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9)화 (84/197)

“그래도 시력을 잃는 대신 살 수 있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책이야 글을 아는 이에게 읽어 달라 청하면 한 번을 읽어도 두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긍정적이니 다행이긴 하다만….”

“두 분이 여기까지 와 주신 김에 먼저 말씀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도겸은 아직 뻣뻣한 몸을 힘겹게 다스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학 대감도 뵙고 말씀드리겠지만 아무래도 사직을 하여야 할 듯싶습니다. 그래서 후임을 어찌할 것인지를 논의 드리고자 하는데, 영감들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책을 읽는 것과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눈이 침침한 것과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더욱 다르다. 며칠간 재활에 힘썼지만 도겸은 단령을 입고 관모를 쓰는 것을 단념해야 함을 깨달았다.

“아직 병자가 어찌 규장각의 일을 걱정하는가.”

“규장각의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빠지면 자연히 다른 각신들이 감당해야 할 업무량이 늘어나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건 자네의 상관인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월권하지 말게.”

냉정하게 잘라 말한 송 씨가 이내 다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눈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나. 당장 사직할 필요 없네. 전하께서도 충분히 쉬며 기한을 주라 윤허하셨으니.”

“전하께서 어찌… 망극한 일입니다.”

도겸의 멍한 눈빛이 침잠했다. 아무리 병약한 모양새라 하여도 꼿꼿하게 앉은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궐 밖이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간은 자네가 혼자 일을 찾아서 과하게 했던 게지. 자네 없다고 윤 대교가 얼마나 천하 태평하게 일하고 있는지 알면 지금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윤 대교는 제가 하던 일들 중에 적당히 골라서 맡기면 더 게으르게 굴진 못할 겁니다.”

“지금 자네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어쩌면 자신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기에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도겸의 푸석하고 여윈 얼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두를 비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아니, 뭐, 어쨌든 규장각 일은 더 생각하지 말게. 회복할 생각이나 하고.”

직제학들은 시선을 주고받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겸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송 씨는 주변을 둘러보며 행여 지나가는 개미라도 들을까 작게 속닥거렸다.

“자네, 대체 어떤 이에게 원한을 산 것인가?”

“그래. 감히 전하가 계신 곳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게, 참 간이 크기도 하지 않나?”

임 씨가 덧붙였다. 그들은 도겸이 독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름대로 알아본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날 우리가 사냥터에 따라가진 못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이 있었다 하지 않았나. 한데 그날 의금부로 압송된 괴한들이 글쎄, 스스로 자결을 해 버리는 통에 배후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더군?”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미리 선수를 쳐 두면 그렇게 하지 못할 줄 알았더니, 보란 듯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지난번 연쇄 살인 사건 때 저하께서 직접 추포하시어 의금부에 가두었던 약쟁이들도 모두 돌연사한 바가 있습니다. 양상이 같은 것으로만 보면….”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같은 자일 수 있다?”

“예. 확실히 저하를 방해하려는 자가 맞지 않겠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최도겸, 저를 죽여서 세자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 봄이 더 정확했다.

“…지난번에 최 직각은 역모라 하였지.”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자라면 최소한 의금부까지 건드릴 만큼 권세가 강한 중신이어야 할 테고.”

임 씨가 중얼거리는 와중에 생각에 잠겨 있던 송 씨가 덧붙였다. 무슨 일이든 둘은 이렇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한 몸처럼 굴었다.

“저하를 괴롭힐 작정이라면 전 빈궁 마마들께서 훙서하신 일도 설마….”

직제학들이 잠시 말이 없어졌다. 도겸은 영감들이 아마 소리 없이 경악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한 눈치는 있는 양반들이니 말이다.

마주 앉은 직제학들이 차례로 차를 급하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송 씨가 헛기침을 하며 작게 사레들린 목을 가다듬었다.

“곧 간택에 들어갈 처자들은 괜찮은 것인가?”

“거기엔 이미 좌상의 여식이 내정되어 있다 하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

“좌상이라면… 규장각을 축소하여야 한다, 그리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렸다지.”

“편전 회의에서는 초계문신들을 교육하는 것도 당장 인력이 부족한 곳이 많다는 이유로 중단시켜야 한다 주장해서 제학께서도 곤란하셨다 들었네.”

세자를 밟아 누르고 왕권을 지탱해 줄 문신들의 양성을 막는다. 군신 간 유지해야 하는 힘의 균형을 이유로 들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은 구태여 덧붙여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최 직각.”

송 씨가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뭔가 도울 일은 없는 것인가?”

***

“나리, 이 나무여유.”

눈이 보이지 않으니 아무리 매일 오가던 집 안이라 하여도 쉽게 걷기 어려웠다. 방을 나와 마루로 나오는 것조차 한세월이었다.

디딤돌 아래 계단들은 생각보다 높았으며 중문의 문턱도 만만치 않았다. 눈 감고도 쉽게 다닐 수 있으리라 여겼던 집 안이 이렇게 크고 넓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도겸은 순이와 함께 집 안을 한 바퀴 돌며 각종 장애물을 두루 익힌 뒤, 안마당의 홍매화 나무 앞에 다다랐다.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도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순이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주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볼썽사납게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도겸은 습관대로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자칫 잘못 더듬어 여자아이를 욕보일까 싶어 멈칫했다.

“…고맙구나.”

“언제든 말씀만 하셔유.”

아이를 귀히 여겨주는 것조차 어려워진 건가 싶어 허탈한 마음에 바로 손을 거두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던 때, 순이가 도겸의 마음을 읽은 듯 그 손에 제 머리에 갖다 대었다.

도겸은 미소 지으며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키가 제법 많이 자랐구나.”

쓰다듬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높이가 상당했다. 또한 앞이 보이지 않기에 새삼스레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맞쥬? 이것 보셔유. 옷소매도 짧아졌구먼유? 손을 들면 이렇게…!”

신나게 자랑을 잇던 순이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역시 도겸처럼 아직 적응이 덜 된 모양이었다.

“…지가 깜빡 혔구먼유.”

“괜찮다. 옷이 짧아 불편하진 않느냐?”

“아유, 그러믄유. 침모 불러서 아씨 옷 지을 적에 지 옷두 많이 지어서 일없슈!”

정작 도겸은 아무렇지 않지만 이렇듯 주변 사람들이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탕약 드실 시간 아니어유? 아주매가 나리 여기 계신 줄은 모르니께 지가 냉큼 다녀올게유!”

“…그래. 뛰지 말고.”

뛰지 말라고 했건만 순이의 발소리가 급하게 멀어졌다. 수다스러운 아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안마당은 삽시간에 적막, 그 자체였다.

도겸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매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꽃이 피어간다고 했는데, 까만 시야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께서 손수 심은 나무였다. 도겸과 함께 자랐지만 홍매화는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꽃이기도 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지아비의 애정과 자식이 지조 있게 자라길 바라는 아비의 소망이 함께 깃든, 소중한 나무였다. 화재가 있던 날 저 나무마저 타 버렸다면 정말 의지할 곳 없이 쓸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건 없지만 느껴지는 게 많았다. 부쩍 자란 순이의 키도 그랬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햇살도, 코로 들어오는 공기도 제법 온유해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줄기의 거친 질감은 생경하기만 했다.

물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젠 아무리 초를 밝힌다 한들 어둠이 걷히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밤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갑자기 들이닥친 비극에 괴로워하고 절망하기엔 단 일각이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났으니 바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무던하게 굴었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대로 죽어 버리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도겸을 깨운 건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린 차가우면서도 물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내 손으로 한 번 더 죽이려고 했어, 최도겸.”

홱 돌아선 도겸이 그대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잡히는 게 없었다. 눈앞이 까맣게 타오르고 콧잔등이 뜨거워졌다. 마음에 불길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어디.”

손끝이 거침없이 빈 공간을 이리저리 뒤적였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 있느냐?”

“…….”

“청아.”

환청을 들은 것일까.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손이 맥없이 무너지려던 차였다.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제 손가락을 힘있게 잡았다.

“겨우 눈이 안 보인다고.”

“…….”

“이렇게 멍청해져서야, 약속은 어떻게 지켜?”

그 순간 도겸은 깨달았다.

내도록 마음 한구석이 쓰리고 허무했던 이유는 바로.

“…그러게나 말이다.”

다시는 청을 눈에 담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청을 당겨 안았다.

“너….”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리 무방비해서야 되겠느냐.”

보이진 않았지만 늘상 현실감이 들지 않던 체온하며, 손가락에 보드랍게 감기는 물결 같은 머리칼이 불안하게 끓어가던 그의 마음을 비로소 가라앉게 했다.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지던 순간에도 도겸은 저 자신보다 청을 걱정했다.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과, 고작 며칠이지만 청에게 일찍이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죄악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게 다가올 지경이었으니.

“어찌… 어찌 그리 대책 없이 굴었느냐.”

어쩐지 청은 도겸을 뿌리치거나 밀어내지 않고 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안겨 있었다.

“대책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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