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도 옷매무새를 다듬는 일은 나름대로 연습을 해 두어서 홀로 하는 것도 이제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갈 곳이 고을 너머의 청대산인데, 혹시 모르니 고을 장터를 지나는 길에 객주에 들렀다 가는 게 좋겠구나.”
물고기처럼 약한 인간이 한차례 혼절해 버린 탓일까. 청은 숲을 나서는 동안 유독 느려진 도겸의 걸음 속도에 발맞춰 주었다.
“객주? 거기는 왜?”
“전에 말한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얼마간 찾아 가는 게 좋겠지.”
“…그 무녀들에게서 신물을 돈으로 사겠다는 거야?”
왠지 비난조로 들리는 탓에 도겸은 저도 모르게 변명으로 답했다.
“가능한 한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꼭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느긋하게 걷는 동안 차츰 몸이 풀리고 머리도 개운해졌다. 어쩌면 청이 내어 준 물이 그 자체로 약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도겸은 간간이 장애물을 알려 주는 청의 지시에 착실히 따르며 지팡이를 세 번째 다리 삼아 차근차근 걸었다.
“어떤 것 같으냐?”
“뭐가?”
“내 예상과는 많이 멀어졌다만 너는 조선의 대들보나 다름없는 산맥을 넘었으니 말이다. 이 땅의 주요한 산천들을 한눈에 둘러본 셈인데 뭔가 느낀 게 없나 궁금하여서.”
저야 높은 고도의 칼바람만 실컷 맞았다만 청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르니 느끼는 바도 다르지 않을까. 무엇보다 사고의 구조와 폭이 보통의 사람과 다르다 보니 처음엔 경계의 벽이 높았지만 이제는 청의 말을 듣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하였다. 청이 파랑으로 살 때의 모든 것이.
“뭘 느껴야 해?”
그런데 청의 반응이 굉장히 건조했다. 궁금해 한 게 무안할 지경이었다.
“아니… 다양한 동물도 있고 초목도 많아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르지 않느냐.”
“동물이라면 아까 네가 조금 더 쉬자던 곳에서 본 호랑이?”
“…버, 범을 보았다고?”
흠칫 놀란 도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긴장에 피부의 잔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놀란 반응에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고 생각했는지 청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잠깐 높은 곳에 올라가 산 너머를 살피는 동안에 너를 보고 사냥하려 몸을 낮추기에 내 먹잇감이라고 했더니 포기하던데.”
“…….”
“걱정 마. 오래 굶주린 것 같아서 너 대신 산양이 있던 방향을 알려 줬으니까.”
청이 선심 쓰는 투로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다면 결코 소감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차마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 되짚어 줄 기력도 없는지라 도겸은 짧게 정리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구나.”
은연중에 머릿속으로 호랑이의 어금니가 더 클지, 용의 이빨이 더 클지를 비교해 보던 도겸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부정한 기운이 없는 건 마음에 들어. 아, 내 땅에서는 목룡이 키우는 나무들한테 공격만 당해 봤는데 여기 나무들은 달랐어. 기꺼이 딛고 가라고 해 줬으니까.”
“목룡? 나무가 살아… 움직인다고?”
간극을 좁히고자 시도한 게 역시 큰 무리였음을 깨달았다. 도겸은 다시 슬슬 어지러움을 느꼈다.
“응. 나무들 더 강하게 키워 보겠다고 내 바닷물을 훔치러 왔다가 심장이 터지긴 했지만.”
“…….”
도겸은 두 번 다시 청이 살던 땅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만 더 가면 고을의 초입이라기에 부지런히 걷던 도겸은 청의 부름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느냐?”
청이 저를 오라버니로 부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제가 느낄 수 있는 기척은 없어 청에게 슬쩍 물어보려던 차, 답이 돌아왔다.
“혹시 우리가 여기 온 것을 아는 인간들이 있나요?”
도겸은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이토록 빠른 속도로 날아오다시피 했는데 설마 누군가 따라온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제 목적지를 파악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든지. 하지만 어떤 식이든 납득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 우리의 여정에 대해 아는 이는 없다.”
하물며 집 안의 가솔들에게마저 며칠 집을 비운다고만 하지 않았나. 그의 답을 들은 청이 잠시 틈을 두고 상대를 살폈다.
“살기는 안 느껴지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하거라.”
언제든 지팡이를 둔기로 쓸 수 있게끔 단단히 쥐는데 맞은편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겸은 습관적으로 청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를 마중하기로 한 이는 없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저희는 성수청의 무녀들입니다.”
뜻밖의 답이었다. 혹시 거짓말로 유인하려는 것일지도 몰라 가늠해 보려는 도겸에게 여인이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두 분께서는, 나머지 신물의 조각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엔 묘하게도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꼭.
“나머지라니, 우리는….”
“오라버니.”
그때 청이 도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모님의 유품이, 우리가 찾던 신물의 일부인 것 같아요.”
“뭐?”
“저 사람이 그 돌의 나머지 반쪽을 들고 있거든요.”
그리고 도겸은 곧 아주 당혹스러운 사실과 직면해야 했다.
***
도겸과 청은 무녀들의 거처로 안내 받았다. 으슥한 산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을 안에 있는 평범한 초가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 안에서는 유난히 향을 피우는 냄새가 짙게 났다.
“아씨께서는 사람이 아니시지요.”
그런데 앉자마자 국무라는 자가 하는 말이 거침이 없는지라, 도겸은 놀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소 애를 써야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청이 힘을 써서 샘솟게 한 물을 제가 마시는 모습을 본 것인가. 그러기엔 청이 못 알아차릴 리 없지 않나.
그것도 아니면 사람이 아닌 게 관상에 드러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찌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지만 그럼에도 도겸은 문인이자 규장각의 각신이었다. 오랜 학습으로 형성된, 증명된 지식을 습득하려는 본능이 무격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 도겸을 국무가 차분히 설득했다.
“소인은 이미 꿈으로 보아 알고 있으니 편히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나리.”
어려웠다. 아직은 목소리만 듣고 상대의 의중을 읽어 낼 능력이 되지 않기에,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도겸은 평소보다 더 냉랭하게 어조를 낮췄다.
“그 꿈에 내가 들어가 본 것이 아니지 않나.”
“제게 뒷배란 주상 전하뿐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막힘없이 답하던 국무가 나직이 덧붙였다.
“전하를 모시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것은 나리께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
“거기다 감히 신물을 두고 성수청의 국무라는 자가 가벼이 입을 놀릴 수는 없겠지요.”
계속 말을 아끼고 숨겨서는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이쪽에서 부탁 아닌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오던 길이 아닌가.
“…자네 말이 맞네.”
한편으로는 그동안 누군가를 처음 만나자마자 벽을 세우며 조심스럽게 굴지 않았건만, 이토록 믿지 못하고 날카로워진 게 한탄스럽기도 했다. 도겸은 혹시 국무가 조익환의 사람이 아닐까 걱정한 것까지 들키진 않았길 바랐다.
“그럼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올 것도 꿈에서 본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아씨께서 사람이 아니신 것을 안 건 처음 이 땅에 오시던 날 밤의 부용지를 보았기 때문이지요. 두 분이 격렬히 몸싸움을 벌이지 않으셨습니까?”
“…….”
도겸은 할 수만 있다면 일각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구태여 청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험한 일을 겪었던 그날 일을 국무의 입을 통해 다시 들어 상기하는 일은 없지 않았겠나. 무던하게 굴고 싶었으나 안면에 열이 오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크흠, 그… 나는 전대 국무였다던 자를 만난 적이 있네.”
“제 신어머니 되시는 분이지요. 그분이 이생을 떠나시던 날, 또한 제 꿈에 오셔서 우리의 과업을 완수해 줄 귀인이 이 땅에 나리셨으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 일러 주셨습니다.”
“그럼 이게 뭔지 알아?”
국무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니 인두겁을 쓸 필요도 없다 판단한 청이 대뜸 물었다. 국무는 고저 없는 어조로 담담히 답했다.
“가락지군요. 저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신모님께 그런 생김새의 신물이 있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안쪽에 새겨진 각인이라 하였지요.”
“그건 확인할 수 없어. 빠지지 않으니까. 손가락을 자르려 했더니 심장이 깨질 것 같아서 반쯤 자르다 포기했고.”
“그렇다면 제가 아는 것이 맞군요. 그 각인이 사용자로 하여금 죽기 전엔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들었습니다. 또한 겉보기엔 단순히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도 전혀 흠집이 생기지 않는다던데, 아셨습니까?”
“…맞는 것 같아. 이 손으로 집을 부순 적이 있는데 네 말대로 반지는 전혀 상하지 않았으니까.”
도겸은 제 두 귀를 의심했다. 손가락을 자르다니, 조익환의 집을 부순 일은 그러려니 했지만 스스로의 몸을 해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결손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지만 자신의 몸을 직접 상하게 만드는 일과는 다른 문제지 않나.
그러나 제가 납득하지 못한다고 심오하게 이어지는 대화를 방해할 순 없었다. 도겸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역시 이것이 확실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녀가 뭔가를 꺼냈지만 도겸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도겸을 배려한 국무가 설명을 더했다.
“아까 말씀드린 신물의 조각 말입니다. 아씨께서 남은 반쪽을 가지고 계시지요?”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