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나무구나.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면.”
설마, 한 손으로 던졌다 받고 있는 것인가. 조익환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언제 죽을 건지 고르지 않았잖아.”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몰라 정신없이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기부터 쉽지 않았다.
“차라리 나를 내려주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는 최도겸 그자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전부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대로 나를 죽이면 더 손해일 터!”
“…지금 죽겠다는 의미구나.”
“아니…!”
나름의 승부수를 던졌지만 역효과였다. 이번엔 나무 장이 붙들리지 않고 뚝 떨어져 내렸다. 몸이 부서지기 전에 심장이 먼저 바닥으로 내려앉는 듯 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꼼짝없이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나무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격렬한 소음과 함께 일부가 부서지고 웬 손이 조익환의 목을 쥐고 밖으로 끌어냈다.
실로 경악할 만한 괴력이었다.
“…이 땅의 인간들은 명분으로 다툰다기에 참으로 지루하게 싸우는구나 했는데, 돌이켜보니 꽤 재밌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던 조익환이 조심스레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땐 한 손으로는 제 멱살을, 다른 손으로는 절벽의 어딘가를 붙잡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심청이 보였다. 푸른 머리칼이 아래로 쏟아져 마치 물결처럼 너울거리는 것이 하얀 달빛에 섬뜩하게 비쳤다.
“여기서 너를 떨어트리고 혹여 의심을 받거든 어찌 이리 작은 몸으로 그 커다란 집을 초토화시키고 좌상 대감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발뺌하면 그만이 아닐까? 네가 다루는 이무기가 가녀린 손목으로 어찌 꿩을 죽였겠냐고 울먹였던 것처럼.”
“…….”
“아니지. 여기라면 네 시체가 쉽게 발견될 것 같지도 않은데.”
조익환은 가느다란 여인의 팔에 매달려 다소 치욕적이라는 것도 잊고 생존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사, 살려다오!”
“그 말은 최도겸보다 먼저 죽고 싶진 않다는 뜻이야?”
조익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최도겸이 당연히 죽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을 종잇장 뒤집듯 손쉽게 바꾸기까지 하였다.
“그럼 품에 있는 여의주를 내놔.”
하지만 이무기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칼자루를 내놓으라는 용의 명령에 조익환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다른 인간들을 압도하여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은 모두 이무기의 힘이 있어서였지 않나.
“왜?”
당혹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용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냥 죽는 게 낫겠어? 뭐, 그래도 상관은 없어. 나야 너를 죽인 다음 네 몸에서 꺼내어 가면 그만이니까.”
“나를 살려주면… 넘기겠다.”
그러나 조익환은 다음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똥 밭을 구른들 이승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주저하는 손으로나마 품에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보관하던 여의주를 꺼내었다.
다시 회수하면 된다. 매끈한 구슬을 건네자 용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근데 이걸 어쩌지?”
여의주를 받아 든 용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지라, 미처 그 선이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당혹스러운 내용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도 손은 두 개뿐이라….”
그리고 용이 여의주를 받기 위해 놓아 버린 제 몸을, 차가운 바닥이 열렬히 잡아당긴다는 사실도.
“……!”
잠시 느릿하게 보이던 용의 형체가 삽시간에 멀어졌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가 하는 말을 전부 들을 수도 없었다.
어이없을 만큼 허무한 끝이었다. 그렇게 조익환은 삶의 경계를 지나 죽음의 경계로 넘어갔다.
“…아버지!”
수직 낙하하던 조익환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 때문이다. 동시에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자연의 순리를 이기며 몸을 받쳐 드는 힘이 있었다.
“아버지 죽지 마!”
간신히 눈을 뜬 조익환의 시야에 들어온 인영은 이무기.
아니, 조설아였다.
***
조익환을 혼쭐내준 청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휑한 강가에 서서 가만 밤의 고요를 즐겼다.
달빛을 머금고 일렁이는 검은 강물은 소녀의 수줍은 홍조처럼 달아오른 저녁 무렵의 광경과는 또 다른 정취를 풍겼다.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낮에 비해 소리의 자극이 현저히 줄어드니 예민한 신경도 한결 무뎌지는 듯했다.
잠시 숨을 돌리려던 것이었지만 물을 두고 그냥 지나치는 건 어물전을 그냥 지나가는 고양이처럼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조익환의 몸에 닿은 손이 썩어가는 기분인지라 청은 더 고민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었다.
달빛은 햇빛보다 물을 깊게 파고들지 못하는지라 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청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치 하늘을 날 듯 거침없이 물속을 빠르게 유영하며 썩은 내가 나는 부정을 씻어내고자 했다. 물속의 많은 생명체들은 격이 다른 존재에게 서둘러 길을 터주고 자리를 피했다.
“아….”
하지만 아무리 고속으로 내달려도 역시나 제 바다만큼 정기가 충족되진 않았다. 최도겸을 살리겠다고 피를 상당량 쏟아 낸 데다 계속 힘을 쓰기만 했지 따로 배부르게 채우진 못한지라 극심한 기갈이 이어졌다.
“…이러다간 내가 죽을지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제 명을 다 살기 전에 말라 죽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청은 자연히 이렇게 물이 많은데도 기껏해야 작은 샘에 불과한 최도겸의 집보다 정기가 부족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따져보았다.
“바닥을 좀 더 깊게 파보아야 하나.”
수면 위로 올라간 청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표류했다. 마냥 검기만 한 지상과 물위와 달리 하늘은 밤에도 오묘한 북청 색을 띠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조익환에게서 빼앗아온 이무기의 여의주를 꺼내어 하늘에 비춰보았다.
이무기의 구슬은 보통 모든 색이 섞인 검은 빛을 띤다.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다름없었다. 크기는 고작 엄지손톱만 해도 들어 있는 힘은 또한 생각보다 대단했다. 못해도 오백 년은 된 구렁이가 그동안 모은 도력을 응축시켜 만드는 결정체이니 말이다.
“아직 덜 여물어 여러 번 쓰긴 힘들겠지만….”
한 사람 목숨 정도는 너끈히 살리지 않을까. 비록 같은 용은 다른 이무기나 용의 여의주를 쓸 수 없다지만 이것을 순이나 남산댁에게 주고 도겸을 살리도록 소원을 빌게 한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도겸이 일어나야 제가 집에 돌아갈 방법을 찾기도 쉬워질 테고, 무엇보다 청룡의 신물을 가진 무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돌아갈 방법을 파악하기도 전에 벌어진 불상사라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니 더더욱 당장 손 안의 여의주를 쓰는 게 맞지 않겠나.
그러나 청은 이 쉬운 길을 눈앞에 두고 멈춰 섰다.
“…….”
“…….”
죽어가는 인간의 목숨을 살리는, 어쩌면 섭리를 거스르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이 여의주는 소원을 비는 순간 그 자리에서 깨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만치 강가에 서 있는 이무기는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낸들 다시 여의주를 빚어낼 수 없을 테고 당연히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없다.
그걸 알기에 청은 이런 식으로 최도겸을 살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최도겸을 살리고자 이무기를 죽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내 구슬 내놔!”
입을 열기가 바쁘게 가공할 속도로 물 위를 뛰어 넘어온 이무기가 청에게 들이닥쳤다. 고요의 시간은 끝이었다. 즉시 몸을 뒤로 물려 공격을 피했다.
“이상하지. 넌 일찍이 이걸 조익환에게서 빼앗아 충분히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청이 무슨 말을 하든 단단히 화가 난 이무기는 무섭게 달려들 뿐이었다.
“왜 그동안 되찾지 않은 거지?”
“내놔. 내놔. 내놔!”
수면을 길게 긁으며 미끄러져 물러나는 동안 양옆으로 높이 솟구친 물이 비산하며 쏟아졌다. 강한 힘이 물을 못살게 구는 터라 강물에 때 아닌 너울이 일고 조금 더 했다간 강변에 파도가 칠 기세였다.
와중에도 청은 조익환에게 굴던 것과 달리 방어적으로 굴었고, 이무기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내 거야! 내 거라고! 내 구슬 내놔!”
“…설마.”
별안간 우뚝 멈춰 선 청의 주변으로 충격을 고스란히 감당한 물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조설아가 기어이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입을 쫙 벌리며 쇄도했다.
이대로는 이무기의 입 안으로 꿀꺽 삼켜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혀 두렵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 이무기를 더 바짝 약오르게 했다.
콰악! 끝이 갈라진 혀를 길게 내뺀 이무기의 어금니가 청을 막 찍어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
일순 꼬리를 붙잡히기라도 한 양 그대로 멈춘 이무기가 동공을 길게 찢으며 하악질을 해댔다.
공격이 멈춘 것은 결코 이무기의 의지가 아니었다.
“네가, 네 의지로 여의주를 조익환에게 준 거야?”
시공간이 멈춘 듯 세차게 솟구치던 물길마저 이무기와 함께 그 자리에서 멎었다. 청이 근방의 수면을 찰나의 순간 모두 단단하게 얼려 버린 탓이었다.
방울져 튀어 오르던 물방울만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뿌옇게 시야를 방해하던 물안개마저 하얗게 얼어붙어 눈처럼 흩어졌다.
“…내놔.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얼음에 붙들린 채로는 말을 할 수 없는 탓인지, 아니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구속을 풀기 위함인지 작은 소녀로 돌아온 이무기가 청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나 청은 소녀의 작은 발길마저 차가운 족쇄로 묶어 가두었다.
“그렇다면 돌려주고 싶지 않은데.”
“뭐?”
청이 만들어 낸 얼음은 마치 밧줄처럼 이무기의 다리를 더 타고 올라가 하체를 아예 꽁꽁 묶어두기에 이르렀다.
“그런 이유라면 이건 내가 가져야겠어.”
상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청은 자유로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이무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때마다 빙판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내놔. 당장 내놓지 않으면 최도겸의 명줄을 내 손으로 끊어놓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