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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7)화 (82/197)

“어떻게든 저희 나리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이리 의식이 없으실 때 자객을 보내든 쳐들어오든 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이려는 게 아닐 수도 있지.”

“그렇다 한들 지금은 저들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일 텐데 조용하다면 그것은 과연 겁을 먹고 위축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좌상의 질긴 목숨줄이 아직 붙어 있는 건 좀 아쉽긴 하다만, 생각할수록 청이 기특하여 남산댁은 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인간사엔 한 줌 관심도 없는 듯이 무정하게만 바라보던 분이 그런 일을 다 벌이시고….”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언도 결국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남산댁은 아마도 서로 같은 생각일 말을 입 밖에 꺼내 놓았다.

“…그만큼 이 땅 그리고 우리 나리께 깊이 정이 드신 게 아닙니까?”

세자와 남산댁은 자연스레 여전히 의식이 없는 도겸을 바라보았다.

고요히 잠든 그의 머리맡으로, 따스한 햇살이 젖어 들고 있었다.

***

“집에 큰 변고가 생겼다 하여 염려하였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군.”

“망극하옵니다, 전하.”

임금의 집무실인 희정당에 든 조익환은 파리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의연한 말투와 태도였으나 그 눈 속엔 온갖 풍파가 불어닥친 듯 불안해 보였다.

따로 꾸며 낸 모습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붉게 충혈된 눈 하며 꺼진 눈 밑은 누가 봐도 며칠 밤을 설쳤다는 증거로 보기에 충분했다. 임금은 다른 때와 달리 국정의 일을 논하기보다 신하의 안위를 먼저 챙겼다.

“아직 안색이 영 좋질 않은데, 며칠 더 쉬지 그런가.”

“어찌 소신이 맡은 바 소임을 잊고 마냥 쉬겠습니까. 어지러울수록 성심을 다하여 나랏일에 매진하여야지요.”

작지 않은 사고를 겪고도 강한 소명감을 드러내는 신하를 본 임금은 크게 기꺼워하였다.

“하긴, 무너지는 집 안에서 살아 나오다니 천운이나 다름없지. 하물며 그리 큰일이 벌어졌는데 경을 포함해 죽거나 다친 이가 없다 하니 얼마나 천행인가?”

“…소신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익환의 떨떠름한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임금이 한시름을 놓은 듯 상체를 뒤로 물리며 자세를 고쳤다.

“자네에겐 유난히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군. 비를 내린 일부터, 갑자기 집이 무너지질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비가 내렸던 일은 그저 설죽소와 별개로 빈민들을 구제하고자 음식을 해서 나누어 주다 다 같이 기도하였다, 그리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우연히’ 참으로 비가 내린 것이고.”

“그렇습니다.”

잠자코 힘이 없이 수긍만 하는 좌의정이 안쓰러웠는지 임금은 새로이 집을 지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왕실 소유의 안면도 송림에서 베어 낸 나무를 하사하겠다며 위로를 표하기도 하였다.

조익환은 통곡할 듯이 감격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일이 이렇게 되니 말이긴 하지만, 과인은 처음에 자네가 집을 새로 짓기 위해 일부러 부순 줄 알았지 뭔가? 이제는 하다 하다 손수 빈민들을 새집을 짓는 일꾼으로 고용하고 삯을 주며 다른 대신들에게 귀감이 되려는 줄 알았지. 그런데 사고였다니 참으로 안타까울밖에!”

묘하게 유쾌하지 않은 위로이자 칭찬이었다. 조익환은 멈칫했지만 그저 지존이 흥분하여 언행의 결이 흔들렸노라, 그리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물론 뒷맛이 껄끄럽긴 했다.

설마 멍청한 지존이 그런 생각을 할까.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습니까. 마침 전하의 말씀대로 근방의 빈민들을 두루 고용하여 잡일이라도 시킬까 고려하던 참이었습니다.”

“역시 좌상이야. 경의 행적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네!”

조익환이 무슨 생각일지 전혀 모를 임금은 끊임없이 감탄의 감탄을 거듭하며 구름을 태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한참이나 조익환을 물심양면으로 위로한 임금이 의아한 듯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자넨 유난히 우연한 일이 많기도 하지. 백성들을 구제하여 명성이 높아질 때만 하여도 하늘이 경을 갸륵히 여기어 비를 내려 주었다 여겼지… 그런데 이번엔 다시 한번 우연히 최 직각을 음해하였다, 그런 오명을 썼으니 말이네.”

조익환은 억울한 얼굴로 감히 어전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소신, 그저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이리 비추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내 경이 얼마나 백성들을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나. 비를 내린 일로 근래엔 명성이 드높아지기까지 하여 얼마나 흐뭇하던지!”

마치 전기수라도 된 양 임금이 과장되게 언성을 높였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런 경이!”

조금은 무성의하게 감사를 표하는 조익환을 향한 임금의 어조가 삽시간에 낮아졌다.

“…어찌 최 직각을 죽이려 하였겠나. 안 그런가?”

희정당의 공기마저 얼어붙을 만큼 음산한 하문이었다. 탁자 위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조익환은 절로 뒷목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간신히 다스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전하. 소신 또한 그런 인재가 위독한 상황이라 하여 어찌나 비통하였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최 직각이 독에 당했다 하니 누군가 직접 음해하려던 것은 분명하겠지 않나. 그 부분에 있어선 경이 비록 오직 선의로만 최 직각을 시사자로 올리고 뚝섬의 사냥에 데려갔다 한들, 아무리 ‘우연히’ 벌어진 사고라 하여도 의심을 피할 순 없을 것이네.”

“하오나….”

“하나 범인이 아마도.”

다시 몸을 앞으로 바짝 세운 임금이 조익환의 말허리를 냉정하게 베어 냈다. 그 용안에 웃음기라곤 한 점도 내비치지 않은 채였다.

“사냥이 끝날 때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과인이 사냥에 참여한 이들에게 모두 술을 한 잔씩 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 그렇게 따지면 좌상이 가장 유력한 범인이 아니겠나?”

“…….”

“물론 그렇다 보기에 경에겐 최 직각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늘 옳고 선한 길만 걸어온 좌상에게 최 직각이 걸림돌이 될 게 대체 무어 있다고. 전 대사헌의 죽음에 참으로 좌상이 얽혀 있고 최 직각이 그 전말을 들춰낸 게 아니고서야….”

“전하!”

“그게 아니라면 이번에 세자와 함께 조사하던 연쇄 살인 사건의 배후가 바로 좌상이었다든지.”

구름에 태울 땐 언제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조익환을 땅으로 처박으려 했다. 즉각 난색을 표하며 반박하려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인 임금이 그제야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니 그리 정색할 것 없네. 그 누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성신(聖臣)인 좌상이 그리 포악무도하고 천인공노할 짓을 하였다 여기겠나?”

“어찌, 소신을 이리도 농락하시는 것입니까.”

마치 화공이 솜씨를 부려 그려 넣은 듯 온화한 표정으로 얼굴을 꾸미고 있던 조익환이 기어이 화를 내비쳤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소신은, 가슴 깊이 사무쳐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리하여 과인도 부언한 게 아닌가. 경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모르고 하는 소리일 텐데 어찌나 한 마디 한 마디가 푹푹 찔러 대는 것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저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다 알고 있다는 경고인가 싶게 느껴질 만큼.

조익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감히 두려운 나머지 용안을 바라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리고 성상의 의중을 가늠해 보았다.

…아니다. 모든 일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중심에 있는 제게 어떻게든 그 진동이 느껴지게 되어 있다.

그 전에 건드리는 즉시 끈적한 줄에 발목이 붙들려 피할 수 없지 않나. 끈질기게 목숨이 붙어 있다지만 그래 봤자 사경을 헤매느라 오늘내일 하고 있을 최도겸만 보아도 그랬다.

“신을 깊게 신임하여 주시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망극한 일이오나 전 대사헌도, 아들 같은 최 직각도 생각만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사온데 어찌 제게 그들이 불의로 입은 화를 가벼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부디 전하께오서는 소신을 깊이 헤아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과인이 실언을 한 것이겠지.”

시커먼 속을 들여다볼 재주 따위 없을 임금이 다시금 좌의정을 달랬다.

“집에 변고가 생긴 것도, 이런 오해를 받는 것에 대하여서도 함께 애통한 마음에 해 본 소리니 마음에 담지 말게.”

알현을 마친 뒤 희정당 밖으로 나온 조익환의 눈엔 그야말로 칼날과도 같은 날 선 분노가 그득해져 있었다.

“…역시.”

궐 안엔 어디에나 듣는 귀가 있기에 입 밖으로 전부 내진 않았다. 그러나 위험한 단어들은 입 안에 시커멓게 고인 채였다.

이제 슬슬 끝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심청이라는 계집 때문에 여의주를 빼앗겨 아주 곤란했다. 거의 다 왔다 생각했던 고지가 다시 멀어진 듯했다. 조익환은 천천히 희정당의 뜰을 벗어나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어쩌면 그 계집의 힘에 압도되었던 그날 밤의 충격적인 경험이 그 자체로 뇌리에 학습이 되어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집을 부순 범인으로 심청을 지목한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영리한 용은 자신이 당한 그대로를 되갚아 주기 위해 일부러 사람이 하였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집을 부숴 버렸다.

제대로 복수를 당한 꼴이었다.

“비록 예상 못 한 변수였으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면 된다. 예기치 못한 변수가 어디에나 있지만 또한 그것을 파훼하고 나아갈 방법 또한 있지 않겠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

“나리, 지 들어가유!”

작은 걸레를 든 순이는 문에 대고 기척을 냈으면서도 머리통만 쏘옥 넣어 안쪽을 슬쩍 확인했다. 늘 사랑문을 열면 먹 냄새부터 훅 풍겼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옅게 느껴져 조금 속상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쉬시는 중에 송구혀유. 그래도 바닥은 닦아 줘야 허니께유.”

까치발을 한 아이는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가 창부터 열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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