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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04)화 (89/197)

근엄하기 이를 데 없이 굴던 도승지가 기어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송 씨는 느릿느릿 팔다리로 기어 상을 돌아갔다. 그러곤 천천히 벗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림을 모으고 명필의 필묵을 모은다는 걸 내 어찌 모르겠나?”

“아… 맞아. 사실 내 일찍이 규장각 직각의 필체가 가히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그 솜씨를 구경하고자 하였었는데 말이야.”

도승지를 토닥이던 송 씨의 손이 멈춘 것은 그즈음이었다.

“…조금 일찍 오지 그랬나. 어쩌면 다시는 그 명필의 새로운 글씨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들었네. 소식을 접하신 전하께서 그 밤에 드물게도 고주망태가 되실 정도로 술을 드셨던지라 모르는 이가 없지.”

아까웠다. 너무도 아까운 인재의 눈을 잃었다.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속상한 마음에 송 씨는 아까부터 손도 대지 않고 있던 술잔을 들어 냅다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래도 도승지에게서 뭔가 단서를 얻으려면 이런 자리를 몇 번은 더 마련해야 할 성싶었다. 가뜩이나 술기운이 오른 참에 도겸을 생각하자 지나치게 착잡해지는지라 송 씨는 마음을 비우고 허심탄회하게 제 이야기나 늘어놓았다.

“아직 어린 청년에게 규장각을 맡겨도 되나, 처음엔 걱정이 많아 주상 전하께 임명을 거두어 달라 그리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네. 하지만 내 기우였지. 전하께선 사람을 바로 보신 것이었어. 어찌나 총명하던지,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문신들의 교육도 무척이나 잘 해내어서 도저히 미워할 구석이 없을 정도라네.”

“자네의 길고 긴 상소라면 기억하고 있지. 하면 그리 굉장한 인재를, 어찌하여 전하께선 규장각에 두셨을까… 조금 더 중앙에 두어도 되었을 터인데.”

송 씨는 곁에 앉은 김에 자연스레 도승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도승지는 시원스레 술을 들이켰다.

“처음엔 전하께서 미래를 더 중히 여기시어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고만 여겼는데… 글쎄, 이제야 나는 조금 알 것도 같네만.”

“그래. 무엇이던가?”

시야가 흐릿해졌다. 송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바람 잘 날 없는 중앙에 심으면 금방 부러져 버릴 재목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예감하셨던 게지.”

“그만큼 순수한 인물이라니… 부럽군.”

도승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송 씨는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

“자네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어찌 그러는가?”

“…그림만 안 받았다 뿐이지 내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나.”

그러고 보면 지금의 자리에 앉을 즈음부터 도승지는 유난히도 골동품이나 그림과 같은 것들에 과하게 집착해 왔다. 어쩌면 순수한 것에 대한 집착이라 볼 수도 있었다.

“무어 그리 자책을 하는가. 탈탈 털어 먼지 한 톨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다고?”

딴엔 모두가 같노라 위로를 건넨 것인데 생각보다 부쩍 심각해진 도승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승지 시절 내의원의 부제조를 겸할 때 말이네.”

육감이 있다면 바로 지금 번뜩이는 이것이리라. 송 씨는 술이 번쩍 깨는 것을 느꼈지만 도승지가 계속 말을 잇게 하기 위해서는 잠자코 술에 취한 척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 그래… 자네 매일 윗전들의 약방 일기를 적느라 바쁘다 하였지.”

“그때….”

뭔가 응어리진 게 말문을 막기라도 하는 것일까. 잘게 떨리는 숨을 내쉬던 도승지가 이윽고 술주전자를 들더니 그대로 입에 들이부었다.

“자, 자네… 괜찮은 겐가?”

어찌나 세차게 들이붓는지 입 밖으로 넘쳐 옷깃이 젖을 정도였다. 기어이 송 씨가 말려야할 만큼 도승지는 반쯤 혼이 나간 채였다. 술에 취한 것인지, 괴로움에 지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탁! 간신히 주전자를 내동댕이친 도승지가 숨통을 막고 있던 죄책감을 토해 냈다.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네!”

“…뭐?”

송 씨가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는 동안 상 위엔 널브러진 주전자에서 약주가 콸콸 쏟아져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걸 바로 세우거나 닦을 틈도 없었다.

“내가… 내가 약방 일기를….”

사람은 술을 이길 수 없다. 기어이 상 위로 쓰러진 도승지가 눈을 감기 전 술에 젖은 입을 달싹였다. 송 씨는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그 입을 노려보았다.

“약방 일기를… 날조하였네.”

그리고 도승지의 의식이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허.”

반대로 정신이 명료해진 송 씨는 넋이 나간 채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

“저하!”

급하게 말을 멈추고 내려서는 언을 향해 무장한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좌상은?”

청이 도겸의 곁에 있다면 모를까 잠들어 있는 지금,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싶어 얼마나 걱정하며 달려왔는지 모른다. 언의 짧은 물음에 무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재깍 보고했다.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별일 없었나?”

“예. 저를 포함해 다섯이 안쪽에서 대기하였는데, 줄곧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좌상이 호위무사를 단둘만 대동하여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아, 단순한 병문안이었던 듯싶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납시었으니 당장 문을 열어라!”

좌익위의 외침에 얼마 가지 않아 즉각 대문이 열리고 행랑아범이 뛰어나왔다.

“아이고, 세자 저하 오셨습니까!”

집 안의 가솔들이 모두 나와 맞이하기도 전에 언은 거침없이 사랑 마당 쪽으로 향했다. 행랑아범만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주춤대며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를 태우는 냄새가 매캐했다.

“무엇을 태우기에 이리 눈이 아플 지경인 겐가?”

“그것이… 좌상 대감께서 병문안을 와 나리께 귀하다는 약재를 잔뜩 선물하여 말이지요.”

대답이 끝나기가 바쁘게 언이 역정을 내었다.

“좌상이 미친 게로군!”

움찔 놀란 행랑아범은 이마가 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허리를 숙이며 항변했다.

“그리하여 당장 태워 없애고 있었습니다!”

“…그래. 잘하였네. 최 직각은, 사랑에 있나?”

“예.”

행랑아범이 먼저 가서 아뢰겠다며 재빨리 뜀박질하여 사랑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언이 마침내 사랑채에 다다를 즈음, 거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랑에서 먼저 나오는 이가 있었다.

“…청아!”

청은 언의 주변에 있는 익위사들을 의식하고는 무심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너…!”

무어라 다그치려던 언이 혀를 차며 대청 위로 올랐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시다시피 저희 오라버니가 마중을 나오기엔 너무 오래 걸리지 않사옵니까.”

“…그래.”

그즈음 뒤늦게 벽을 더듬어 문간까지 나온 도겸이 허리를 숙여 정갈히 인사했다.

“저하 오셨습니까.”

애석하게도 그 방향이 언이 서 있는 쪽은 아닌지라, 지켜보는 모두가 침울한 얼굴을 하였다. 누구도 그곳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언이 도겸이 멍하니 바라보는 방향으로 슬쩍 걸음을 옮겨 인사를 받았다.

“그래. 별일 없었나?”

“예. 한데 전하께서 궐 밖 출입을 금하시어 동궁에 계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하께서 명을 거두신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자네 집에 좌상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에 몰래 나온 것이네.”

“저하!”

“그러니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모두 함구하는 게 좋을 것이야.”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익위사들을 전부 끌고 나온지라 언의 호위가 유난히 많았다. 언은 가장 신임하는 좌익위만 사랑채 앞에 두고 나머지는 거리를 두어 지키도록 지시한 뒤 사랑으로 들었다. 청은 자신은 볼일 없다며 안채로 돌아가려 했지만 언이 보내지 않고 아득바득 함께 데리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리 대책이 없으시면 어찌합니까.”

셋이 마주 앉자마자 도겸이 걱정 어린 말부터 꺼내었다. 언은 겸연쩍게 대꾸했다.

“우리 청이 아씨가 아직도 깊이 잠들어 계신 줄 알았지 뭔가. 조익환에겐 이무기가 있는데 눈도 보이지 않는 자네가 청이 없이 어찌 당해 내느냔 말이야.”

상석에 앉은 언은 좌상이 다녀간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청을 다그치기부터 했다.

“그리고 너는 사고를 칠 거면 내게 확실히 언질을 주었어야지!”

조익환과 이무기도 쫓아냈겠다,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억지로 잡혀 와 있는 청은 세자를 앞에 두고도 퉁명스럽기만 했다.

“언질 줬으면?”

“잘 튀긴 유과를 들고 가 씹으며 구경했겠지!”

“…뭐?”

청은 물론 도겸도 언뜻 이해하지 못하였다. 방 안에는 건조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저 지나치게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게끔 하려던 언은 용과 군자에게 통할 농담은 없는 것인가, 개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밀고 나가기로 했다.

“자네들 같으면 구경하고 싶지 않겠나? 좌상이 이승에서 천벌을 받는 그 귀한 모습을 말이야.”

“…그 일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더군요.”

“무어라?”

“그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가 죄상을 밝혀내지 못하리라 생각한 듯싶습니다. 청이의 힘으로 겁박을 하여 어찌 자백을 받아 낸들 억지 자백이었노라, 증좌도 제대로 없는 점을 들어 면피하려 들 테지요.”

“그리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가?”

당연히 그 일로 도겸에게 따져 묻거나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리라 예상했건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언은 자못 화가 난 얼굴과 함께 자세도 바로 세우며 되물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길 나눈 겐가?”

그러자 도겸이 고개를 약간 틀어 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청이를 욕심내더군요.”

“청이를?”

“나를?”

세자와 용이 동시에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겸은 누구의 시선에도 맞춰 주지 않고 그 중간의 아주 모호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제게 힘을 합쳐 누군지도 모르는 적에 대항하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것이겠지요. 제가 이리됨으로써 자연히 좌상이 가장 유력한 혐의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

“…거기다 이무기를 세자빈으로 넣으려 한 것도,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를 지키기 위함이었노라 그리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언뜻 청이 언을 살폈지만 까닭은 알아내지 못했다. 도겸은 말이 없는 언에게 제 생각을 포함하여 있던 사실을 모두 전했다.

“백번 양보해서 표면적으로는 그런 이유일 수 있겠지만… 이면에는 이무기보다 강한 청이를 욕심내고 있음이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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