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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09)화 (94/197)

겹겹이 껴입는 옷 밖으로 드러나는 손이나 팔등에 생긴 상처들이 눈에 띄기도 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 쪽에서 쿵쿵하고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 며칠, 도겸에게서는 항상 피 냄새가 났다. 그것 말고도 도겸이 어떻게 변했더라… 청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리고… 나한테 매일 책 읽기를 부탁해. 어제는 뭐, ‘중용’을 읽어 달라고 하던데. 가르침이라 핑계 대는데 그냥 본인이 읽고 싶은 것 같았고.”

“흠….”

가만 듣던 언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녀석에게 전해 주겠느냐?”

그러다 느닷없이 창가 옆에 두었던 것을 안쪽의 청에게 넘겨주었다. 얼결에 길쭉한 나무 몽둥이를 받은 청은 물건의 생김새를 살피며 물었다.

“뭐야. 목도로 쓰라는 거야?”

묻기가 바쁘게 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천변에서 네가 갓끈을 휘두르는 무기로 쓰려 할 때부터 알아봤다만, 어찌 그리 물건을 험하게만 쓰려 하느냐?”

“여기 와서 처음 만난 인간도 부채를 무기로 쓰던데 뭘.”

“뭐?”

언이 황당해했지만 청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 부용지에서 도겸을 만나던 날, 제 얼음창을 깨부순 얇고 작은 막대가 다름 아닌 접은 부채였음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탓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 얼음의 밀도가 약해서였다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부채를 두고 굉장히 강한 무기라 여기며 적잖이 긴장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이게 뭐냐니까?”

“지난번 뚝섬에 연달아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더냐. 그때 벼락을 맞은 감태나무로 만든 지팡이다. 이렇게….”

도로 막대기를 가져간 언이 나무가 둥글게 굽어진 부분을 잡고 길게 세워 바닥을 짚어 보였다.

“바닥을 짚어 중심을 잡거나 주변을 가볍게 두드려 장애물이 없는지 미리 확인하는 용도지. 이걸 사용하면 녀석이 덜 다칠 수 있을 게다. 네가 좀 전해다오.”

듣고 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인간들에겐 무조건 필요할 것 같았다. 다시 지팡이를 받아 든 청이 부채를 부치는 언에게 물었다.

“그럼 세자 저하는 누가 굽어살펴 주는데?”

“이 몸이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수많은 궁인들이….”

느긋하게 부채질하던 언이 가볍게 돌아보았고, 청은 그 시선을 붙들었다.

“너도 안 보이긴 마찬가지잖아.”

“…….”

언의 잔잔한 미소가 그치고 부채질이 멎었다. 잠시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던 언이 이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네 눈은 속일 수가 없구나. 그래도 안 보인다고 해 버리면 억울하지 않느냐? 난 그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뿐인데.”

처음 천변에서 제 푸른 머리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때부터 알아보았다. 청은 어쩌면 언이 그래서 야행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밤은 모든 것이 공평하게 어둠에 잠기는 시간이지 않나.

“최도겸은 모르는 것 같던데.”

“무어, 아무리 막역한 벗이라 하여도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씩은 있는 법이지.”

비밀을 들킨 언은 창틀이 아닌 창밖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늘 나를 염려하는 녀석인데 걱정거리를 하나 더 얹어 주어서야 쓰나.”

그의 후련한 얼굴을 보며 청은 도겸을 생각했다. 눈이 먼 도겸의 편안한 얼굴이 지금의 언과 상당히 닮아 있는 탓이었다.

“내 입으로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니 계속 지켜 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언의 나직한 확인에 청은 눈만 깜빡이는 다소 불경한 답을 주었다. 그럼에도 청이 믿음직했는지 언은 두 번 강조하지 않았다.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모두가 알았겠지.”

대신 나름의 사정을 설명했다.

“두 번째로 맞이했던 빈을 또 잃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던가.”

“…….”

“그래서 최도겸 저 녀석이 눈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몰라. 겨우 색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내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데 하물며 녀석은….”

말을 잇던 언이 어딘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곤 청을 보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청이 그게 무어냐 물으려던 차, 언이 중문 쪽을 가리켰다.

“청아, 어디 있느냐?”

창틀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도겸이었다.

언은 아주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찌 알아차리지 못했냐며 청을 질책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도겸이 사랑을 나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질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 자유이지 않나. 청은 언을 향해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청아.”

“…….”

“…….”

언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 번 가리키고, 도겸이 오는 방향과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가리키고 지팡이를 가리키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 눌렀다.

“어디 있느냐. 물에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 볼 것인데 지팡이의 출처가 자신이라는 건 밝히지 말라는 의미였다. 언이 재차 청의 입을 단속시키고는 도겸이 더 다가오기 전에 살금살금 창가에서 사라졌다.

“지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려 하는데….”

“그런 거라면 순이를 보낼 것이지, 뭐하러 직접 와?”

오늘따라 규방에 사내의 출입이 잦았다. 청의 마뜩잖은 어조를 알아차린 도겸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쩡한 두 다리를 그냥 놀려서야 쓰나. 보아라, 여기 오는 동안은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상체를 길게 뺀 청은 아직 언이 담벼락 안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벗이 못내 안쓰러운 듯 침울하게 지켜보던 세자는 이내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부쩍 청력에 민감해진 도겸이 용케 놓치지 않고 바짝 긴장했다.

“…누가 있는 것이냐?”

“뭐, 방금 새 날아간 거 말하는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담을 넘는 세자 때문에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정신없이 푸드덕대며 날아갔으니까.

“새 날갯짓 소리가 꽤나 둔탁하구나.”

도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은 모른 척 화제를 전환했다.

“네가 올래, 내가 갈까?”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갈 테니.”

도겸은 주저하지 않고 순수한 제 감각에만 의존하며 안채 건물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디딤돌을 딛고 안채 마루 위로 올라오는 동안엔 약간 휘청하며 아슬아슬했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

“너는 왜.”

청은 부쩍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겸에게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지팡이를 안 써?”

느닷없는 물음에 도겸은 멍한 눈을 두어 번 끔벅이며 천천히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야… 최대한 직접 겪어 두려는 것이지. 적어도 집 안에서 만큼은 무언가에 도움 없이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두 번 눈 멀었다간 남아나는 곳이 없겠네.”

역시 이 땅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던 순이의 자랑은 순 허풍이 분명했다. 청의 눈에는 온몸에 상처를 달고도 도움을 바라지 않는 도겸이 이 땅에서 제일로 모자라 보였다.

“걱정 말거라. 잔 상처들이야 금방 낫는 것들이니.”

“누가 걱정한대? 받기나 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대뜸 품에 안겨 주자 도겸이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깜짝 놀랐다.

“이게 무엇이냐?”

“뭐 같아?”

답을 알려 주지 않아도 도겸은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지팡이를 손끝으로 읽어 냈다. 가시 하나 남지 않게 정리했다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것처럼 시커먼 무늬가 남은 독특한 나무였다.

실컷 만져 보고, 나무의 향까지 맡아 본 도겸은 머지않아 스스로 답을 구했다.

“…감태나무로 만든 지팡이구나. 이게 어디서 난 것이냐?”

청은 진실을 요구하는 도겸과 간곡히 비밀을 엄수하길 부탁하던 세자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다.

“주웠어.”

방으로 언이 넘겨준 것을 주웠으니, 어쨌든 주운 것도 맞았다. 하지만 다소 왜곡된 진실을 도겸이 믿을 리 없었다.

“…혹 저하께서 다녀가신 것이냐?”

오히려 농락하는 청을 혼쭐내듯 정곡을 푹 찌르는 게 아닌가. 불시에 당한 청의 눈이 약간 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혹시 눈을 뜬 건가 싶어 살폈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저하께서 항상 차고 다니시는 향갑이 있는데, 은연중에 그 향목의 냄새가 나는 듯하여 말이지.”

아마 도겸은 보지 못하겠지만 청은 상당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눈앞의 사내는 눈이 멀어 버린 대신 다른 감각들이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발달해 버린 게 아닐까. 어떻게 흩어지고 없는 냄새까지 파악한단 말인가.

어쩌면 도겸이 정말 비범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여기던 차였다. 도겸이 대뜸 씩 웃으며 청을 놀렸다.

“…설마 내 말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뭐?”

“농이다. 나는 그저 이 지팡이를 보고 알아차린 것뿐이니 말이야.”

“…….”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다. 두 번 놀렸다간 눈 뜨고 비늘이 뽑히게 생겼다. 어쩌면 남산댁의 칭찬에 정말 조선 사람이 된 듯 우쭐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이 먼 조선 사람보다야 아직 한참 부족한 게 당연한 것을.

청은 어쭙잖은 거짓말 따위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세자가 준 건 맞는데, 그 지팡이를 만져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거야?”

이렇게 빨리 들킬 거면 뭐하러 세자는 대낮에 월담까지 하여 몰래 지팡이를 건네준 것인가. 괜히 언의 거짓말에 동조한 청까지 쓸데없이 무안해졌다. 청은 다음에 언을 만나면 반드시 보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도겸의 대답이 의외였다.

“감태의 향이 짙지만 약간은 탄 냄새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벼락을 맞은 감태목이 아닐까 하였지. 얼마 전 벼락이 떨어진 뚝섬에서 구하기가 쉬웠을 테고… 감히 왕실 소유의 사냥터에서 벌목을 할 수 있는 이가 달리 누가 있겠느냐.”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언은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는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준 것이다.

“뭐야. 들킬 걸 알면서 준 건 그럼, 생색내는 거였어?”

청이 투덜댔지만 도겸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니, 아마 그보다 더 깊은 뜻을 담아 주신 것이겠지.”

“무슨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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