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은 다리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쥐며 화를 삼켰다.
“…그래서 자네는 무어라 하였는가?”
“합치지 않아도 충분히 강건하여 필요치 않다, 그리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순순히 받아들이던가?”
“청이에게 들으란 듯 힘을 합치면 가질 수 있는 것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주 많을 것이라더군요.”
“아주 뻔뻔한 인사로군.”
언은 도겸을 대신해 청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눈알 굴리는 소리라도 난 것일까.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청이 귀신같이 시선을 맞추며 되물었다.
“왜?”
투명하고 물기 어린 듯 반짝이는 눈망울이었으나 그 눈빛 자체는 더없이 건조하여 도통 파악할 수 없는 눈이었다. 심연과도 같은 칠흑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언은 퍼뜩 정신 차리느라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아… 그, 좌상의 권유에 너는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여 본 것이다.”
그럼에도 얼버무리거나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제 행동이 무안하다고 거짓을 말하기엔 청의 통찰력이 상당하지 않나.
“설마, 내가 그런 오물의 말에 혹할 거라 생각한 거야?”
“오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역겨운 인간과 어떻게 손을 잡아? 최도겸이 만약 거절하지 않았다면 난 이 집까지 날려 버리고 떠났을 거야.”
“…거참 확실한 대답이구나.”
흡족한 답변이지만 과격한 표현에 언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동안 도겸이 놀라운 사실을 덧붙였다.
“그리고 조익환이 이리 저자세로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하.”
“그게 뭔가?”
“이거야. 그때 조익환에게서 빼앗아 온 거.”
답은 청이 하였다. 느닷없이 저고리 안쪽에 불쑥 손을 넣기에 깜짝 놀란 언은 사레가 들린 듯 거친 기침을 해 대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별것 아니네. 잠시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의 손에 작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검은빛을 띤 그것은 언뜻 보기엔 엄지 한마디쯤 크기로 보였다.
“그게 무엇이기에?”
“이무기의 여의주.”
“뭐?”
대경한 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여의주라면 일전에 네가 말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맞아. 이무기로 500년을 살면 쌓인 도력으로 여의주를 빚어낸다고. 그리고 남은 500 년 동안은 그 여의주를 지키며 또다시 도력을 모아 크기를 키우고 그것을 제 심장 삼을 때, 비로소 용이 될 수 있다고 말했었지.”
언은 매일 입는 곤룡포의 흉배에서 본 여의주가 전부인지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부터 신기하기만 했다. 세자로서의 위엄도 잊고 호기심에 손이 먼저 뻗어 나갈 정도였다.
“만져 봐도 되느냐?”
“아니, 안 돼.”
청이 매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여의주를 다시 옷 속에 숨겨 갈무리했다. 언은 민망한 듯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것을 빼앗아 오는 게 무어 얼마나 좋은 것이냐?”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지난번처럼 비를 내릴 수도 있거든.”
“뭐?”
오늘만 멍청하게 몇 번이나 되묻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사람의 귀로는 단박에 흡수할 수 없는 내용이지 않나. 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도겸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도 직전에서야 들었습니다. 고압적이지 않은 조익환의 태도가 의아했고 이무기도 뭔가를 참는 듯한 기색이라 처음엔 청이에게 주눅이 들어서라고만 여겼는데, 그러기엔 저를 인질 삼으며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이런 사정을 미리 말해 주었다면 제가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묘하게 청을 질책하는 듯한 투에 청이 서안에 턱을 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하는 걸 잊었다니까.”
“네가 뭔가를 잊는 일도 있더냐?”
“잊고 싶은 건 잊는데?”
“그게 말하기 싫었다는 게 아니면 무어냔 말이다.”
지극히 고상한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내용은 기실 철부지 아이들이나 다름없었다. 언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끼어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그걸 갖고 있으면 이무기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게지?”
“응.”
“그럼 적어도 조익환이 또다시 비를 내려 이목을 집중시킬 일은 생기지 않겠구나.”
“그 외엔, 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느냐?”
도겸의 물음에 청이 어깨를 으쓱였다.
“더 이상 여의주에 도력을 모을 수 없겠지.”
“그렇다면 또 도력을 모아 여의주를 만들어 내면 되는 일이 아니냐?”
“다시 오백 년간 도력을 모으기엔 아마 이무기의 수명이 그만큼 길지 않을걸.”
“그럼 그걸 들고 가서 전하께 아뢰면 조익환이 이무기를 세자빈으로 올리려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죄를 물을 수 있겠구나!”
언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도겸이 그 이유를 밝혔다.
“조익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청이의 존재를 드러내려 맞불 작전을 놓겠지요. 어쩌면 오늘도 청이가 저것을 잘 가지고 있나 확인하기 위하여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겸이 조익환의 속내를 가늠해 보는 동안 청이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다른 손에 넘길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이걸로 뭔가를 할 생각은 하지 마.”
“뭐? 그럼 기껏 빼앗아 온 보람이…!”
언이 황당해했지만 청은 더 이상 이렇다 할 대답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찌 저러는 것인가?”
어이없어하는 언에게 도겸이 한숨을 삼키며 나직이 답했다.
“아무래도 좀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청이 저것을 이무기로부터 빼앗아 온 이유는 가히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하니까요.”
언은 도겸의 말조차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의 문제는 도겸이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라 믿고 잠자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구경을 갔어야 하는데.”
다만 이쯤 되니 정말 청이 어떤 힘을 쓰는지 궁금해졌다. 청이 나간 문을 아쉬운 듯 바라보는 세자에게 도겸이 넌지시 말했다.
“저하께서도 그만 환궁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회가 생기자마자 언을 쫓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언은 괜스레 버티고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리 세자를 내치는 이가 어디 있나?”
“저는 아랫사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당연히 저하께서 동궁을 비우신 걸 들켰을 때 고초를 당할 궁인들이 더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이쯤 되니 꼭 들키길 바라는 것 같은데?”
“부디 제 충심은 의심치 말아 주십시오.”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마지못해 일어나려던 언은 조금 뒤 생각을 고쳐먹었다.
“참, 사실 좌상이 오지 않았다 해도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네만….”
그 말을 할 즈음 언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웃음기는 싹 가신 채였다.
“하문하십시오.”
어떤 물음이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단정한 표정과 태도였다. 언은 이래저래 닥치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해진 탓에 남산댁의 술이 절실했지만 꾹 참으며 물었다.
“직전까지 추국장에 있다 오는 길인데, 거기서 강무가 있던 날 사냥터에서 어사주를 받은 이들을 유심히 본 내관이 자네에 대한 이야길 하더군.”
“어떤 이야기를 하였기에 그리 말씀이 무거워지시는 것입니까.”
볼 수 없으니 나머지 감각에 더 의존하게 된 도겸이 달라진 언의 어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네가, 그 술에 뭔가 든 것을 알고도 마시는 듯하였다던데.”
“…….”
“내가 그때의 자네를 봤다면 바로 구별하였겠지만 보지 못하여 묻는 것이네. 아마도 난 그 내관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 자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것 같네만….”
언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도겸을 바라보았다.
설마, 죽음을 각오하기까지 한 것은 아니라 말해 주길 바랐다.
“자넨 역시 내내 속이 불편하던 것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게 꺼려졌던 게지? 그렇지?”
“…제가 어사주를 마시려던 순간에.”
목석같이 앉아만 있기에 답답해진 언이 재차 다그치려던 차, 도겸이 드디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좌상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
“좌상은 제가 그 술을 마시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요.”
“…뭐?”
“대사례때 저를 시사에 올리고 이무기의 힘을 끌어오기까지 하여 단 한 발도 맞히지 못하게 한 것과, 이무기를 사냥터에 풀어 화살로 꿩들을 잡아 죽인 일의 맥락을 살피면 또한 결과는 같습니다.”
“…….”
“제가 벌주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도겸이 느릿하게 시선을 끌어 올렸다. 확신은 없는 듯 단정한 미간을 구겼다.
“물론 제가 과히 의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좌상이 그날 강무의 최우수자가 되고 싶었던 욕망으로 이무기에게 그런 해괴한 일을 시킨 것일 수도 있지요.”
차근차근 근거를 쌓아 차마 상대가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을 내는 것은 도겸의 오랜 토론 방식이었다.
“그렇게 따져도 평소 일이 벌어지던 양상과는 비슷하지 않습니까. 조익환은 모호하게 이런저런 명분을 섞어 확실히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노란 촛불이 비친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초연해 보였다. 반면 언은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 마시지 말았어야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직전에 전하께서 청이와 이무기의 싸움을 중재하실 때 이미 좌상이 한차례 의심을 받은 바가 있으니… 그대로 끌어갈 필요가 있다 느꼈습니다.”
“무엇이, 네가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써 좌상의 살인이라는 확증을 만들고 싶기라도 했던 것이냐? 어사주를 마시고 쓰러진들 차도살인(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음험한 수단을 쓰는 행위를 의미함)밖에 되지 않을 것임을 설마 몰랐단 소리냐 묻는 것이다!”
“일부는 도로 뱉어 내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여겼으나….”
도겸이 굳은 얼굴로 언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 각오하기도 하였습니다.”
“최도겸!”
기어이 격노한 언이 서안을 아무렇게나 내치며 벌떡 일어났다. 서안이 뒤집어지며 요란한 소음이 일고 바닥에 나뒹구는 초는 촛농을 뚝뚝 떨구고는 기어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제 방 안은 창호로 스며드는 울적한 달빛뿐이었다. 그럼에도 멍하니 앉아 있던 도겸이 기어이 언에게 멱살을 잡혔다.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