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6)화 (81/197)

간밤에만 해도 내내 도겸을 살피다 인정이 치기 직전에서야 돌아가지 않았나. 그런 세자가 몇 시진 만에 다시 왔으니, 아무리 남산댁이라 하여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찌 이리 이른 시각에 오셨나이까?”

“청이는 어디에 있나?”

세자는 어딘가 모르게 얼이 빠진 사람 같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얼마나 말을 내달려 왔는지 그에게서는 옅은 바람 냄새가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른 말은 없이 시종일관 아씨만 찾기에 남산댁은 그제까지 낫처럼 허리를 기역 자로 숙이고 있던 순이를 재촉해 물었다.

“순이야, 아씨 일어나셨는지 확인하였느냐?”

“예? 아, 아씨는….”

눈을 굴리던 아이는 다시금 허리를 바짝 숙이며 조심스레 아뢰었다.

“…아직! 주무셔유.”

그런 아이에게 언이 다급히 다가섰다. 그러곤 누가 들을까 언성을 확연히 낮추어 다시 물었다.

“혹, 간밤에 청이가 밖에 나간 일이 있었느냐?”

“예?”

지난밤 환궁할 때에도 청이 오랜만에 쉬고 있음을 알기에 구태여 깨워서 배웅을 받지 않고 조용히 돌아간 세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이보다는 아직 별다른 차도가 없는 도겸만 걱정하고 있던 국본이 어찌하여 아씨를 찾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어유. 지가 아주 야심할 적에도 살폈지만 그때도 아씨는 계속… 쭉! 주무시고 계셨구먼유!”

왠지 모르게 바짝 긴장한 듯 순이가 말을 더듬었지만 이는 단순히 세자의 앞이면 늘 그랬지 않나. 남산댁은 도리어 아이의 반응이 여상하다고만 느꼈다.

그저 너무 긴장하지 않게 제 뒤로 물려 세우며 대신 덧붙였다.

“지난밤엔 아씨가 쉬고 계시니 저와 행랑아범이 벼룩잠을 자며 밤새 사랑에 계신 나리를 번갈아 가며 살펴 드렸는데, 그때만 해도 안채 쪽에서 별다른 기척은 느끼지 못하였나이다. 어찌하여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하….”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는지라 남산댁이 순이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너는 다시 안채로 가 아씨께서 깨어나셨는지 살피거라. 어서!”

“예? 아… 예!”

아이가 즉각 총총걸음을 치며 재빨리 안채 쪽으로 사라졌다. 남산댁은 기다리는 동안 세자에게 재차 이유를 묻지 않고 우선 제 할 일을 다했다.

“저하, 바로 환궁하실 것이 아니시라면 아침 찬 공기에 혹여 예체가 상하셨을까 저어되옵니다. 안으로 드시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올리겠나이다.”

“그럼 온 김에 최 직각이 안녕한지 보고 가겠네. 사랑으로 가지.”

남산댁은 행랑아범으로 하여금 세자를 사랑에 모시게 한 뒤 서둘러 부엌으로 가 다기와 찻잎, 약간의 다과와 더운 물을 챙겨 내왔다.

“아주매!”

사랑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는데 안채에 다녀온 순이가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소곤거렸다.

“아씨는 아직 샘에 계셔유. 혹시나 싶어 지가 샘물을 이렇게 막, 휘저어 봤는데두 꿈쩍도 안 허셨구먼유.”

“그래, 알았다. 내 저하께 그리 아뢸 테니 너는 가서 마저 아침 먹거라.”

“예.”

순이를 보내 놓고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자 행랑아범이 세자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막 돌아서고 있었다. 행랑아범에게는 세자를 따라온 익위사들에게 따로 음료를 내어 주라 일러 놓고 홀로 사랑채로 들었다.

“저하, 소인 잠시 들겠습니다.”

“들게.”

방으로 들어서자 언은 잠든 도겸의 곁에 앉아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작은 소반을 든 남산댁은 조심조심 들어가 세자에게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차를 우려냈다.

잠시간 다기가 달그락거리는 약간의 소음과 창호지로 스며 들어오는 따뜻한 아침 햇살만이 방 안을 부유했다.

“여긴 아직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

마침내 남산댁이 적당히 우려낸 차를 잔에 담아 올릴 즈음,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도겸을 내려다보던 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남산댁은 정리한 다기를 쟁반에 올려 입구 쪽으로 밀어 두며 차분히 답하였다.

“나리께서 이리 누워 계시는 동안 혹시 몰라 저희도 꼭 필요한 볼일이 아니면 거의 나가지 않고 있던 터라, 바깥 사정에 부쩍 어두워졌나이다.”

“지난밤에….”

남산댁이 올린 찻잔을 든 언이 나직한 어조로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다.

“북촌에 있는 조익환의 저택, 그것도 저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건물들만 창졸간에 파괴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군.”

“예? 갑자기 그 무슨…!”

아무리 남산댁이라 하여도 대경할 만큼 충격적이긴 했다. 깜짝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동안 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머지 설명을 이었다.

“와중에 더 기이한 건 따로 있지. 건물이 무너졌는데 죽거나 크게 다친 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야. 가장 튼튼하게 지어졌을 조익환의 사랑채와 귀한 재물을 모아 둔 광들만 죄다 무너져 큰 피해를 입었고, 부리는 가솔들이 머물던 행랑이며 키우는 가축들은 멀쩡했다는군.”

“…….”

“여기까지 들었다면 자네도 내가 왜 아침나절부터 이곳에 와서 청이를 찾았는지 알겠지?”

사색이 되었던 남산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혹, 누군가 아씨를 목격한 것입니까?”

어쩌면 남산댁이 청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떠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산댁이 알고 있다는 듯 반문하자 언이 약간 안심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아직은 모두들 그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기이한 사태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어떤 거대한 뭔가가 쾅쾅 밟아 누르듯 큰 소리가 나는 것만 듣고 깜짝 놀라 나갔을 때는 이미 사랑채가 반파되어 있었다 하니… 그 어지러운 통에도 뭔가를 본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이 본 게 맞는지 몰라 혼란한 중이라 하였다.”

따지고 보면 청이 그리하였다 한들 괴력난신이라는 말의 뜻처럼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맞지 않나. 청이 그 자체로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내가 급히 청이를 찾은 건 어제 그 아이가 내게 남긴 말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심히 의미심장하였던지라 걱정이 되어 말이야. 도저히 그냥 앉아서 일의 진상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지.”

“과연 소인이라 하여도 가만있진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계속 좌상 쪽의 동향만 파악하며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묻고 답을 듣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이리 온 것인데, 아직 청이는 자고 있다 하던가?”

“예. 그… 샘에 들어가 계신 모양인데, 도통 깨어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옵니다.”

“거참, 이럴 것이면 미리 내게 확실히 언질이라도 주든가 하였어야지 어찌 이리도 대책 없이….”

기어이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언이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남산댁은 이리 심란한 소식에도 도겸이 표정 없이 태평하게 누워 있는 것이 낯설기만 해 주인 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정답게 곧게 잠든 사내는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어 보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라 오해할 만큼 미동도 없었다.

“다친 이가 없다면 좌상 대감은, 용케 건물이 무너질 때 그곳에 없던 것이옵니까?”

“아니, 나도 갑자기 건물이 무너졌단 소식만 대충 들었지 아직 좌상이 직접 나선 것은 아닌지라 잘 알지 못하네. 아직 좌상이나 그의 여식의 부고 같은 게 전해지지 않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리저리 오가던 언이 대뜸 잠든 친우를 보며 역정을 냈다.

“이보게, 최 직각. 자네는 이런 사달이 났는데도 잠만 자고 있을 텐가? 어서 일어나 수습을 하든, 사고가 벌어진 김에 좌상을 제대로 밀어붙이든 해야 할 것 아니야!”

남산댁은 도겸에게 다가가 이불을 정리해 주며 슬며시 맥을 짚어 보았다.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송구하오나 저하, 아직은 아씨가 그리하셨다는 증좌도 없을뿐더러 또한 있다 한들 사람들이 쉽게 믿지 못할 터인데 어찌 그리 안절부절못하시는 것입니까. 그토록 불안해하시면 더욱 의심을 받지 않겠사옵니까?”

“…그렇기야 하다만.”

“거기다 좌상 대감이 아씨께서 그런 일을 한 것을 알았다면 나리께서 이리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계신 것을 기회 삼아 당장 이 집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도 시원찮을 터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무어… 그렇기도 하지.”

남산댁이 조목조목 따질수록 서 있는 것이 멋쩍어졌는지 언이 잠자코 도로 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못내 툴툴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자네도 알지 않나. 궐에서는 이리 방정맞게 굴 수 없어 여기에서라도 마음껏 불안해한다는 것을.”

“미천한 소인이오나 어찌 저하께서 답답하실 줄을 모르겠나이까.”

세자가 이리 조마조마해 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아마 도겸이 아직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가 미칠까 걱정이 되는 게 아니고서야 어찌 저리 두려워하겠는가.

“하오나 설령 아씨께서 벌인 일이고 또한 사람들이 그걸 믿는다 하여도, 저는 아씨를 믿습니다.”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걱정하던 언이 문득 남산댁을 보며 의아해했다.

“자네가? 사람조차 쉽게 믿지 않게 된 자네가 어찌하여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아일 믿는단 말인가? 하물며 사람도 아니지 않나.”

“사람이 아니시기에 믿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허?”

언이 황당해했지만 남산댁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런 남산댁을 시험하듯 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자네는 청이가 그 일을 벌이지 않았다고 우기며 편을 들겠다는 겐가?”

“그것이 아니옵니다. 어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쏟아지지 않았노라, 그리 강변하겠나이까.”

남산댁은 최대한 세자가 침착해질 수 있도록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소인은 그저 아씨께서 마냥 감정대로 움직이셨을 게 아니라 미리 후일을 안배하여 놓으셨으리라, 그리 믿는다는 것이옵니다.”

“흠….”

“이것은 비단 믿음뿐만이 아닌 것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으니 그리 대범하게 움직였던 게 아니겠습니까? 이쯤 되니 소인은 차라리 아씨가 그러하신 게 확실하다면 기꺼울 듯하옵니다.”

“물론 큰 피해를 입었다 하니 속이 시원하긴 하다만.”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언이 슬쩍 본심을 드러냈다. 남산댁은 간밤에 있던 일의 범인이 청일 수밖에 없는 근거를 더 늘어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