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대기하던 좌익위가 벌컥 문을 열어 안쪽을 살폈으나 언은 도겸을 쥐고 놓지 않았다.
“그리 죽어 버리면 다 무슨 소용인데. 어찌 그리도 무책임해!”
“…송구합니다.”
저항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도겸 때문에, 언은 더 화가 났다.
“조금이라도 그런 불안이 들면 멈췄어야지. 그랬으면 이렇게…!”
기어이 도겸의 옷깃을 쥔 언의 손이 잘게 떨렸다. 분노한 음성에도 물기가 섞였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진 않았을 터인데….”
힘없이 도겸을 놓아준 언이 한숨과 함께 문 쪽으로 향했다.
홀로 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도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혹, 언젠가 소신이 미끼가 되겠다 하였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때도 내가 분명 절대 아니 된다 하였을 텐데?”
“눈을 잃은 소신은 적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아닙니까.”
“네가 정녕…!”
돌아선 언이 다시금 화를 내려 할 적에, 도겸은 고요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불충한 소신을 용서치 마십시오.”
고결한 얼굴은 언뜻 부러지기 직전의 가지처럼 유약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 견결하고 완강한 기세는 결코 언이 어찌 뚫거나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설령 소신이 참으로 목숨을 잃은들, 그것은 저하의 탓이 아닙니다.”
“…….”
“그러니 일전에 한 약조는 반드시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혹 일을 그르치더라도, 절대 신을 보호치 마시옵소서.”
언젠가 희우정 뜰을 거닐다 나눈 약조를 말하는 것이라면 언도 할 말이 많았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으면 거기서 멈추겠다, 너도 그리 약조하였던 것을 잊었더냐?”
“죽음 또한 제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별수 없지 않겠습니까.”
“닥쳐라! 나도 이리 사는데 네가 어찌!”
언은 부나방처럼 무모하게 구는 도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하.”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송구합니다.”
“그리 멋대로 굴 작정이라면 더는 너와 벗으로 지낼 필요도 없다.”
언은 좌익위가 열어 놓고 기다리는 문밖으로 나섰다.
“제 목숨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놈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 다신 너를 보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 말에 도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 안이 어둡기도 했지만 언이 돌아보지 않은 탓도 있었다. 어느 날 덜컥 부고를 듣느니 차라리 이편이 백번 낫기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친구를 잃은 자리를 술이 채우게 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런 밤이었다.
***
물에서 나온 청은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깊이 들이쉰 뒤 훌쩍 뛰어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하아….”
새벽녘의 하늘은 유독 물빛과 유사한지라 구경할 맛이 났다. 그래서 청은 가능한 낮 시간은 물속에서 잠들어있다가도 세상이 잠든 시간이 되면 유유히 밖으로 나와 멍하니 물빛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 청이 올려다본 하늘은 잠시도 같은 색을 유지하지 않았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하늘은 물처럼 흘러가 직전과는 다른 빛을 띠고 있지 않나. 질리지가 않았다. 어쩌면 하늘은 마른 바다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만 눈을 깜빡이던 청의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소리가 사랑채 쪽에서 들리기에 가볍게 지붕을 넘어 가보니 역시나 도겸이 디딤돌 아래에 볼썽사납게 넘어져 있었다.
“…뭐 해?”
바닥을 짚고 더듬대던 도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청이냐?”
그러나 청이 지붕 위에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는지 위가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쉬고 싶다며 어찌 일어나 나온 것이냐?”
“그러는 너는 왜 거기 앉아 있어?”
“아… 일부러 앉아 있던 것은 아니다.”
도겸이 멋쩍은 얼굴로 기둥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곤 스스로 옷을 털어 냈다.
“매일 다녀 몸이 기억하리라 여기고 겁 없이 홀로 나섰다 그만 넘어진 것이다.”
“피 냄새 나는데.”
“피?”
훌쩍 뛰어 내려온 청이 피가 나는 근원을 찾았다. 넘어지면서 쓸린 도겸의 손바닥이었다. 깊게 다치진 않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하필 피가 나는 손으로 옷을 만진 탓에 하얀 웃옷 여기저기에 붉은 피가 묻어 버린 것이었다.
청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약간의 물을 일으켜 도겸의 손바닥 안쪽을 씻겨 주었다. 따끔한 통증을 느낀 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다.
“그만, 힘을 쓰지 말거라. 또 아프면 어찌하려고.”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물기를 날리고 상처 위로 맺히는 피를 가볍게 말리자 더 비어져 나오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 더없이 깔끔하던 매무새도 어딘가 모르게 흐트러진 게 보였다. 모르면 몰라도 이제 조선에서 살아가는 이런저런 방식을 깨우쳐 버린 청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너… 옷이 엄청 더러워졌어.”
“그래? 이런… 갈아입어야겠구나. 청아, 행랑아범을 좀 불러 다오.”
몸을 움직이기 전에 가만 귀를 기울여본 청이 도겸에게 다시 물었다.
“아직 안 일어난 것 같은데 가서 깨우면 돼?”
“무어? 아직 파루 칠 때도 안 된 것이냐?”
“하늘의 색을 보면 한참 남았어.”
“아, 어쩐지… 그저 잠에서 깨어 일어난 것인데 내가 너무 이르게 눈을 뜬 게로구나.”
청이라면 눈이 보이지 않아도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의 결이나 냄새만으로 쉽게 밤낮을 구별했겠지만 인간은 달랐다. 생각보다 시각에 훨씬 더 의존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다른 인간들이 장님이 된 도겸을 두고 그리도 슬퍼한 것일까. 청은 뒤늦게 납득하며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겸이 곧 의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행랑아범이 깰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이참에 혼자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도겸은 다시 마룻바닥을 더듬어 신발을 벗고 위로 올라갔다. 깨끗한 마루 위에선 걸릴 게 없는지라 비교적 움직임도 자유로웠다. 허공을 헤엄치듯 유영하며 방향을 잡은 그가 침방을 찾아 들어갔다. 청도 슬쩍 뒤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보자….”
방 안에 들어가서도 도겸은 부지런히 사방을 뒤적였다. 평소엔 책을 읽다 잠드는 일이 많아 침방을 두고도 사랑방에서 자기 일쑤였지만 앞을 보는 게 불편해진 이후로 그는 건너편 방인 침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님이 들 때만 사랑방을 이용하는 식이었다.
“행랑아범이 찾기 편하게 정리를 하였을 터인데….”
필요한 옷은 전날 행랑아범이 이부자리 근처에 미리 준비를 해 두었지만 새로 갈아입어야 하는지라 옷을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그러나 청은 도겸을 돕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도겸도 딱히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문간에서부터 벽을 더듬대며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했다. 하나하나 기억해 두려는 듯 움직임은 신중하기만 하였다.
“보는 것으로는 웬만큼 익혔다 생각하였는데….”
가구를 하나씩 짚어 가며 표면부터 장식, 손잡이까지 하나하나 만져 보던 도겸이 문득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손끝으로 다시 걸음마를 뗄 차례인가 보구나. 아니면 그간 너무 치우쳐 살았거나.”
“너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슬프거나 화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 모두가 도겸을 동정하거나 슬퍼했다. 물론 그게 저와는 달리 인간들은 감각들 중 하나라도 잃으면 제대로 일상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되긴 했다.
“어찌 그리 묻는 것이냐?”
그럼에도 정작 본인이 의연해하니 청은 조금 의아해진 채였다. 지극히 보통의 범주에 있던 사내가 아니었나. 형체만 겨우 알아볼 만큼 어두운 방 안에 선 도겸을 바라보는 청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네 눈, 내 피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것 같거든.”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도겸이 멈칫했다.
“근데 난 물만 움직일 수 있어서 네 몸에 흘려 넣었던 피를 다시 뽑아줄 순 없어.”
“…….”
“그래도 괜찮아?”
그때까지 멈춰있던 도겸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냐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리 물으니 묘하구나. 언제는 없어도 전혀 아쉽지 않다 하지 않았더냐?”
“그야 너는 인간이니까.”
“인간이라 하여도….”
그가 청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뜻 보이는 사람처럼 정확한 방향이었다.
“네가 내게 피를 먹이지 않았다면 일찍 죽었을 목숨인데 이깟 눈을 잃은 게 무어 아쉽다고 슬퍼하겠느냐. 적응하느라 시간이야 좀 걸리긴 하겠다만, 난 눈을 잃은 불운에 슬퍼하기보다 목숨을 건진 천운에 기뻐하고 싶구나.”
기쁘다 말하는 도겸은 어딘가 모르게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누군갈 죽이고 싶은 만큼 자신을 증오하던 그 마음이 눈을 내놓음으로써 해소된 것일지도 몰랐다.
“네게는 고마운 마음뿐이니 그런 말 말거라.”
청이 답하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다시 몸을 틀어 옷장을 연 도겸이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살폈다. 속곳부터 시작하여 저고리와 바지, 버선, 그리고 겉옷까지 계절별로 차곡차곡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어떤 장에는 이불이 가득했다. 집 안의 가솔들이 도겸을 위해 얼마나 꼼꼼하게 일하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물론 도겸이 일일이 만져 모양을 파악하느라 전부 엉망이 되어 가고 있긴 했지만.
“심의가 어디에….”
웃옷이 정리된 장을 한참이나 뒤지고 나서야 도겸은 간신히 원하는 옷을 찾아냈다. 마찬가지로 하얀 바탕에 가장자리에 검은 깃을 두른 무채색의 웃옷이었다. 아랫단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왜 같은 걸로 입어?”
“신알례를 할 때는 원래 심의를 입는 것이다.”
“신알례가 뭔데?”
“아, 그러고 보니 신알례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던가?”
도겸은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새 옷을 걸치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가서 문안을 여쭙는 것이다.”
인간들은 정말이지, 죽은 것을 놓아주는 법을 몰랐다. 청은 그 신주라는 것들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그건 어디에 있는데?”
“사랑채 뒤쪽에 있지.”
“아, 네가 아침마다 궐에 가기 전에 가던 곳이 거기야? 네가 거기에 다녀오면 꼭 뭔가를 태우는 향이 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