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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00)화 (85/197)

“그리 대놓고 좌상의 집을 부숴놓고는 무슨 대책?”

“대충 부수면 명분을 줄까 봐 그 명분, 아예 안 생기게 대놓고 부쉈어. 조설아가 한 손으로 꿩을 잡는 게 믿을 수 없는 일이면 나처럼 작은 여자가 한 손으로 집을 부수는 건 더 납득되지 않는 일 아니야?”

청에게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역시나 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인지라, 깨끗하기만 했다.

“그게 이 땅의 법도라며?”

“…언제는 작지 않다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그땐 내가 심청이 아니었으니까.”

“…….”

어쩐지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머리칼이 모래처럼, 혹은 물처럼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듯했다.

조익환에게 복수를 하였노라 으스대는 청을 보는데 왜 마음이 헛헛해지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도겸은 잘 알고 있었다. 제 품의 여인이 다시 파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로 돌아갈 즈음엔 이 땅에 없을지도 모르기에.

“…깨어났을 때 네가 곁에 없어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직은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표면적으로 청은 쓸모가 아주 많은 존재였기에. 애초에 없었다면 몰라도 청의 능력을 여러모로 경험한 이상 없다면 아쉬움이 너무도 클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보내기가 싫어졌다.

“피곤해서 잤어.”

“네가 좌상의 집을 부순 날, 경강 물가가 꽁꽁 얼어붙은 일이 있었다던데, 네가 한 일이지?”

“이무기가 쫓아와서.”

“또 심장에 무리가 간 것은 아니냐? 어디…!”

무심코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려던 도겸은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청에게서 손을 떼었다. 한 걸음 물러난 그가 나무줄기에 기대어 서글프게 웃었다.

“…이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지도 못하겠구나.”

미련 없다 생각했던 것들이 청을 앞에 두니 하나같이 아깝고 서운해졌다. 그러던 차, 서늘한 손끝이 대뜸 도겸의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두어라. 이게 무슨….”

“이 쓸모없는 눈은 뽑아 버리는 게 어때?”

도겸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눈이 뽑힐지도 모르지 않나.

“아무리 제 구실을 못한다지만 어찌 함부로 뽑아 버리겠느냐. ‘효경’에 이르기를 신체발부 수지부모하니 불감훼상 효지시야…”

“그리고 내 눈을 줄게. 그걸 대신 써.”

“…뭐?”

“나는 눈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넌 더 약해지기만 할 뿐이잖아. 그래서야 내 길잡이 노릇을 할 수나 있겠어?”

“…….”

기가 차고 맥이 쭉 빠져 버렸다. 공자의 말씀을 줄줄 읊어대던 입은 그저 약간 벌어진 채 굳어지고 말았다.

아아, 역시 보내기 싫다. 도겸은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갈 잃어버려도 미련 없이 흘러갈 수 있는 이 여인을, 깊이 두려워하다 원하고 결국엔 은애하게 되었음을.

물론 덜컥 눈을 뽑아내자며 그 언행이 참으로 과격한 여인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왜, 말이 없어? 파란 눈이라 싫어? 네가 지금 눈알 색깔 가릴 때야?”

“…청아.”

“왜요, 오라버니.”

제 부름에 기꺼이 청이 되는 이 여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디에 숨기면 좋을까. 제 순수한 마음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무섭게도 차올랐다. 조금 더 있다간 잠겨 죽을지도 몰랐다.

물이나 다름없는 여인을 연모하게 된 죄는 아주 무거웠다.

“근데 너 또….”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턱까지 차오른 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다.”

도겸은 제 심장에 손바닥을 올려 확인했다. 촉감으로 느낄 필요도 없이 이미 박동은 귓가에 선연히 들릴 만큼 거셌다. 잠시도 쉬지 않고 펄떡이는 마음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겸은 결심했다.

“청아.”

“왜 자꾸 부르시지요, 오라버니?”

“…성수청의 무녀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었다.”

“뭐?”

제 눈을 뽑으려던 청의 손을 잡아 내린 그가 말했다.

“그러니… 찾으러 가자꾸나.”

연모하게 되니 애석하게도 이 여인이 피를 흘리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게 돼 버렸다. 보이지 않아도 모른 척하지 않을 셈이었다.

죄책감과 애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으나 이제는 오로지 애정만을 표하고 싶은 순수한 절실함만이 남았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상대의 행복을 빌고 싶어지는 절실함.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설령, 청이 족쇄를 풀고 파랑의 모습을 되찾아 떠나 버린다 해도.

***

다른 때 같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책을 아끼는 자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한창 열띤 독서 토론을 벌이고 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종이와 먹 냄새가 진한 직제학 송 씨의 사랑방엔 기름진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이리 한다고 도승지가 입을 열겠는가?”

상 위에 그득히 차려진 진수성찬과 항아리째 준비한 술을 보며 임 씨가 의문을 제기했다. 평소 술보다는 차를 즐기는 송 씨도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규장각의 자랑이자 전도유망한 최 직각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 마땅히 사수 된 자들로서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 할 것 아닌가? 자넨 우리 후배가 화를 당해 하루아침에 장님이 된 게 안타깝지도 않아?”

“누가 그것이 슬프지 않다 하였는가? 그저 이게 맞는가 물은 것이지!”

혹시 기루의 문밖에 누군가 들을세라 두 직제학은 차마 언성을 높이지 못하고 속닥거렸다.

“우린 미리 계획한 대로 상 아래 그릇에 적당히 술을 버려가면서 번갈아 마시면 되는 것이야. 도승지가 석 잔을 마실 때 우리는 한두 잔 마시게끔. 알겠나? 자, 이것부터 어서 먹어두게.”

“이게 뭔가?”

“신선불취단 아닌가. 이걸 먹어야 버티지!”

이런저런 약재를 섞어 만든 환은 술에 취하지 않게 도와주는 약으로 그 효능 탓에 신선이 먹어도 취하지 않는 약으로 불릴 정도였다. 임 씨는 벌써부터 질린 표정이었다.

“면신례 때나 먹어본 거라 가물가물해서 말이지.”

“보지만 말고 어서 씹어 삼키란 말이네.”

도승지가 술을 마실 때 술잔이 아니라 항아리째로 마신다는 소문이 있기에, 두 직제학은 대단한 애주가를 상대하기 전 가능한 한 대항할 모든 수단을 끌어모았다.

“도승지가 정신이 없어 보이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걸 마시는 거야.”

“헛개수 말인가?”

“미리 한 잔 마셔두겠나?”

“그럴까?”

이것저것 마시다 보니 본격적인 술자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어르신, 도승지 영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드디어 문밖에서 청지기가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두 직제학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른침을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어서 드시지요. 도승지 영감!”

“이게 얼마만입니까?”

같은 품계라 하여도 직접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수석 승지와 규장각의 직제학은 엄연히 차이가 있는지라, 둘은 열린 방문 안으로 들어서는 도승지를 자연스레 상석에 앉게 했다.

“자네들이 웬일인가? 술도 잘 안 하는 양반들이 술자리를 다 만들고.”

이래저래 민감한 상황인지라 도승지는 역시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왕의 최측근인 도승지는 원체 여기저기서 하루가 멀다 하고 청탁을 받는지라 평소 만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 그것이 신기하여 나와본 게 아니겠나?”

“나이가 들어보니 말이야. 이렇게 동방들끼리라도 좀 모여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야.”

다만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자 방에 함께 이름을 올린 이들은 다른 동료들보다 친밀감이 남다른 법이었다.

거기에 두 직제학은 워낙 주색을 멀리하고 책을 가까이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인지라 설마 뭔가를 부탁할 것이라 생각지 않은 듯했다. 평소 행실을 바르게 해 온 덕에 직제학들은 약속 한 번 잡기 어렵다는 도승지와 단박에 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송 씨가 뿌듯한 얼굴로 먼저 술이 든 주전자를 들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차나 마시고 있겠나. 이렇게 가끔은 술도 마시고 해야지.”

“그래! 이제 억지로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만날 틈도 없는데.”

임 씨가 잔을 들며 부추겼다. 뚜렷한 목적이 없이 단순히 친목의 목적으로 만나기엔 워낙 오랜만인 자리였다. 도승지는 반신반의하며 망설였지만 곧 고양이가 어물전 못 지나듯 익숙한 향에 반응했다.

“혹시 그 술은….”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먼.”

그러자 음흉하게 미소 지은 송 씨가 들고 있던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도승지의 코앞에 들이댔다.

“얼마 전에 평양에 사는 친척이 내게 빚을 진 게 있어 보내온 것이라네. 한데 이 술을 보니 자네가 어찌나 생각나던지… 그래서 뜬금없지만 함께 들자 청해 본 걸세. 자네의 감홍로 사랑이 대단한 것을 뻔히 아는데 어찌 부르지 않을 수가 있냔 말이야.”

당연하지만 송 씨의 집에 우연히 감홍로가 선물로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송현익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귀한 책이나 문방사우를 선물하지 마시지도 않는 술을 선물하진 않기 때문이다.

도승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감홍로는 바로 오늘을 위해 송 씨가 은밀히 큰돈을 들여 평양에서 공수 받은 술이라는 것을.

역시나 동방의 사려 깊은 마음에 감격한 도승지가 크게 기꺼워하였다.

“이리 고마울 데가 있나… 오, 설마 저것은!”

“역시 도승지, 저것도 알아보겠는가?”

멋쩍게 일어난 임 씨가 벽면에 걸린 그림 곁으로 가 귀하신 분을 모시듯 두 손으로 가리켰다.

“이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정말 어렵사리 구한 겸재 정선의 그림인데, 요즘 워낙 시중에 가짜들이 돌아다니지 않나? 근데 마침 도승지가 그림 보는 눈이 출중하니 이참에 한번 감정을 부탁해 볼까 하여 가져와 걸어둔 것이라네.”

“겸재라니, 겸재 정선이라니!”

도승지가 가장 사랑하는 술과 그림이 한자리에 모인 꼴이었다.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이 그저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한 술자리라니, 완전히 무장해제가 된 도승지는 이런 자리가 오랜만인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허어… 자네들, 작정을 한 겐가?”

“허허, 점점 밤이 짧아지고 있지 않나. 일단 술부터 들게나!”

“그래 그래, 그림은 천천히 보아도 좋지!”

환상의 단짝이라 불리는 두 직제학의 부추김에 도승지는 홀린 듯이 잔을 들었다.

“그럼, 어디 한번 마셔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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