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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02)화 (87/197)

“그, 그것이.”

시선조차 함부로 아무 곳에나 두지 못한 내관의 눈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대사례가 있기 전 내수사에서는 다른 물품들을 포함하여 술잔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 두었사온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다 그만 하급 서리 하나가 잔을 넣어둔 함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급하게… 새로 준비한 것입니다.”

임금은 엄히 다스리면서도 추국관에게 눈짓하여 사실을 확인했다. 기존의 추국 내용이 담긴 추안을 확인한 추국관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하루 만에 다시 관요에 주문하여도 잔을 구워 올 순 없었을 터인데?”

궐에 납품하는 그릇들은 관요의 사기장들이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것들인지라 결코 하루 안에 나올 수 없다. 조금만 흠이 있어도 깨부수고 다시 빚어 굽고 유약을 바르기 때문이다.

임금의 하문에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내관이 간신히 답하였다.

“하여… 작년에 쓰고 보관하던 것을 다시 꺼내어 닦아 준비하라 일렀사옵니다.”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금은 내관의 진술에 따라 함을 떨어트린 서리와 그 상황을 목격한 모든 내수사의 관리들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사냥에 참석한 이들에게 잔을 나누어 준 이는 김 내관이었지.”

“그, 그렇사옵니다. 서리가 함에서 꺼내면 제가 받아 나누어드렸지요.”

“하면, 그 서리는 누구인가?”

“…그것까지는 소인이 기억지를 못하옵니다.”

그러나 그 물음엔 도통 답을 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어떤’ 서리라고 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지원을 나온 사람인 줄 알았다 하였고, 누군가는 새로 들어온 서리라 생각하였다고도, 또 누군가는 아예 서리였는지도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

내수사에 소속된 서리만 스물에 가깝기 때문에 혼동이 생길 수는 있겠으나 아예 일면식도 없는 자였고 그 뒤로도 본 적 없다는 진술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네들의 진술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로군.”

모두를 꼼꼼하게 문초한 임금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었다.

“…자네들이 모두 하나같이 최 직각을 죽이려 하였고, 기어이 최 직각의 눈을 멀게 하였다.”

임금이 내린 결론에 추국장에 끌려 나온 모든 죄인들이 경악함은 당연했다.

“예? 저, 전하! 당치 않사옵니다. 어찌 소인이 그런 흉측한 짓을 벌인단 말이옵니까!”

“아니옵니다, 소인은 무관하옵니다! 최, 최… 최 직각 나리는 전혀 뵌 적도 없는 분이옵니다!”

“닥쳐라. 어찌 함부로 그 뻔뻔한 입들을 놀리는가!”

벌떡 일어난 임금이 결국 진노하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겨우 함께 일한 서리 하나 기억지 못하였다. 한데 어찌 하나같이 불민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노라, 그리 읍하는 자가 없단 말인가? 그러고도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 자네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느냔 말이야!”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임금의 명령 한마디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혼이 나간 얼굴로 왕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하오나 그, 그날 최 직각 나리도 뭔가 이상한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한쪽 구석에 묶여 있던 젊은 내관이 억울한 듯이 외쳤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기에 언뜻 묻힐 뻔하였으나 언이 나섰다.

“…잠깐! 거기 자네, 방금 무어라 하였는가?”

추국장이 삽시간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언이 가리킨 내관은 막상 지목당하여 이목을 이끌자 목을 움츠리며 주눅 들어 도통 입을 열지 못했다.

“소, 소인은….”

“바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추국관 중 하나가 호통을 치고 나서야 내관은 토해 내듯 고하였다.

“그, 그날 어사주를 하사받으신 분들께서 모두 술을 드실 적에 최 직각 나리께서는 한참을 그대로 계셨나이다!”

그날 도겸은 내도록 속이 불편하다 하였다. 당연히 술이 꺼려질 만했다.

“그것을 네가 어찌 아는 것이냐.”

계단 아래로 내려선 임금의 하문에 내관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그저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데 홀로 가만히 계시기에 절로 눈이 간 것이옵니다.”

“그래서?”

언이 한 걸음 더 나서며 물었다.

“그래서 최 직각이 보인 이상한 기색이라는 것은 그게 끝인가?”

“한참을 술을 노려보시다가 드시긴 하였습니다. 한데 뭔가, 뭔가….”

“무엇이? 시원히 말을 좀 해 보게!”

“송구하옵니다. 소인도 확신이 들지 아니하여… 한데 꼭, 뭔가 다 안다는 듯한 기색이….”

언은 조금 맥이 빠졌다. 그가 아는 친우 최도겸이라면 늘 뭐든 아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곤 전하가 계신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을 노려보며 술을 드시어 소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여긴 게 전부입니다.”

“다른 방향? 어디.”

“그, 그러니까….”

오랜 시간 형신으로 인해 고초를 당한 내관은 말을 제대로 잇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눈은 흐리멍덩하고 혼이 나간 사람 같았지만 그럼에도 살고자 마음먹었는지 더듬더듬 답을 이어 나가려 하였다.

“최 직각 나리께서 바라보신 방향은….”

“지금 그딴 소리로 죄상을 면피하려 하는가? 허황된 진술로 추국장을 어지럽히고 지체시키는 것 또한 죄가 된다, 주상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새겨듣지 않은 게로구나!”

“며, 면피를 하려는 것이 아니오라…!”

“제가 하문한 것이 아닙니까.”

추국관의 말을 자른 언이 내관의 앞에 서서 시선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최 직각이, 누굴 보고 있었는가?”

하지만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내는 말이라면 마냥 허황되진 않으리라. 그런 직감이 언으로 하여금 아주 작은 진술이라도 더 끌어내게 하였다. 겁을 먹은 내관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간신히 답하였다.

“좌, 좌상 대감이었습니다.”

내관의 진술을 들은 언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도겸은 제 손에 든 게 독이라는 것을 알고도 마셨을지도 모르겠다고.

도겸 자신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 간 조익환이 가장 의심받을 테니 말이다.

“…미친놈이.”

언이 설마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읊조릴 즈음, 저만치서 익위사 하나가 다급하게 눈짓했다. 언은 임금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익위사를 따라 추국장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

“저하, 지금 서촌 직각 나리의 집에 좌상 대감이 와 있다 합니다.”

“뭐?”

“최 직각의 집 주변을 호위 중인 이들이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좌상 대감과 그 여식이 함께 와 있고, 최 직각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고요. 벌써 반 시진은 되었습니다.”

“…유 내관.”

언은 곁을 따르는 유 내관에게 명령했다.

“예, 저하.”

“당장 도포와 갓을 내오고 말을 준비하게.”

“예? 하오나 전하께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당분간 궐 밖 출입을 금하라는 어명을 내리셨사온데 어찌 나서려 하십니까.”

급히 걸음을 옮기는 언에게 유 내관이 당장 직언하였으나 세자는 멈추지 않았다.

“저하!”

재차 부르고 나서야 멈춰 선 언이 유 내관에게 뜬금없는 소릴 했다.

“그럼 자네가 빨리 내 머리를 한 대 치는 게 어떤가?”

머리를 치라며 정말 머리를 들이대는 통에 유 내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예?”

“그리 하면 유 내관에게 머리를 맞아 금족령을 깜빡 잊었노라, 그리 고할 수 있지 않겠나?”

“…저하!”

“지금 당장 도포를 내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곤룡포 차림으로 궐 밖에 나설 테고, 그리하면 서촌으로 가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백성들이 이 밤에 세자가 용포 차림으로 거리를 나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인데?”

“…….”

“그럼 어명을 어긴 죄로 벌을 받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지 않겠나?”

아주 비겁하게 내관을 겁박하였지만 별수 없었다.

“…저하.”

“그러니 어서 도포를 내어오게.”

언은 당장 친우를 구하고, 또 따져 묻기 위해 궐을 나서야만 했으니까.

***

“송구합니다, 대감. 아실지는 모르겠으나 깨어난 뒤로 눈이 보이지 않아 모시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식은 나도 들어 알고 있네.”

사랑으로 들어선 조익환이 상석으로 가려다 말고 멈춰 섰다. 청이 보료 위에 반쯤 드러누워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던 탓이었다. 따라 들어온 이무기가 청을 보고 눈을 부라렸지만 조익환이 손을 저어 막았다.

“앉으시지요. 곧 차를 들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겸이 버젓이 청이 누워 있는 상석을 가리켰다.

“대감의 소식 또한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가 누워 있는 동안 큰 변고가 생기셨다지요?”

“…크흠, 아닐세. 아직 환자이지 않나. 나는 상관 말고 자네가 앉게.”

“대감의 뜻이 그러하시다면야.”

도겸은 단박에 사양 않고 두 손을 허공에 들어 더듬거리며 상석으로 올랐다. 발에 닿는 보료의 감촉을 느끼자 약간 안도한 표정이었다.

청은 얄궂게도 도겸이 상석으로 오자마자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이를 본 이무기가 또다시 콧김을 뿜어 댔다.

“아, 조 낭자도 함께 왔다 들었는데.”

그러나 청이 저고리 속에 손을 넣어 보란 듯이 아직 덜 여문 여의주를 꺼내 보이는 탓에 이무기도, 조익환마저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도겸 혼자서만 이리저리 오가는 날 선 긴장을 읽지 못하고 점잖게 예를 갖추기 바빴다.

“인사가 늦었소. 규장각 직각 최가 도겸이오. 앉으시오.”

“…소녀, 조가 설아입니다.”

“이무기는 이름이 없잖아?”

사람처럼 점잖게 대화를 나누려던 이들의 맥을 단호히 끊은 건 청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분통을 터트린 이무기가 언성을 높여 다시금 자신을 소개했다.

“조가, 설아입니다!”

그러나 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없이 화려하고 곱게 단장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파리한 조설아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하는 거야. 어차피 서로 다 아는데 굳이 사람인 척할 필요 있어?”

“내 이름은 조가 설아요. 엄연히 이름이 있단 말이오!”

여의주와 장시간 거리가 멀어져 불안했던 모양이다. 저를 소개하며 여의주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청은 쉽게 넘겨주지 않았다. 도리어 손아귀에 쥐고 터트릴 듯이 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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