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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5)화 (80/197)

“이미 너희들은 최도겸을 한 번 죽였어.”

“최도겸만? 나머지도 전부 갈기갈기 찢어주마!”

“그럼 난 이걸 깨트리고 조익환의 머리도 깨트릴 거다. 그래도 난 딱히 잃는 게 없을 것 같은데? 돌아갈 길을 찾아줄 인간은 또 구하면 그만이니까.”

표독스러운 말들이 오가는 동안 거리는 한참이나 멀어진 채였다. 바락바락 소리치던 이무기가 기어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포효했다.

“죽여 버릴 거야…!”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린 이무기는 갈 길이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

“넌 돌아가서 오줌을 지려가며 죽음을 두려워하던 네 아버지나 돌보는 게 어때? 이건 너나 네 아버지 손에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갖고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거든.”

청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빙글 돌아서 사뿐사뿐 걸어 물가로 올라섰다. 그때까지 이무기가 노려보고 있다는 건 모르지 않았다. 아마 시선에도 물리적인 힘이 있었다면 진즉에 찢겨 죽거나 뚫려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낱 인간에게 이걸 제 의지로 주다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청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작은 인영이 어둠에 물들 듯이 사라졌다. 강가엔 얼음에 붙들린 작은 소녀의 가늘고 긴 비명만이 바람을 타고 너울거렸다.

***

“아씨!”

다소 과격했던 외출을 마치고 조용히 담을 넘어 안마당으로 들어오던 차, 청은 안채 마루에 앉아 기다리던 순이와 대차게 마주치고 말았다.

“이 밤에 어딜 다니셔유!”

이럴 줄 알았다면 몰래 돌아올 수 있도록 지붕에 구멍이라도 뚫어 둘 걸 그랬다. 빽 소리치는 아이의 등쌀에 벌써부터 귀가 아팠다.

“그러는 너는 왜 안 자고 여기 있어?”

분명 모두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과한 힘을 쓰고 온지라 기진맥진한 청은 우선 순이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지는유….”

“아니야, 됐어. 잠깐 산책하고 온 거니까 들어가서 자. 나도 쉴 거야.”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에 어느 정도 적응한지라 이무기 앞에서 간신히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한계였다. 순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어서 가라니까….”

“아씨!”

어서 가 주면 좋겠는데, 아이가 덥석 청의 품에 안겨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짭짜름한 눈물 냄새가 났다.

“너무… 너무 무서운 꿈을… 근디 아씨는 없구우….”

별말 없이 숨을 몰아쉬는데 울던 아이가 느닷없이 자신이 우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아씨가 갑자기 사라지셔서 그런 것이니께 지 탓 하시믄 안 돼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두 안 되는 것이어유!”

청은 가물가물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차피 울지 말라고 다그칠 힘도 없었다.

“누가 뭐래?”

“그동안 쭉 뭐라구 허셨으니께유….”

버럭 화를 내면서도 어딘가 물기 어린 목소리더라니, 청이 도착하기 전부터 혼자 캄캄한 마루에 앉아 울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그럼 내가 왔는데도 우는 이유는 뭔데.”

“그것은 지가 꿈을 꿨구먼유. 근데 나리가, 나리께서유….”

“왜, 꿈에 최도겸이 죽기라도 했어?”

별생각 없이 되물었을 뿐인데, 아이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더듬거렸다.

“우, 우째 그런 말씀을 쉽게 입에 담으셔유!”

“어렵게 담을 건 또 뭐야.”

“안 돼유. 나리는 이대로 가시믄 안 된단 말이어유….”

화를 내면서도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우는지라, 청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싫으면 멀리하고 좋으면 소유하며 지극히 단순히 살아온 세월만 수천 년이다.

그런 용에게 연약한 인간들의 복잡한 감정이란 아마 이 땅의 모든 법도를 익힌들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할 숙제가 아닐까.

“…안 죽어. 내가 저대로 죽어 버리게 둘 것 같아?”

아이의 따끈한 체온이 몸에 닿아 있는지라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하도 부대끼다 보니 적응이라도 된 것일까. 마냥 불쾌하지만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뿌리치거나 피하지 않은 것만 봐도 확실히 그랬다. 무뎌진 것일까, 힘이 없어 둔감해진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러니까 너도 겁먹지 마.”

어떻게 떼어 낼까 고민하던 청은 다른 인간이 하는 예를 따르기로 했다. 물론 마주친 인간이 많지 않은지라 따를 수 있는 예는 최도겸 한 사람에 불과했다.

“네 꿈까지 쫓아 들어가서 지켜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단 말이야.”

머뭇거리던 하얀 손이 곧 까만 머리통 위에 가볍게 놓였다. 자칫 아까 조익환의 집을 때려 부술 때처럼 내려쳐서 아이를 다치게 할까 싶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러곤 천천히, 보드랍게 뒤통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고작 몇 번 쓰다듬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겁을 주어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것보다 빨리 잦아들었다.

우는 아이는 보듬어서 달랜다는 것을 처음 배우는 순간이었다.

“…아씨.”

여전히 코를 훌쩍이면서도 드디어 눈물이 멎은 아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청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돼유?”

청은 고개를 기울이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너도 물속에서 잘 수 있어?”

“…예?”

“난 샘에 들어가서 잘 건데, 숨 쉴 수 있으면 따라오든가.”

그 말에 순이가 다시 입술을 비죽이며 시무룩해했다.

“꼭 오늘 물에서 주무셔야 혀유? 지랑 같이 자는 게 싫으신 것 아니구유?”

“둘 다야. 지금껏 누구랑 같이 자 본 적 없어.”

여간 끈기 있는 녀석이 아닌지라 순이는 굴하지 않고 졸라 댔다.

“멀리 떨어져서 문 옆에서 잘게유. 딱 붙어서 잘게유! 같이 자는 것 같지 않게 같이 자 볼게유!”

품에서 순이를 떼어 내 슬쩍 뒤로 밀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고집스레 청에게 들러붙었다.

“…안 돼유?”

“응, 안 돼.”

매정하게 대꾸하는 순간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내 올려다보던 순이의 눈이 함지박만 해졌다.

“아, 아씨, 코에서 피 나유! 이를 우째유? 괜찮으셔유?”

“뭘 어떡해. 닦으면 되지.”

하필 이럴 때 달이 밝아져 아이의 눈에 고스란히 내비치고 말았다. 청은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으로 닦아 내어 수분만 날린 뒤 손을 털어냈다.

그러곤 순이가 더 호들갑 떨지 않게 콧속을 얼려 피가 더 흐르지 못하게 했다.

“이제 안 나지? 그러니까….”

“아씨!”

간신히 보내려는데 아이가 다시금 청에게 안겨 흐느꼈다.

“아씨는 어디 상하시믄 안 돼유. 다치셔두 안 되구먼유!”

“…지금 네가 제일 힘들게 하고 있거든.”

한숨 섞인 투로 중얼대면서도 청은 다시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투박하기만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가서 자. 그리고 최도겸처럼 약한 인간이 나오는 꿈이나 꿀 거면 차라리 내 꿈을 꾸도록 해.”

“그게 지 맘대루 된데유? 차라리 꿈을 꾸지 말라구 허시면 몰러두….”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아이가 툴툴대며 물러났다. 그러곤 대청에 올려 둔 베개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왜 아씨 꿈을 꿔유?”

“난 져 본 적이 없거든. 당연히 꿈에서도 절대 안 죽겠지.”

“그게 뭐래유. 꿈은 원래 반대…!”

무심코 대꾸하던 순이가 뭔가를 깨달은 듯 베개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물기 어린 눈이 반짝였다.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못 혔는데, 사실 그건 나리께서 사신다는 꿈이었나 봐유!”

단순히 꿈에 그런 의미 부여를 하는 인간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청은 아이를 방으로 돌려보낼 목적에 별생각 없이 그 의견에 수긍하며 동의했다.

“그래. 최도겸 안 죽는다고 했잖아.”

“알았어유. 가서 잘 테니까 아씨도 이제 혼자 어디 가시면 안 돼유!”

신신당부한 아이가 베개를 안고 방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돌아섰다.

“그리구 한 가지 더 있는데….”

“빨리 말해.”

지켜 주겠다 약속한 아이의 앞에서 혼절하는 꼴은 보일 수 없는지라 청은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텼다. 와중에도 천진한 아이는 자신의 문제가 너무도 크게 느껴진 나머지 청의 창백한 얼굴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 지가 오늘 같이 자자구 헌 것은 남산댁 아주매한테 비밀로 해 주시믄 안 돼유?”

대체 이런 이야길 왜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대충 허락부터 했다.

“알았어. 대신 너도 내가 나갔다 온 건 비밀로 해야 해.”

“아….”

비밀로 하자는데 왜 또 아이가 눈을 반짝이는지는 모르겠다. 초롱초롱한 눈을 도로록 굴리던 아이는 뭔가 대단히 결연한 얼굴이 되어 턱이 빠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슈. 아씨가 간밤에 산책 다녀오신 것은 지가 무덤까지 주둥이를 단속혀서 꼭! 비밀 지킬 것이구먼유?”

“…뭐, 그래.”

꼭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릴 일은 아닌지라 청은 별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밀이 생긴 아이는 폴짝폴짝 뛰어 중문을 나섰다.

“그럼 쉬셔유!”

청은 귀를 기울여 아이가 정말 방으로 돌아가는지까지 확인한 뒤, 간신히 긴장의 끈을 놓았다.

“…큭!”

마음을 놓자마자 간신히 참고 있던 심장의 통증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한 방울도 흘리기 아까운 피가 입술 사이로 스며 나왔다.

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무기를 막으려다 기어이 금이 가다 못해 틈이 벌어진 심장으로부터 새어 나온 힘을 통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휴식이 절실했다.

이번에야말로 더 주저하지 않고 샘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들었다. 그러곤 샘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몸을 웅크리고 어렵사리 잠을 청했다.

빼앗아 온 이무기의 여의주를 꼭 품은 채였다.

***

“청아, 청아!”

깊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마자 조강도 생략한 언이 도겸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늘 늦은 오후나 저녁에 들르던 세자가 꼭두새벽부터 들이닥치자 어김없이 아침을 준비하던 가솔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늘 그랬듯 마당을 쓸고 집 안을 돌보던 이들은 대문 앞에 서서 들어서는 세자를 맞이했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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