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아프게 뭐 하는 짓이야. 미꾸라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미꾸라지가 아니라 구렁이…!”
이성을 잃은 나머지 급하게 답하던 이무기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조익환이 매서운 표정으로 이무기에게 눈치를 주었고, 이무기는 주눅이 든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청은 그 모습이 도통 이해되질 않았다.
“…그래서 대감께선 어찌 이곳까지 걸음하신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겸은 선비의 자세로 상황에 임했다. 서로 데리고 있는 여인들의 정체가 밝혀진 통에 스스럼없이 굴 법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상한 품격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구태여 먼저 밑바닥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리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뚝섬에서 있던 일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내도록… 마음이 무거워 병문안도 할 겸 걸음 해 본 것이네.”
“마음이 무거운 사람치곤 굉장히 홀가분하게 규장각 직각의 자리를 팔아넘기고 있던데.”
도겸에게 한 적 없는 이야기인지라 당사자가 움찔하는 것은 물론 도겸도 미간을 약간 구겼다. 청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시선은 미처 닿지 못했다.
“…팔아넘기다니?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오해를 좀 풀어 보자면 난 그저 직각이 규장각을 이끄는 자나 다름없기에 오래 비워 두어선 안 된다, 그리 여겼을 뿐일세.”
조익환은 미리 생각해 두었을 변명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규장각의 제학이며 직제학들은 모두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직까지 겸임하고 있다 보니 사실상 직각이 규장각의 실무들을 도맡아 하고, 그래서 업무량도 가장 많지 않나?”
“그러합니다만, 워낙 부지런한 분들이 아닙니까.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겠습니다만.”
“마음 아픈 일이다만 눈이 그리되어 앞으로 일은 어찌할 셈인가?”
“당장은 전하께서 휴직을 좀 더 길게 갖도록 윤허하여 주셨사온데… 혹 그래서 대감께서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하여야 한다, 그리 주청을 하신 것입니까?”
청은 초점 없이 묻는 도겸을 대신해 조익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익환 역시 시선을 느꼈는지 도겸이 아닌 청을 바라보며 그 머릿속에 든 것을 데굴데굴 굴렸다.
“무어, 들었다면 알겠지만 당장 여기저기 업무의 구멍이 많은데 언제까지 규장각에서 붙들어놓고 교육을 시켜야 하느냔 말이지.”
“잠시 다과상을 들여도 되겠습니까.”
조익환이 한참 그럴싸한 이유를 늘어놓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맥을 끊으며 남산댁이 다과상을 준비해 들여왔다. 뒤따라 들어온 점희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조설아의 앞에 다른 상을 내려놓고는 줄행랑치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럼 말씀 나누시지요.”
남산댁은 별말 없이 손님상을 올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부산스러운 시간이 지나간 뒤 조익환이 차분하게 차를 들었다.
“좋은 향이 나는군.”
여유롭게 차향을 즐기는 좌상에게 도겸이 툭 내뱉듯 말을 걸었다.
“은수저라도 가져오라 할 것을 그랬습니다.”
“무어?”
“혹시 독이 들었을지 모르는데, 대감께서도 유의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의미심장한 도발에 막 차를 들이켜려던 조익환이 멈칫했다.
“저야 젊어서 버텨 고작 시력만을 잃었다지만…, 대감께선 지천명(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이 지나셔서 더 위험할 듯하니 걱정이 되어 말이지요.”
“자네 어찌… 그런 농을 하는가?”
“꼴이 이리되었는데 어찌 그 일을 두고 농을 하겠습니까?”
결국 조익환은 찻잔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림의 떡이 된 찻물은 고요히 더운 김을 폴폴 흩날리며 부드러운 차향만 뿜어냈다.
사랑의 주인인 도겸이 다시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문제를 토론하고자 오신 것은 아닐 테니 이 자리에서 더 묻지 않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나마 도겸은 말을 아끼며 슬슬 조익환이 본심을 드러내길 종용했다.
“그럼 뚝섬에서의 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그때 남은 앙금이 있다면 풀고 가자는 게 아니겠나?”
“그때 남은 앙금이라….”
도겸의 멍한 시선이 청을 향하는가 싶더니,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 기습했던 자객들의 정체와 배후, 그리고 제 잔에 독을 탄 자가 누군지 밝혀지고 합당한 형벌이 내려진다면 이 눈을 잃은 앙금도 의문도 자연히 모두 풀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청은 왜 제가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도겸이 말을 아끼는 것인지 조금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사고방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지금, 도겸이 무슨 생각일지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명분이라 했다. 그리고 도겸은 결코 조익환을 탓하거나 근거 없이 의심하지도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용서도, 비난도 하지 않음으로써 조익환이 어떤 행동을 취할 만한 명분을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도겸은 고요한 수면이 되어 조익환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조익환이 모르쇠로 일관하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니, 조익환은 도겸을 볼 때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 터였다.
그리하여 조익환이 제 입으로 뭔가 단서를 내놓을 수 있도록.
“거기다 대감께서는 저를 그리도 아껴 주시는데 어찌 감히, 앙금을 품겠습니까.”
도겸은 여전히 단박에 읽어 낼 수 없는, 그저 잔잔한 수면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까지 흐릿하다 보니 그 얼굴은 온화한 철옹성과도 같았다.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사람이 아닌 조 낭자를 어찌 세자빈으로 들이시려 하였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마냥 방어적이기보다는 이미 드러난 사실에 대하여는 그냥 넘기지 않고 반드시 짚었다. 조익환은 예상했다는 듯 굴었다.
“그야 당연히, 강한 세자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곤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번에 들일 세자빈이 앞서 훙서한 빈궁들처럼 급사하기라도 하면 전하와 저하께서 얼마나 곤란하시겠냐는 말이네. 가뜩이나 도성 안팎의 소문도 좋지 않은데 새로운 빈궁마저 죽어 버린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지.”
“…….”
“그에 신하 된 도리로 이런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 아이를 세자빈으로 들여서라도 전하의 명망을 지키려 한 것일세.”
잠시 말이 없던 도겸이 약간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감께선 아주 큰 뜻을 품고 계셨군요.”
“그렇지. 무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자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 무어….”
도겸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했다. 따져 묻거나 부정하지 않는 반응을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조익환이 약간 자세를 고치며 진지하게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무적이 아니겠는가?”
“…예?”
결국 도겸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이무기를 견제하며 지켜보던 청이 서늘한 시선을 옮기자 조익환은 아닌 척 눈치를 보면서도 더욱 뻔뻔하게 굴었다.
“우리가 서로 간에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질 않나? 자네나 나나 그동안 전하께서 무탈하시길 바라는 마음은 같았지. 약간의 잡음이 있긴 했다만… 이제 모든 것은 깨끗하게 잊고 큰 뜻을 품어 합심하여야 한다 생각하는데,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뭐?”
어이가 없었다. 기어이 청이 몸을 일으키자 이무기가 재깍 조익환의 곁으로 가 지키려 하였다.
“그렇게 집이 무너지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청아.”
도겸이 손을 뻗어 청을 진정시켰다. 조익환의 눈이 무려 용을 제어하는 인간의 손에 가 닿았다.
“갑작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전하께서 무탈하시게끔 충신의 면모를 다하여야 한다는 대감의 말씀엔 소신도 크게 동의하는 바이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쉽게….”
“하오나.”
조익환의 말허리를 매섭게 자른 도겸이 초점 없는 시선을 끌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특유의 단단한 눈빛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제가, 누군가와 힘을 합쳐야만 무적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조익환은 그제야 도겸을 제대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
“나는 말일세. 그냥 즐겁게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인데 말이야, 응?”
“그래. 말하게. 마음껏 하게!”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건만 직제학 송 씨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도승지는 실로 술독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무섭게도 마셨다. 홀로 술독 하나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조금씩 혀가 꼬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두지 않았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으리라. 송 씨는 확신했다.
“어찌나 내게 청탁하는 자들이 많고, 또 좌상에게 줄을 대려는 자들이 많은지 원….”
상 위로 고꾸라지려던 송 씨를 붙잡은 것은 도승지의 입에서 나온 ‘좌상’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저것을 위하여 비싼 술을 공수해 오고, 임 씨가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려 하였던 그림을 꺼내 온 것이 아니었나. 송 씨는 바닥을 더듬어 헛개수가 든 병을 찾아 나발을 불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일수록 유혹도 많은 법이지, 암.”
송 씨는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리며 한탄하는 도승지에게 말대꾸해 주었다. 임 씨는 밖으로 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토악질을 하려 하기에 귀한 물건으로 가득 찬 사랑에 토하는 꼴은 볼 수 없어 밖에 나가서 하고 오라 등을 떠민 것인데 이렇게까지 기척이 없을 줄이야. 설마 그대로 도망쳤다면 송 씨는 저 벽에 걸린 겸재의 그림을 꿀꺽 삼켜 버릴 작정이었다.
“그래도 자네들처럼 순수한 벗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별안간 송 씨의 손을 덥석 잡은 도승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과 술…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한 술자리라니.”
왠지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송 씨는 술의 힘을 빌려 샐쭉 웃어 보였다.
“종종 모이자고. 기회가 된다면 자네의 집에 초대를 해 주면 어떤가? 볼만한 그림을 많이 갖고 있을 것 같은데.”
“뭐… 없진 않지. 근데 그! 내가 이거 하난 맹세할 수 있네. 나 말일세, 절대로 청탁의 대가로 그림을 받는다거나 뭐 그러지 않았단 말이야. 정말 순수하게, 어렵게! 기를 쓰고 간신히 구한 것들인데… 이걸 자랑하면 다들 누구의 부탁을 들어주었기에 이런 그림을 구했냐고 그런 소리나 해 대니 정말… 부질이 없단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