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걸 나더러 읽어 달라고?”
쌓인 서신들을 슬쩍 들춰본 청이 벌써부터 질린 표정을 했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마주 앉은 도겸은 보이지 않음에도 알겠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그래. 그간 열심히 공부한 것 복습도 할 겸 읽어보거라. 해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고 답장이 필요한 것도 내가 부르고 네가 쓰면 된다.”
“내가?”
“네 글씨가 내 필체와 같지 않느냐.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서찰들도 아니고.”
청의 필체가 저를 따라 아주 유사해진 것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기실 그것보다는 지금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이가 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만만하게 일 시킬 수 있는 이가 나겠지.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은 세자 아니야?”
목소리가 유난히 고드름의 끄트머리처럼 뾰족했다. 아마도 제 상태 때문에 바로 신물을 찾으러 가지 못해 답답하기 때문일 터. 도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와 너를 두고 견주거나 비교하고 싶지 않다만,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서는 너를 더 믿는다. 이것들을 비롯해 그간의 서신들을 저하께선 단 한 번도 보신 적이 없다 하면, 내 말을 믿겠느냐?”
“…너무 많아서 못 보여 준 것 같은데.”
“싫으면 두어라. 더 귀찮게 하지 않으마.”
당장 급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보고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다만 고민이 되는 건 제가 처한 상황을 언제 저 편지의 발신자들에게 알릴까, 바로 그것이었다.
모쪼록 지금은 청이가 싫다 하니 그걸 핑계로 조금 더 미뤄둘 수 있지 않겠나. 도겸은 서안 위를 더듬어 편지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편지를 전하러 왔다가 장님이 된 도겸을 보고 그 자리에 앉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철봉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도겸은 철봉을 전인으로 고용한 뒤 처음으로, 답신 없이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때 편지를 정리하던 도겸의 손에서 봉투 하나가 쑥 빠져나갔다.
“뭐, 다는 귀찮지만 한두 개 정도는 읽어 줄 수 있지.”
시큰둥한 청의 목소리와 함께 무자비하게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났다.
“아니, 청아. 그렇게 뜯다간 서신까지 찢어지는 수가…!”
“이미 늦었어.”
아무래도 순이를 얼른 가르치는 게 좋지 않을까. 도겸은 청에게 부탁할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두어라. 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하지만 용의 마음이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하지 말라고 하면 또 아득바득하고 만다.
“못 읽을 정도는 아니야. 그냥 읽기만 하면 돼?”
“…그래.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여기에 적어보아라. 알려 주마.”
도겸은 서안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청은 막힘없이 읽어냈다.
“수궁증토견즙익일지구팔사화일오.”
“아, 그건….”
잠시 생각하던 도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여기에 그 글자들을 그대로 써보겠느냐?”
물렀던 손을 다시 내밀었다. 청의 차가운 손끝이 도겸의 손바닥을 종이 삼아 글자들을 하나씩 눌러 적었다. 조금은 간지럽기도 했다.
“이게 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일종의 암호다. 몇몇 사람들과는 이렇게 주고받고 있지.”
청이 글자를 다 적어갈 즈음, 도겸의 낯빛은 더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암호?”
“그래. 만약 정해진 수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서신을 읽게 될 경우 즉시 그 의미가 전해지지 않도록 당사자들끼리 사전에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게끔 약속해두는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떻게 비틀어진 건데?”
도겸은 심란한 와중에도 청의 의문이 풀어지게끔 암호문의 해독 방법을 알려 주었다.
“어렵지 않다. 먼저 쓰려는 한자의 자획을 나누고, 그 글자들을 역순으로 이어서 쓰면 지금 네가 읽은 글자들이 되지.”
도겸이 파자의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곧장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익숙한 소리들이 이어졌다.
물을 따르는 소리, 나무와 유리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는 아마도 벼루에 물을 붓고 연적을 내려놓는 소리일 테고, 그 다음에 뭔가를 드륵드륵 긁는 소리는 먹을 가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써보려는 것이냐?”
“네가 방법만 알려 주고 답은 안 알려 줬잖아.”
도겸은 청이 답을 찾도록 가만 기다려주었다. 물론 그사이에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이래저래 시간이 촉박하다는 결론이 섰다.
“거꾸로 뒤집어서 쓰면 오일화사팔구지일익즙견토증궁수(烏一禾厶八丘止一弋㗊犬土曾弓?)….”
뜻밖에 청이 제법 집중하여 글을 적어나갔다. 먹에 붓을 담갔다가도 가볍게 두드려 먹물을 덜어내고 종이 위를 슥슥 훑는 약한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조사병무기증강.”
헛갈리거나 헤맬 수도 있건만 청은 기어코 답을 찾아냈다. 도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리고 첫 번째 글자는 그저 다른 글자의 음을 빌린 것일 뿐, 특정한 사람의 성씨를 가리킨다. 또한 약속된 것이지. 아니면 그저 동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럼 조 씨 사병 무기가 증강됐다는 거네.”
“…그래. 정확하게 풀어냈구나.”
조익환의 사병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도성으로 진군하면 그대로 반역이 된다는 뜻이었다. 조익환이 어떤 연유에서 이렇게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인가.
하필 휴직을 하는 와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마도.
“조 씨는 조익환을 말하는 거야?”
청이 조익환을 습격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래.”
모르긴 몰라도 대단히 큰 위협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위협을 느꼈다면 목숨을 부지한 도겸에게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또 다른 보복을 할 수 있지 않았겠나.
비록 시력을 잃기는 하였어도 보란 듯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여기저기 퍼트렸으니 지금쯤이면 충분히 듣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재산상으로 큰 피해를 입히기까지 하였다던데 어찌 조용한 것인가. 도겸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런 도겸을 깨운 건 별안간 중얼거리는 청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왔나?”
“뭐?”
알 수 없는 소리에 도겸이 되물을 즈음, 그 답은 맞은편이 아닌 등 뒤의 문 밖에서 들려왔다.
“나, 나리!”
행랑아범이 당혹감이 그득한 목소리로 도겸에게 알렸다.
“어찌 부르는가.”
“그, 좌… 좌상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도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안 그래도 까만 눈앞이 더 짙게 어두워지는 것만 같았다.
“…안으로 모시게.”
“예!”
다른 때 같았다면 겉으로라도 예를 차려야겠지만 도겸은 이제 막 장님이 됐다는 상황을 십분 활용할 참이었다. 쉽게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고르며 청을 내보내려 했다.
“너는 좌상이 불편하거든 안채로 돌아가 있어도 좋다.”
“무슨 소리야. 넌 지금 물고기보다 약하잖아.”
“…그 정도는 아니래도.”
“괜찮아. 좌상이 날 불편해할 테니까.”
청이 고집을 부리는 동안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도겸은 서둘러 서안 위의 서신들을 전부 쓸어다가 대충 손에 닿는 문갑 안에 쑤셔 넣고 일어났다.
“혹 서안 위에 남아 있는 서신은 없느냐?”
“응.”
청에게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도겸은 옷매무새를 살폈다. 보이지 않았지만 습관이 무서운 법이었다.
“좌상 대감 드십니다.”
그리고 사랑채의 문이 열렸다.
***
의금부에 추국청(범죄를 신문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한 청사),이 설치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죄인들을 추국하는 과정을 통하여는 이렇다 할 자백이나 단서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까만 어둠을 밝히는 거친 횃불들이 여기저기 밝혀진 가운데, 추국장 가운데 놓인 화롯불 틈엔 인두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고문 도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지라, 형틀에 묶인 늙은 내관은 벌벌 떨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줄줄 흘려 댔다.
덜덜 떨리는 턱으로는 자신의 죄목을 부정하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혐의가 있다 판단되어 의금부에 하옥된 관계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소인은 참으로 어찌 된 일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본디 추국청의 위관은 의정부의 재상들 중 하나가 맡고 특히 좌의정인 조익환에게 일임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집에 큰 변고를 당한 좌의정을 배려하여 영의정이 위관으로 임명되었고, 오늘은 추국에 진전이 없음을 언짢게 여긴 임금이 직접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친국을 행하고 있었다.
“대사례가 있던 날 사냥터에서 과인이 내린 어사주를 담당한 이가 김 내관이었지. 그리고 최 직각이 그 술을 마시고 쓰러졌는데 어찌 그 입에서는 알지 못한다는 소리만 나오는가!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였다는 증거밖에 더 되지 않겠냔 말일세!”
평소 너그럽고 자상하기만 하던 임금이 엄한 얼굴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언은 참관을 허락받아 한쪽에서 조용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도겸이 깨어났기에 망정이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아마 이렇게 침착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송구하오나 술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온서에서 엄격한 절차에 따라 내어 온 것입니다!”
술에 문제가 없었음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책임자가 억울하다면 무의식중에라도 뭔가 단서를 주리라, 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친국 중인 왕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피해자는 도겸 하나였으나 무려 어사주를 마시고 벌어진 일이기에 임금은 이 일을 모반에 해당하는 중죄로 여겨 엄중히 다루고 있었다.
“술잔에도 문제가 없었나?”
“그, 그것은….”
“자네가 직접 관요에서 생산된 자기를 가져와 하나씩 세척하여 함을 봉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열어 거기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인가?”
내관이 억울한 얼굴로 우물쭈물하였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소인은 그저 별좌가 필요한 주문서를 적어 올리면 결재만 진행합니다. 나머지는 전화나 서리들이 알아서 궁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의 수량과 품목을 확인하고 받아 두었다가 때에 따라 다시 내어 나가는 방식으로….”
“누가 그 과정을 몰라 물은 줄 아나? 그러고도 자네가 내수사 최고직인 정5품 전수라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내관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자 하였으나 형틀에 묶인지라 움찔거리는 게 전부였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에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여 추국을 지연시키면 그에 따른 죄상을 따로 물을 것이니 바로 답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하, 하문하시옵소서!”
“마지막으로 묻겠다. 술잔엔 문제가 전혀 없었다 확신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