부르며 찾았다.

“왜?”

당연하지만 무심한 대꾸가 돌아왔다. 뻗은 손에 닿아 오는 차디찬 감촉과 함께였다.

그 손을 한번 힘 있게 쥐었다 놓은 도겸이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아니다. 혹… 무슨 일이 생길까 하여.”

연모하는 마음을 깨닫자마자 가장 원하는 일을 해 주고 싶어 강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으로는 청을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삿된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겸이 홀로 번민하며 괴로워하는 동안 국무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반쪽짜리 신물들이 공명하며 반응하는 것은 또한 근처에 다른 신물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아씨의 손가락에 자리한 불의 신물일 테고요.”

“내가 손을 대자마자 멈추던데.”

“불의 신물이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기껏해야 물의 신물은 반쪽짜리일 뿐이니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 합치면 되겠네.”

청이 주저 없이 깨진 신물들을 모아 합쳤다. 탁, 하고 작은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도겸은 짧은 숨을 들이켰다. 한 치 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청이 있는 쪽에서 난데없이 물이 잔뜩 튀어 전신이 젖고 말았다. 놀란 도겸이 다시금 소리쳤다.

“…청아. 청아!”

“시끄러워. 옆에 있다니까 왜 자꾸 부르는 거야?”

“천장 아래에 있건만 갑자기 비가 쏟아지지 않았느냐?”

“신물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쪼개져 있던 것들이 만났으니 한바탕 울기라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국무가 짧은 설명과 함께 바깥에 대고 수건을 가져오라 일렀다. 곧 자박이는 작은 발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씨, 이것을….”

“됐어, 치워.”

그러나 청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코로 습한 공기가 들이쳤다. 꼭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와중에 물에 젖어 축축하게 젖어 있던 전신은 삽시간에 마르고 금세 보송해졌다. 자유자재로 물의 상태를 변환하는 수룡의 능력이었다.

“…왜.”

신묘한 상황을 겪은 인간들이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잇지 못하던 차,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만 홀로 유유하게 물었다.

“물의 신물을 전부 찾았는데 왜 아직도 이게 빠지지 않는 거야?”

그 목소리는 도겸이 처음 부용지에서 들었을 때만큼이나 서늘했다.

***

“그… 갖고 싶은 것은 없는지 보아라. 혹 한양의 시전에 없던 게 눈에 띌지도 모르니.”

“됐어.”

쌀쌀맞게 거절하는 청의 목소리는 북풍한설과도 같았다. 안절부절못한 도겸은 재차 용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썼다.

“그럼 술이 마시고 싶진 않느냐? 지역마다 술맛이 달라 궁금할 것도 같은데.”

“넌 봇짐도 싹 잃어버렸다면서 무슨 자신감이야? 술 살 돈은 있고?”

“말했지 않느냐. 돈이야 찾으면 된다고.”

“필요 없으니까 너나 마셔.”

성수청을 나서서 객주로 가기 위해서는 고을의 장터를 통과해야만 했다. 단순히 일직선으로 쭉 걸어 나가면 될 일이지만 장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겸에게는 과거 시험지를 작성하던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부지런히 지팡이를 짚어도 쉽지 않았다. 한 걸음을 딛기가 무섭게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부딪쳤다.

“젊은 나리께서 어찌….”

“미안하오.”

이러다간 두 시진도 안 되어 조선을 가로지른 게 무색하게 겨우 장터를 지나다가 하루가 다 가게 생겼다.

“…청아, 곁에 있느냐?”

그럼에도 도겸은 곁에 있을 청을 가장 신경 썼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답이 돌아오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멈춘 틈에 앞서 가 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다 한들 제 목소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청아, 청아? 어디…!”

“아잇, 거!”

바쁘게 움직이려다 또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상대는 화를 내려다 그의 행색을 보고는 말을 아끼며 재빨리 지나쳐 갔다. 괜찮느냔 말을 건네기도 전이었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섰지만 덩그러니 남은 도겸은 이내 공황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방향도, 곁에 있어야 할 이도 잃어버린 탓이었다.

분명 사위가 소란함에도 불구하고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홀로 무인도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적잖이 당황하다 못해 불안하고 두려웠으며 그와 동시에 화도 났다.

혹 성수청에서 물기를 모두 날려 버린 일로 청이 한쪽에 쓰러져 버렸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고.

“…청아.”

지켜 주고 싶은 이가 생긴 마당에 제 한 몸조차 건사가 안 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눈을 잃어도 괜찮다 웃을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제 집 안에서만 국한된 일이었던 것일까.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그러게 술도, 장신구도 필요 없다니까 객주엔 왜 가려고 해서 그런 꼴을 당해?”

그때 도겸의 손을 잡아 오는 차갑고 보드라운 감각이 있었다.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왜, 대답하지 않았느냐?”

“기분이 나빠서. 그런데 나만 기분 나쁘기 싫어서.”

“뭐?”

얼결에 손을 놓으려 했지만 뼈가 으스러질 듯이 잡은 청이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진짜 내가 죽어야 되는 방법뿐이잖아.”

“…….”

“근데 넌 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와중에 장신구나 술 따위가 필요할 것 같아?”

“…그래도 전보다 힘을 쓰는 것이 자유로워졌으니 다행인 게 아니냐?”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처음 샘물 속에 숨어 있던 청을 꺼내었을 때도 꼭 이렇게 울분에 찬 기색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보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 청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두 눈을 잃었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깊게 통감했던 직전의 심정을, 청은 이 땅에 온 이후로 내내 느끼고 있지 않겠나.

“소원이나 말해.”

무려 남녀가 손을 잡고 걷는 다소 낯간지러운 상황에 청의 어조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야….”

이제 저는 청의 차가운 체온을 느끼면 심장부터 달음박질하게 되었건만, 청에게 저는 그저 이 땅을 떠날 열쇠가 되고 말았다.

“네가 불이라며.”

도겸은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

“이보게, 도승지!”

“으악!”

승정원 입구 근처에 숨어있던 송현익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이에 막 문밖으로 나서던 도승지가 까무러칠 듯이 놀라 소리쳤다.

“자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이리 대경하게 하다니!”

“자네가 며칠 전 내 집에 다녀간 이후로 줄곧 내 연통에 답이 없으니 말이야. 집으로 찾아가도 출타하였다 하고, 궐 안에서는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어긋나는데 어찌 하나?”

“그래서, 여기서 내도록 나를 기다렸단 말인가?”

가까스로 만났는데 부담을 한 아름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현익은 뒤늦게 아닌 척 발뺌했다.

“나도 바쁜 사람일세. 바로 옆이 홍문관인 것 잊었나? 오늘은 홍문관 업무를 보는 날이라 이리로 등청했다가 마침 자네 생각이 나서 들러보던 길인 게지.”

물론 도승지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도며 말투까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날 잘 들어갔냐 물으려던 것이라면 이리 멀쩡한 것 보았으니 되었지 않나?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어허이, 어찌 이리 매정하게 가는 겐가.”

이렇게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자 하였다면 며칠을 쫓아다녔을 리가 있나. 송현익은 도승지가 쉬이 어디론가 가버리지 못하게끔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리 자꾸 나를 피하는 건 내게 켕기는 게 있어서인가?”

“그게 무슨…!”

도승지가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벼르고 벼른 송현익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예를 들면, 그날 내게 한 이야길 기억하고 있어서라든지.”

“그 입 다물게!”

소스라치게 놀란 도승지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송현익을 인적이 드문 담장 뒤로 이끌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어찌 이곳에서 그런 이야길 꺼내나!”

“역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평소 서글서글하고 너그럽게 굴던 송현익이 그답지 않게 정색하며 도승지를 밀어붙였다.

“도승지, 아직 늦지 않았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바로잡아주게.”

“…무어?”

둘러가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기껏 쌓은 도승지의 신뢰를 잃을 뿐임을 알았다. 송현익은 정공법을 택했다.

“약방일기를 날조한 일 말이야. 그때 자네에게 그런 짓을 시킨 이가 누군지만….”

“닥치게!”

그러나 도리어 역효과를 내었다. 격노한 도승지는 처음 보는 얼굴로 송현익에게 윽박질렀다.

“이 순진한 작자야, 홍문관, 아니면 규장각에 틀어박혀 글만 읽으니 물정을 모르는 것이지!”

“그래. 내가 너무 몰랐네. 그러는 동안 나라를 위해 불길에 뛰어든 귀한 후학의 눈이 멀고 앞날이 어두워졌지.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선학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나?”

“그래서 나를 이용하려는 겐가? 술을 먹인 것도 친목의 목적이 아니었던 게로군!”

여전히 냉랭하게 구는 도승지에게 송현익은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사정했다.

“자네도 내게 그리 털어놓고 조금은 후련하지 않던가? 내내 괴로워했지 않나. 자네가 훌훌 털어버리도록 내가 전심으로 도울 각오가 되어있네. 자네도 겁박을 당한 것이라고 하면…!”

“그럼 그날로 내 목이 달아나겠지!”

매섭게 말허리를 자른 도승지의 눈엔 벌겋게 핏발이 선 채였다. 다시금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그는 질겁한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가 이 자리에 앉고자, 출세하려는 야망에 그런 짓을 벌인 줄 아는 겐가? 죽고 싶지 않아 그리 한 것이야. 그리고 이 자리는 보상이 아니라!”

“…….”

“억지로 안겨 준 족쇄 같은 것이네. 사실을 실토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잃게 하려는 것이라고. 더군다나 목숨을 각오한들 내 목만 달아나겠나? 내 일가친척 모두의 목숨줄이 달린 문제가 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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