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08)화 (93/197)

쓰고 보니 가장 그럴싸했다. 이 땅에 온 이유도 가늠이 되지 않나. 뭔가 하늘에서 죄를 지어 힘을 잃고 이 땅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거나.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마침 최도겸의 집에 갔다 낯익은 얼굴도 보지 않았나. 불행 중 다행으로 솟아날 구멍이 보였다.

조익환은 끈질기게 살아난 최도겸에게 행운은 거기까지였음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느꼈다.

“…그러려면, 우선 팔다리부터 잘라야겠지.”

적어 둔 것들을 잘 접은 그가 종이 끄트머리에 촛불을 붙여 태웠다. 다시 설계한 거미줄이 머릿속에 일사천리로 정교하게 그려졌다.

포식자는 이제 다시 사냥을 시작할 때였다.

***

“뭔가 이상하구나.”

손바닥에 올려 둔 돌이 스스로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 도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것이냐?”

아마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점차 진동이 커지고 있었으니까.

“…돌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뭐?”

혹시 돌을 놓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도겸이 서둘러 다른 손으로 돌을 든 손을 덮었다.

“정말이구나. 참으로 돌이 움직이고 있어.”

돌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청이 나직이 물었다.

“혹시 전에도 돌이 그렇게 떨리는 걸 본 적이 있어?”

“아니… 단 한 번도.”

“유품이라는 거 말고 아는 건 없고?”

“글쎄다….”

“넌 다른 건 다 알면서 왜 정작 이 중요한 걸 몰라?”

느닷없이 무지함을 질책당한 도겸이 억울한 표정을 했다.

“어찌 내게 용의 기준을 들이민단 말이냐? 당연히 모르는 것도 있지.”

직전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면 돌이 저렇게 진동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뭔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또한 그것이 그동안 매일 신알례를 했다는 도겸은 아닐 터였다.

청은 조심스레 도겸의 손을 잡아 벌렸다. 그리고 안달이라도 난 듯이 바르르 떠는 하얀 돌을 읽어 내려 애썼다.

직접 이 이상한 돌을 만져 보기 전에 마지막까지 부정한 기운이 서려 있진 않은지 확인해야 했다. 어쩐지 돌과 한바탕 눈싸움을 벌이는 동안 돌의 떨림이 더 커지는 듯도 했다.

그런데 딱히 부정한 기운이라기보다는 직전보다 더 머릿속의 안개가 개고 맑아지는 기분이 강해졌다. 직감이 저 돌을 취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 땅에 온 뒤로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제대로 만나 보지 못한 탓이었다. 어쩌면 술과 같이 물처럼 생겨서 속을 더 뜨겁게 만드는 기이한 독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심장이 약해진 상태라 청은 극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겸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심장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하루 빨리 제가 만든 바다로 돌아가 깊은 잠에 들어야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합쳐져 기어이 청의 입에서 불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땅에 이상한 건 내가 처음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져 보지 않고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운지라, 청은 도겸을 흘겨보며 드디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신물에, 이무기에, 말도 안 되게 악랄한 인간에, 이상한 돌에… 뭐가 이렇게 많은데?”

“그래서 나도 퍽 난감해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구나.”

그리고 마침내 청의 손끝이 매끈한 돌에 닿았다.

“…….”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것 없다던 도겸이었지만 한참이나 말이 없는 청이 이상했는지 결국 먼저 정적을 깼다.

“청아.”

“…응.”

“괜찮은 것이냐?”

“아니.”

“뭐? 무어,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이냐?”

돌을 제 손으로 가져와 내려다보던 청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

“뭐? 무슨 일이! …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감수할 자세로 주먹을 불끈 쥐던 도겸이 헛숨을 들이켜고 작게 기침했다.

와중에도 청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돌이 움직이지 않아.”

하얀 손바닥 위에 놓인 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내 손이 닿은 직후부터.”

꼭 무섭게 진동하는 것을 본 게 꿈이었던 것처럼.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이 있었다지만 청이 간택에 든다는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남산댁은 전보다 강도 높은 수업을 진행했다.

신물을 찾으러 가기 전, 도겸이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여 하루 이틀의 말미를 더 양보한 틈을 놓치지 않고 남산댁은 야무지게 수업을 강행했다.

막바지에 다다른 교육의 주된 내용은 ‘위화감 줄이기’였다. 수업은 행동 교정보다는 직접 대화를 나누며 묘하게 어긋나는 점들을 조율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수업 때마다 물을 향긋하게 우려내는 다도를 배우니 집중하는 청의 자세가 남다르기도 했다.

“이제는 저도 문득문득 잊게 되는군요.”

쓰고 난 다기를 정리하던 남산댁이 칭찬의 말을 건넸다.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문갑에 기대어 녹아내릴 듯이 늘어진 청은 눈만 들어 의아함을 드러냈다.

“아씨가 사람이 아니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겠지만 이제는 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러든 저러든 파랑은 파랑이다. 도겸이 청이라 이름 붙이고 인격을 부여해 준 존재 또한 제 일부임을 인정하고 나니 그다지 거리낄 것도 없었다.

“지금 나 잘 가르쳤다고 생색내는 거야?”

“예?”

“그게 아니면 뭐 하러 구별하려 하지?”

“아….”

남산댁이 허를 찔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시원스러운 태도로 납득했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허리 숙여 인사한 남산댁이 조용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더 이상 귀찮게 할 사람이 없어 청은 방해 받지 않고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로 와 닿는 공기의 온도가 한결 높아졌음이 느껴졌다. 코로 들이치는 냄새도 훨씬 풍부해졌다. 거기다 눈에 보이는 것들도 다채롭게 색을 더해 갔다.

겨울잠을 자듯 조용하던 초목들이 부지런히 꽃을 피우며 이래저래 말이 많아진 탓에 귀까지 소란스러웠다.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주의를 줘도 소용없었다. 부러트리거나 뽑아내면 더 시끄러울 것을 알기에 청은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사실 물속이 아닌 곳에서 고요하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욕심이었다.

“흐음….”

귀를 닫고 다시 턱을 괴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청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샘에 이는 잔물결이 아닌 창으로 들어오는 광경 전체를 바라보고 있음을. 청은 전보다 넓어진 시야로 안마당의 정경에 담긴 모든 요소들을 하나씩 음미했다.

샘과 꽃나무, 돌을 쌓아 기와를 올린 담벼락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들까지. 이곳에 익숙해진 건지는 몰라도 왠지 하나하나가 꼭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편하지?”

반지의 힘이 약해진 건지, 살얼음처럼 약해진 심장이 회복된 것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제법 상상쾌했으며 날카롭기만 하던 신경도 무뎌졌다.

말이 되질 않았다. 무녀들의 위치를 찾았다는 도겸을 당장 들고 뛰어도 부족할 만큼 급하지 않나.

준비는 무슨 준비냐며 들들 볶으며 쓸모없어진 눈알을 하나씩 파서 먹어 버리겠다 협박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왜 저는 이렇게 느긋하기만 하냔 말이다.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청은 쏟아진 물처럼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갑작스레 몸 상태가 나아진 원인이라면 하나였다. 청은 다시금 저고리 속을 뒤져 부드럽고 시원한 감촉의 돌을 꺼냈다.

어머니의 유품이라 했지만 가져도 되냐는 청의 물음에 도겸은 흔쾌히 허락했다. 하얀 돌은 미동도 없이 얌전히 손바닥에 올라 청의 매서운 시선을 받아 냈다.

이참에 한번 힘을 써 볼까. 샘물을 향해 손을 뻗었던 청이 다음 순간 팔을 늘어트리며 어딘가를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다신 보지 않겠다고 큰소리치고 가지 않았었나?”

“크흠, 그게 너는 아니었지 않느냐.”

잠시 뒤 창문 밖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이는 다름 아닌 언이었다. 오랜만에 누리던 평화를 방해 받은 청은 쉽게 그를 반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라는 사람이 월담을 해?”

“그야….”

부채를 펼친 언이 살갑게 웃으며 청이 내다보던 창틀에 걸터앉았다.

“대문으로 들어오면 행랑아범이 우렁차게 소리를 치며 맞이하지 않나. 그럼 사랑까지 들릴 게 뻔한데 나도 체면이 있지.”

“이 땅의 외간 남자들은 규방에 함부로 발을 들여선 안 된다던데.”

청은 팔을 괴며 비뚜름한 시선으로 언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함부로 남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세자가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그것도 해가 저렇게 버젓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간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언이 뜨끔 하는 게 보였다. 그의 부채질이 강해졌다.

“아주 잠시 나온 것이다, 잠시. 그리고 잠행은 원래 ‘설마 이런 시각에 나가겠어?’ 싶은 시간에 나가야 들어가서도 안 나간 사람처럼 뻔뻔하게 굴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런 거 배우고 싶대?”

“거참, 오늘따라 그 입술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구나.”

언이 서운하다는 투로 투덜대며 돌아앉았다.

“그리 돌아가긴 했지만 어찌 단박에 연을 끊겠느냐. 설령 끊는다 한들 녀석은 또한 나의 백성이니 굽어살피며 세자로서 할 일을 해야지.”

“할 일?”

“녀석의 안위를 두루 들여다보며 보살피는 것이다. 녀석은 그 뒤로 좀 어떠했느냐?”

“당연히 여기저기 부딪치고 자주 넘어지고 있지.”

고작 며칠 사이에 도겸은 어디서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전신에 이런저런 울혈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옷을 벗겨 보지 않아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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