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은 나무가 아니냐. 흔히 벼락 맞은 감태목을 연수목이라고도 하는데, 지니고 있으면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고도 한다.”
도겸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슬픈 눈으로 미소 지었다.
“…저하께서는, 내가 부디 오래 살아주길 바라신 게다.”
청은 그런 도겸의 감정에 동조할 수 없었다.
“너.”
“음?”
더 솔직히는 태연하게 본심을 숨기는 도겸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독약 먹은 거라며.”
무리하게 힘을 쓰면 이제는 최도겸이 죽기도 전에 제 심장이 먼저 터져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전처럼 쉽사리 흥분해서는 안 됐지만, 그럼에도 최도겸이 저와의 약속을 잊고 있다면 분명히 상기시켜 줄 만큼의 힘을 쓸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때 독약 먹고 죽어 버리면 나는?”
“…….”
“나는 어떡하려고 했는데?”
예를 들자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얼음에 가두어 시린 추위를 뼈에 새기게 해 준다든가.
“걱정 말거라.”
그런데 도겸이 미안하다거나,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뭘?”
“내가 이 땅에서 너를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야… 네가 책을 많이 읽어서?”
“아니다. 그렇게 따질 것 같으면 일찍이 세자 저하께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겠지. 그게 아니라 한들 나보다 더 학식이 풍부한 이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럼 뭔데?”
청이 답을 알 리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아는 게 많을 거라 생각한 게 전부였으니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청에게 도겸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을 내어 주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충분히 너를 돌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러나 청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
청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여의주를 잃은 이무기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물의 신물을 찾으러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도겸의 눈이 멀어 버린지라 당장은 무리였다. 이에 도겸은 짧은 시간의 말미를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준비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과정은 아마도 마음의 준비였을 것이다.
“처, 청아… 조금만, 조금만 쉬어 가지 않겠느냐!”
충분히 각오했고, 각오한 만큼 최대한 견뎠으나 결국 도겸이 두 손 들어 항복했다. 간신히 꺼낸 말에 청이 곧장 도겸을 내려주었다.
“최대한 빨리 신물 찾아서 돌아가자며.”
“…안다.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쉬자꾸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성수청의 무녀들이 머물고 있는 동해의 청대산까지 서둘러 다녀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하나였다.
바로 일전에 경험해 본 바 있는 청의 힘이었다. 말을 탈 수도 없는 데다 지름길을 통하고자 험준한 산맥을 연달아 넘어야 했기에 대안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나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가르며 날듯이 산을 탔는지, 중간 즈음에 혼을 두고 온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됐다. 아마도 어느 골짜기 아래로 뚝 떨어질 때 떨어트린 게 아닐까.
“그건 왜 씹는 거야?”
급한 대로 미리 준비해 온 솔잎을 씹는 도겸에게 청이 의아한 듯 물었다.
“멀미에 효험이 있어 그러는 것이다.”
“멀미?”
“몸이 격렬히 흔들려 가볍게 생기는 이런저런 증상인데….”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을 맺기도 전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이럴 줄 알고 아침도 거르고 나왔건만, 그대로 있다간 위장에 든 것이 아닌 위장 자체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도겸은 다급히 봇짐에서 매실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물론 즉각적인 효험은 없었다.
“…가볍게 생기는 증상 맞아?”
청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도겸은 못 들은 척 속을 가라앉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앞이 보이질 않으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너는 지치지 않았느냐?”
“나?”
되묻는 청의 손끝엔 작은 산새가 앉아 있었지만, 도겸은 보지 못했다.
“목이 좀 마르긴 한데… 괜찮아.”
“괜찮다고?”
당연히 물을 찾을 듯하여 봇짐에서 수통을 꺼내던 도겸이 멈칫했다.
“응.”
“네가 찾을까 하여 샘물을 가져왔는데.”
“난 됐어. 산이 습하고 정기가 나쁘지 않아서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물을 거절하는 청을 처음 보는 도겸은 순간 울렁거리는 것도 잊을 만큼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그…렇구나.”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나머지 감각에 의존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거기엔 상대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도 포함이었다. 늘 냉랭하다 느꼈던 청의 어조는 부쩍 한기가 가신 듯했다.
꼭 우수가 지나고 살살 녹아드는 봄이 찾아든 것처럼.
“저 너머에 고을이 있는 것 같아.”
긴가민가한 생각에 잠긴 그 잠깐 틈에 근방의 높은 나무 꼭대기 위로 훌쩍 다녀온 청이 일러 주었다. 도겸은 즉각 반응했다.
“고을?”
“지도상으로는 맞게 온 것 같아. 멀지 않은 곳에서 큰물의 기운도 느껴지고.”
“그러니까 네 말은….”
“응. 다 왔다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본 도겸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재차 확인했다.
“청아. 지금 해가 어디쯤에 있느냐? 물 내음이 나는 곳을 동쪽이라 생각하면 된다.”
“…아직 사시(오전 9시-오전 11시) 전인 것 같은데.”
시각을 듣자마자 왠지 구토감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파루가 치고 신각(해가 뜰 무렵) 즈음에 한양에서 출발하여 동해 근처까지 오는 데 겨우 한 시진이 조금 넘게 걸린 셈이었다. 어찌 하루 안에 목적지에 닿아도 일을 보고 돌아가는 데까지 며칠은 걸리리라 계산하고 있던 터라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오래 말을 타도 전혀 멀미를 하지 않았건만 이토록 속이 불편한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됐다. 혼절하지 않은 게 도리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나를 놀라게 할 참이냐, 응?”
“뭐가?”
“우리가 겨우 한 시진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동해에 당도하였다는 말을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제 입으로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데 청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네가 죽어 가길래 쉬엄쉬엄 온 거야. 성체로 날아왔다면 일각이면 충분했을걸.”
“…그것참, 오늘 몰라도 될 것을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 같구나.”
신물을 찾아주겠다는 말을 괜히 한 건 아닐까. 힘없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도겸은 잠시 후회했지만 이내 옷을 털고 일어났다.
“길이 험하지 않다면 여기부터는 조금만 걸어도 되겠느냐?”
“무슨 소리야.”
청이 도겸의 허리를 덥석 감아 안았다.
“여기 길 없는 거 잊었어? 너 열 보만 더 걸었다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텐데.”
“그, 그럼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가면? 주변 경관도 좀 천천히 봐 가면서…!”
“난 충분히 보면서 왔어.”
그러나 잊고 있던 게 있다면, 용의 인내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은 청이 도겸을 안고 힘껏 도약했다.
그의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직전까지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엔 자잘한 낙엽 이파리들만 한차례 공중을 부유하다 가라앉았다.
나뭇가지에 앉은 산새는 아무것도 못 본 듯이 유유히 깃털만 정리할 뿐이었다.
***
“최도겸, 일어나.”
“…….”
“안 죽은 거 알아. 일어나.”
동해에 다다를 때까지 간신히 버텼지만 예고도 없이 가파른 절벽에서 뚝 떨어질 즈음, 기어이 맥을 놔 버린 터라 도겸은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물에 좀 담갔다 꺼내면 일어나려나?”
간신히 눈을 떴지만 여전히 시야는 암전된 채였다. 도겸은 이대로 더 자 버리고 싶었지만, 청이 빈말을 할 용은 아닌지라 그는 간신히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설마 저승에 도착한 것이냐?”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어딘가 한 군데는 떨어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여겼지만 다행히 사지육신은 멀쩡했다. 그저 경이로운 속도로 뛰어올 적에 날카롭게 스친 산중의 공기 때문에 뺨이 가볍게 아린 정도였다.
“이 숲만 나가면 사람들이 사는 곳인 것 같은데 뭐, 거기까지 가고 싶다면 보내줄 수도 있고.”
“…네 심오한 배려에 눈물이 다 나는구나.”
봇짐을 찾아 물을 마시려는데 미처 단단히 챙기지 못했는지 남은 것은 어깨끈과 꽉 움켜쥐고 온 지팡이뿐이었다. 기가 찼다. 짐은 모두 잃었지만 그나마 지팡이라도 지켜 다행이라 여겼다.
아니면, 언이 준 지팡이 덕에 이 무지막지한 여정 중에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물 마시고 싶어?”
“아까 야무지게 마셔 둘 것을 그랬지.”
목을 축이지 못한 기갈에 잔기침을 하는데 청이 자박이며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곤 도겸의 두 손을 받쳐 모으게 했다.
“자, 마셔.”
느닷없는 명령에 의아할 즈음 갑자기 제 손안이 차갑게 젖어 들었다.
“……!”
눈을 잃고 나서 처음엔 청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웠다면, 두 번째는 아마 지금일 것이다. 물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 곳에서 제 손 안에 물이 채워지고 있는 탓이었다.
실로 놀라운 이 광경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설마, 힘을 쓰는 것이냐?”
“걱정 마. 어쩐지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무어?”
그리고 이번에도 청은 양 조절에 실패했다. 차갑고 축축한 액체가 금세 둥글게 모은 두 손 밖으로 넘쳐 버린 탓에 도겸은 다급히 입술을 대어 물을 들이켜야 했다.
찢어질 듯 괴롭던 목구멍이 시원하게 젖어 들었다. 어찌나 극심한 갈증이었는지 해소되기 시작하자 흉부 전체가 시원해졌다.
가슴이 탁 트이는 해방감에 도겸은 절로 웃음이 났다.
“…고맙구나. 이리 다디단 물이 있음을 태어나 처음 알게 되었어.”
“…….”
순수한 감탄에 어쩐지 청은 답하지 않고 홱 일어나 멀어졌다.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신물을 찾아 나선 길인지라 그런지 청은 다소 조급해 보였다. 이해 못 할 일이 아닌지라 도겸은 잠자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