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거기에 가면 향을 올리거든.”
허리에 띠를 두른 도겸이 여러 색의 실로 꼬아 만든 끈을 천천히 여미어 매무새를 다잡았다. 그런데 옷을 어떻게 걸친 것인지 한참의 시간이 걸린 게 무색했다.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몸을 움직인 청이 직접 매무새를 다잡아 주었다. 도겸이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리도 단정치 못한 것이냐?”
“응.”
청은 다시 대대를 풀어 안쪽 옷부터 제대로 만져 주었다. 물론 청도 직접 누군가의 옷매무새를 잡아 주는 건 처음인지라 애초에 도겸이 입었던 모양새와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청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어쩐지 도겸의 심장 소리가 커진 듯했지만 이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니 그러려니 하는 생각과 함께였다.
“이리 네가 내 매무새를 만져 주니 꼭 뒤바뀐 것 같구나.”
“뭐가?”
“네가 처음 이곳에 왔을 즈음의 나와 너의 입장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는 거리를 좁히기만 하면 펄쩍 뛰며 화를 냈지 않나. 혹시 지금도 화가 나는데 참는 건가 싶어 슬쩍 표정을 살폈지만 도겸의 얼굴엔 딱히 떠오른 표정이 없었다.
마음의 창이라는 눈이 닫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잠깐 고민하던 청이 다시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도겸이 습관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려다 아차 하며 청에게 물었다.
“된 것이냐?”
“뭐… 대충.”
청이 뻔뻔하게 굴고 있음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도겸이 순수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그럼 다시 가 볼까.”
그런데 다시 팔을 넓게 벌리고 개미처럼 주춤주춤 기어가려 하기에, 청이 도겸의 손 하나를 잡아다가 제 팔에 올려놓았다.
“혼자 익히는 게 편한 건 알겠는데 기다리기 지루하단 말이야.”
“…그래. 그럼 부탁 좀 하자꾸나.”
“한 걸음만 걸어 봐.”
청의 명령에 도겸이 별말 없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눈대중으로 문까지 걸음 수를 계산한 청이 시원시원하게 앞을 밝혀 주었다.
“4보면 문이야.”
그 말에 도겸은 사방을 경계하듯 들고 있던 팔을 내리고 청이 하라는 대로 쭉쭉 나아갔다. 네 걸음 뒤에 손을 들어 더듬어 보니 정말 바로 앞에 문이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서 이만큼만 몸을 틀고 다시 4보면 마루 끝이고.”
자로 잰 듯 정확한 보폭 계산이 딱딱 맞아떨어지자 모호한 것보다 답이 시원시원하게 도출되는 것을 좋아하는 도겸도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마루 끝에 앉아서는 스스로 신발을 신고, 다시 청이 말하는 대로 계단을 내려와 사랑채 뒤편으로 향했다.
“어차피 안 보이는데 불은 왜?”
중간에 행랑아범이 이곳저곳에 밝혀둔 등을 하나 찾아가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청은 달갑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에 끼워진 불의 신물이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등불은 새벽녘에도 꺼지지 않고 곧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겸은 조심스레 등을 챙겨 들었다.
“내게 필요한 게 아니라 인사를 드릴 어른들께 필요한 것이다.”
등을 찾은 곳으로부터 사당까지는 다시 수십 보였다. 서촌에서 가장 큰 저택답게 도겸의 집은 꽤나 넓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란히 걸어 둘은 공기의 흐름마저 멎은 듯 저택의 동북쪽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적요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뭐지.”
건물 앞에 선 청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어둡고 음침한 장소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시원하고 편안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여기야?”
“그래. 바로 이곳이 사당이다. 냄새만 맡아도 제대로 온 것을 알겠구나.”
청의 팔을 놓은 도겸이 스스로 계단을 오르고 문을 더듬어 열었다. 문이 열리며 삐걱이는 소음에 청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향냄새에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소자, 너무 오랜 시간 문안 인사를 여쭙지 못했습니다.”
외문의 문턱을 발끝으로 인지한 도겸이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넘어 들어갔다. 팔을 잡고 있지 않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던 것과 달리 차분한 태도는 이곳에 숱하게 와 보았음이 어렵지 않게 짐작될 만큼 자연스러웠다. 발을 걷어 올린 뒤 감실의 문을 열고,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는 것도 느리긴 하지만 꿋꿋하게 해냈다.
부모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신경 쓰고 있음을, 청은 알지 못했다.
“…불효에 대한 죗값은 다시 뵐 때 모두 치르겠습니다.”
두 번 절을 올려 재배한 도겸이 청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전에 말씀드린 아이입니다.”
그런데 무어라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툭 내놓는 것이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귀 기울여 들어 둘걸.
청은 도겸이 저를 무어라 설명했을지 궁금했지만 우선 멀뚱하게 있기보다는 남산댁에게서 배운 대로 재배하는 쪽을 택했다. 배울 때만 해도 써먹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실전의 기회가 빨리 찾아온 셈이었다.
절을 올리고 일어나 향탁 위에 놓인 것들을 무심히 둘러보는데, 뭔가가 청의 눈에 띈 것은 그때였다.
“저게 뭐야?”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물건들 틈에 뭔가 하나가 이질적으로 보인 탓이었다.
“음? 신주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 구멍 뚫린 하얗고 작은 돌인데….”
“작은 돌? …아.”
가만 기억을 되짚던 도겸이 조심스레 향탁 위를 더듬어 문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이것은 어머니의 유품이다. 돌아가실 때 몸에 지니고 계셨던 것이라 소중한 물건인가 하여 이곳에 함께 모셔 둔 게지.”
그의 설명을 듣던 청의 눈이 커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돌이 건드리지도 않았건만 홀로 바르르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
북촌 저택의 반 이상이 완전히 파괴되는 바람에 조익환은 별수 없이 북촌에 구입해 둔 다른 기와집으로 옮겨야 했다.
혹시 몰라 은닉해 둔 재산이 워낙 많기에 따지고 보면 큰 타격까진 아니었다. 오히려 물리적인 피해보다 정신적 피해가 더 막심하다고 봄이 맞았다. 분함을 참지 못해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울 정도니 말 다했지 않나.
머릿속으로 근래 있던 일들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의 득실을 따지며 방 안을 배회하던 조익환이 기어이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귀한 도자기며 장식품들이 방바닥을 나뒹굴고 깨져 엉망이 되었다.
“죽었어야 돼!”
큰 타격은 아니지만 적은 타격도 아닐뿐더러 원하는 결과마저 얻지 못했다. 적어도 최도겸이 죽었어야 수지가 맞을 터인데 결국 살아나지 않았나.
“분명 조금만 마셔도 죽을 만큼 강한 독이었는데 어찌…!”
또 심청이겠지. 분명 그 용이 변수가 됐을 것이다.
제가 쳐 둔 거미줄은 완벽했다. 목표를 위해 만들어 둔 모든 인과와 감수할 비용과 위험까지 모두 차근차근 계산이 되어 있었다. 아흔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구미호가 꼬리를 하나씩 잘라 내고 달아나듯 의심을 받아도 능히 혐의를 벗을 준비까지.
그러나 그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안에 용에 대응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대체 그 용은 무어란 말인가.”
갑자기 나타난 원인과 최도겸과 손을 잡은 이유,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뭔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어쭙잖게 용에게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최도겸은 무엇으로 용을 현혹시킨 것일까.
“…젊은 사내의 양기가 필요한 것인가?”
가만 생각하던 조익환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세필붓을 들었다. 흰 종이의 첫머리에 미남이라는 단어를 적어 두었다.
이후로 보석이나 장신구, 옷처럼 이무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대충 이어 적었지만 딱히 해답처럼 명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단순히 그런 것들을 원해서 최도겸과 손을 잡은 것이라면 최도겸보다 훨씬 가진 게 많은 제 제안에 응했어야 하지 않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최도겸의 재산은 전 대사헌인 최은학의 비루한 자산에서 불어난 게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양친을 잃은 어린아이가 제대로 간수를 하지 못해 반토막 났다면 모를까.
적게 치장하는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운 심청의 행색만 보면 아마 당장 무리하고 있을 게 뻔한데 말이다. 세자빈 간택 준비를 위해서는 이미 가산을 탕진했을지도 몰랐다.
조익환은 세자가 도와주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용이라면서 힘을 제대로 안 썼단 말이에요.”
그러다 문득 이무기가 용의 정체를 알리며 투덜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붓을 뒤집어 서안 위를 가볍게 두드리던 조익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분하게, 시점을 조금 더 앞으로 옮겨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상하군.”
무려 용이다. 승천하지 못한 데다 작은 규모로 짧게 비를 내리고 기껏해야 단발적인 번개를 내리는 게 전부인 이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존재가 왜….”
왜, 겨우 세자빈 간택에 단자를 넣고 인간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불의의 사고로 지상에 떨어졌다 해도 단박에 이 땅이 흠뻑 젖을 만큼 비를 내리고 홀로 모든 것을 장악하면 될 터인데.
조익환은 앞서 이런저런 고민으로 가득 채웠던 종이를 내버리고 새로운 생각의 장을 열었다.
“이무기가 잘못 판단하여 용이 아닌 존재를 용으로 보았다거나….”
하얀 종이가 검게 물들어 갔다. 조익환은 멈추지 않고 붓을 놀렸다. 용이 아니라면 가능한 보기들이 나열됐다. 도깨비라든지 구미호라든지.
이무기를 간단히 제압하고 집을 부순 데다 사람이 들어 있는 옷장을 통째로 들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이가 결코 사람일 수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보다 무능력한 용이거나.”
어떤 상황이든 거기에 맞춰 대응하고, 또 목표를 위해 앞질러 가야 하기 때문에 조익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적기 전엔 다시금 서안을 몇 번이나 두드려야 했다.
고민 끝에 조익환은 지금껏 보고 들은 모든 상황과 정보를 총망라하여 도출해 낸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했다.
“…강력한 용이라 한들 어떠한 이유로 힘이 묶여 쓸 수 없는 상태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