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8)화 (83/197)

어찌나 부지런한지, 무릎걸음으로 조금씩 기어가며 열심히 바닥을 닦으면서도 아이는 입을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댔다.

“그거 아셔유? 나리 주무시는 동안 날이 제법 따뜻해진 것 있쥬. 지두 모르게 밤이믄 자꾸 이불을 뻥뻥 차면서 자고 있다니께유?”

남산댁이라면 쉬시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겠지만 순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 나리는 늘 학문에 매진하는 동시에 팔도의 여러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 지역의 사소한 정보도 꼼꼼하게 모으셨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순이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여 요즘은 어떤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세심하게 묻던 자상한 분이시지 않나. 비록 편지를 읽어 드릴 순 없지만 자신의 근황과 체감하는 계절의 변화 정도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다.

“아씨가 맨날 지를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구 겁주시던 안마당 매화나무 있잖아유. 거기 꽃봉오리가 올망졸망 얼마나 맺혔는지 몰러유. 내일 아침에라두 뻥뻥 터질 것 같구먼유? 맞다, 산수유도 노랗게 피었쥬.”

이런 때일수록 먼지 한 톨 허투루 앉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순이는 시간마다 들어오는 남산댁의 눈에 띄는 것이 없게 심혈을 기울여 젖은 걸레로 바닥을 닦고 또 마른 걸레로 남은 물기를 깔끔히 걷어 냈다. 문갑 위에 놓인 백자를 조심조심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교우투분허구 절마잠규헌다. 벗을 사귈 적에는 모름지기 끼리끼리 만나야 허구 또오… 옳지, 친구가 정신이 나간 것 같으면은 짤짤 흔들어서라두 야무지게 잡아 줘야 헌다!”

반응 없는 나리께 신나게 떠들고 나면 순이는 틈틈이 부지런하게 익히고 있는 천자문을 외며 청소를 이어 나갔다.

“절의렴퇴 전패비휴. 음, 그러니께… 절개, 의리 그리구 청렴은 좀 물러설 때도 있구, 넘어지고 자빠지면 아니 쉴 수는 없는 것이다? 넘어진 김에 좀 쉬어야 헌다는 뜻이었나….”

이내 집중력이 떨어진 순이는 걸레를 내던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곧 도겸을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댔다.

“그, 그것이. 지가 기억을 못 허는 것이 아니어유. 잠깐 헷갈린 거구먼유?”

이렇게 투덜대면 도겸은 그저 웃으며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느려도 괜찮으니 멈추지만 말라는 말과 함께.

문득 다정한 목소리가 그리워진 순이는 무릎걸음으로 나리에게 다가가 힘없이 늘어진 손을 들어 제 머리에 올려 두었다.

단단하고 큰 손은 아직 따듯하긴 하지만 힘이 하나도 없어 낯설기만 했다. 맥없이 무게감만 느껴지는 건 처음이라 또한 속이 퍽 상하고 말았다.

“나리.”

잘생긴 얼굴이 잔뜩 여윈 채 핏기도 없었다. 순이의 자부심이자 평생의 자랑이던 나리께서 이렇게 오래도록 누워 계신 건 정말이지 처음인지라,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순이는 엉엉 울어 버리지 않도록 눈에 바짝 힘을 주며 참았다.

“조금 이따가는, 일어나시는 것이쥬?”

“…….”

“오늘이 안 되믄 내일이라두, 모레라두 깨어나시겄쥬? 아주아주 늦어두 괜찮은데…. 꽃은 여름에두, 가을에도 피니까 지는 증말 괜찮어유. 꽃놀이는 언제든 가면 되니까….”

꽃이 피는 봄이 온들 무슨 소용이랴. 순이의 세상에서 봄이나 다름없는 도겸이 없으니 아무리 따뜻해졌다 해도 마음이 시리고 추웠다. 며칠 전부터, 순이의 계절은 다시 겨울이었다.

“…그러니께, 꿈나라 유람이 아무리 좋으셔두 꼭 돌아오셔야 혀유. 거기 눌러앉으시면 안 돼유.”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 버리는 터라 아이는 도겸의 품에 폭 안기듯 고개를 묻었다.

“나리, 있쥬. 아무래두 지가 너무 좋아혀서 그런 것은 아닐까유?”

웃음이 나고 마음이 편해질 즈음, 순이는 저를 보호해 주던 어른을 잃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이나 잃을 위기에 처하자 왠지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나리두, 아씨두 너무 좋아서유. 꽃이 다 피믄 나리랑 아씨랑 같이 꽃놀이 갈 생각에 너무 붕 떠 있었구먼유. 다 지 잘못이어유.”

씩씩하게 나리를 보살피며 집 안을 돌보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돌아서면 절로 눈물이 나고 못내 애가 탔다.

가뜩이나 이틀 전 밤에 자러 가겠다던 아씨마저 샘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더 불안했다. 남산댁은 갈수록 날카로워졌고, 행랑아범도 한숨이 늘어 갔다. 아이는 이 모든 상황이 받아들이기 버겁고 슬펐다.

“이제 너무 좋아허지두 않을 것이구먼유. 안 웃을게유. 많이 웃고 싶어도 조금만 웃을게유. 그러니께….”

간절히 청하는 순이의 머리와 어깨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남자의 손에 어렴풋이 힘이 들어간 건 그때였다.

“…으.”

“그러니께, 너무 멀리 가시면 안 돼유.”

제 울음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는 것이 없는 아이를, 커다란 손이 가만 쓰다듬었다. 이불에 눈물 콧물을 쏟던 순이가 멈칫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나리…?”

어린 소녀의 세상에서 가장 너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도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리. 나, 나리!”

벌떡 몸을 일으킨 순이는 두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했다. 젖은 손으로나마 도겸의 손을 잡자 마주 잡아 오는 온기가 있었다.

왈칵하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이번에야말로 꾹 참아낸 순이가 남산댁을 부르러 가려던 차, 커다란 손에 더 힘이 들어가 순이는 벗어나지 못했다.

“…순이, 순이야.”

이리저리 갈라져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순이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 예, 나리! 지 여기 있구먼유!”

“무, 물… 물을 다오. 목이 타는구나.”

“물이유? 물, 물 드릴게유!”

순이는 아무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남산댁이 하던 것처럼 그릇에 물을 담은 뒤, 숟가락으로 조심히 떠 도겸의 부르튼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그러면서도 꿈을 꾸는 건가 싶고 믿을 수 없어 얼마나 눈에 힘을 바짝 주며 끔벅였는지 모른다.

“하아… 나를, 나를 좀 일으켜 줄 수 있겠느냐?”

물 한 그릇을 모두 마신 도겸이 재차 순이에게 부탁했다. 여전히 잠긴 목소리는 거칠기만 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잔뜩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그저 도겸이 살아났으니 되었다. 아이는 최선을 다해 나리께서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유!”

“…크윽!”

오래 누워 의식이 없던 터라 굳은 몸은 일어나 앉는 것도 버겁게 했다. 힘을 받치는 사람도 하필 어린아이인지라 앉는 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이리 누워 있게 되고 얼마나 지난 것이냐?”

간신히 일어나 앉은 도겸이 가장 궁금한 사실부터 물어왔다. 순이는 즉시 작은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계산했다. 다행히 열 손가락을 전부 접을 필요는 없었지만 꼬박 아홉 개를 접고 나서야 셈이 끝났다.

“벌써 아흐레나 되었구먼유.”

“아흐레?”

잠시 눈을 굴리던 도겸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을 더듬어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걱정이 많았겠구나.”

“이렇게 일어나셨으니 다 되었구먼유? 지가 얼른 나가서 아주매랑 아자씨 불러올게유. 조금만 계셔유!”

“그 전에.”

어지러운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이마를 짚던 도겸이 순이를 붙잡았다. 말을 하는 것조차 벅차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는 어렵게나마 쉰 목소리로 할 말을 다했다.

“예, 말씀하셔유.”

“네 탓이, 아니다.”

“예?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빡이며 되짚던 순이의 말간 눈망울에 금세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의 뺨이 다시 젖어 드는 동안 도겸이 혈색 없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다시 말했다.

“절대 네 탓이 아니니 그런 말은 말거라.”

“…….”

“알겠느냐? 대답을 하여야지.”

“…나리!”

아이는 기어이 뛰어들듯 도겸에게 안겼다. 간신히 앉아 있는지라 아슬아슬하게 휘청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두 팔로 아이를 마주 안아 주었다.

“네 탓이 아니다. 어리석은 내가 조심성이 부족하여 그랬던 것이니 결코 그리 생각지는 말거라.”

목이 갈라져 듣기만 해도 아픈 목소리였으나 도겸은 순이에게 약간의 죄책감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순이는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였다. 도겸은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을 하고서도 옅게 웃어 주었다.

“그럼 밀린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간신히 진정한 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부르러 가려던 차였다.

“그런데 너무 어두워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구나.”

“…예?”

순이는 저도 모르게 열린 창문으로 들이치는 오후의 햇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겸은 여전히 허공을 보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불러올 때 불도 가져오너라. 밤이 깊어 누가 온들 분간도 못 하겠구나.”

“…….”

순이는 절로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으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도겸은 수일 만에 봄과 함께 돌아왔지만, 칠흑 같은 밤에 갇힌 채였다.

***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냔 말이야!”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어찌….”

도겸이 깨어나고 며칠 뒤 문병을 온 규장각의 동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낙담하며 괴로워했다. 당사자는 담담했지만 직제학들이 마치 초상을 치르는 사람처럼 슬퍼했다.

“그 눈은, 어찌 나을 수는 없는 것인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긴 했으나 초점이 명확히 맞진 않는지라 직제학 송 씨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의원들 말로는 아무래도 고열에 시달릴 때 눈을 다친 것 같다는데, 돌아올지는 미지수라더군요.”

말을 잇는 것도 잊고 절망하는 송 씨를 두고 임 씨가 대신 대화를 이었다.

“무엇보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게 어딘가 싶긴 하다만, 책을 보는 게 가장 큰 낙인 자네인지라 보통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네.”

직제학들이 호들갑을 떨어 대며 안타까워했지만 도겸은 편한 얼굴이었다. 중독된 상태로 앓을 때 의식이 없었다 해도 괴로웠다는 건 몸이 기억하고 있지 않겠나.

그저 깨어난 지금 아무런 통증이 없다는 그 자체로 사실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