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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3)화 (78/197)

“그럼 세자 저하께서는 적당히 계시다가 조심히 살펴 가시옵소서.”

문 앞에 다다라 다시 한번 필요한 만큼의 예만 갖추어 허리를 숙인 청이 밖으로 나갔다.

“…너는 저리 자유분방한 누이가 걱정되지도 않느냐? 어서 일어나 단속하여야지 어찌 이리 무방비하게 누워있느냔 말이다.”

언이 너무 깊게 잠든 친우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청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둘러 물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더 힘을 비축해야 했다.

***

“좋은 찻잎이군.”

다관에 우러난 차향을 음미한 조익환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마주 앉은 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극상품 화전차입니다. 대감께서 차를 즐기신다 하여 시중엔 나오지도 않는 것을 아주 어렵게 구한 것이고요.”

어둑한 밤, 고요한 촛불이 내는 노란 불빛 사이로 찻물의 따스한 김이 하늘하늘 피어올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마치 하얀 옷을 입은 무희들이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연회가 벌어진 것도 같았다.

“궐에도 이만한 상품은 못 들어갈 겁니다. 지금 대감께서 조선 최고의 찻잎을 다루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그리 생색내지 않아도 이런 찻잎은 쉽게 구하기 어렵다는 것, 잘 알고 있네.”

“대감과 아주 어울리는 찻잎이 아닙니까.”

“그만큼 제대로 우려내지 않으면 가치가 없지 않겠나.”

“또한 대감께서 가장 잘 다루실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물의 더운 정도와 찻잎을 우려내는 시간, 그리고 따를 찻잔까지 적당히 데워두는 데엔 팽주(찻자리의 주인)의 재량이 아주 중요했다. 다소 위험한 수준의 아첨을 들은 조익환은 나직이 웃으며 차를 따랐다.

“들게.”

“감사합니다.”

고운 차향이 공간을 채웠다. 좋은 선물도 받았겠다, 조익환은 적당한 답례를 건넸다.

“조만간 자네 아들에게 적당한 자리가 하나 날 것 같네.”

“그렇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가 화색을 보였다.

“동궐 후원의 부용지를 지척에 두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규장각… 말씀이십니까?”

“거기 딱 한 자리밖에 없는, 직각 말일세.”

“직각이라면 며칠 전 피습을 당한 뒤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던 전 대사헌의 아들이 맡고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맞네. 내 내의원에 들렀다가 전해 듣기로는 언제 절명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 하더군. 그렇다면 당장 전하를 보필하며 규장각을 책임지는 그 중요한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지 않겠나?”

며칠 동안 세자가 온 궐을 벌집 쑤시듯 쑤시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모살이 어찌 이루어졌는지 사태를 파악한들 최도겸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자네 아들은 당분간 도성에 머무르며 대기하고 있으라 이르게.”

“예, 대감. 정말 감사…!”

콰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 이 무슨!”

“대감,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매사에 느긋한 조익환이라도 느닷없는 날벼락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귀하다는 작설차를 한 모금 마셔보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머리를 보호한 이들은 서둘러 입구 쪽으로 향했다. 와중에도 거대한 뭔가가 지붕을 짓밟기라도 하는지 요란한 난리가 계속 되었다.

“으악!”

간신히 몇 걸음을 떼어 입구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들보가 무너지며 두 사람은 애매한 틈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난데없이 개죽음을 당하게 된 꼴이었다.

집에 머무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도 많은지라 당연히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비단 사랑채가 있는 건물만 무너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포, 포탄이라도 맞은 게 아닙니까?”

“한양 땅에 포탄이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하게!”

“그럼 이 난리는 말이 되는 것입니까, 대감?”

“지금 쓸데없는 소리나 할 땐가! 그 주둥이 닥치고 나갈 생각이나 하게!”

다행히 지지대의 역할을 하는 천장의 나무들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며 큰 충격에도 어찌 버티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조익환은 기지를 발휘해 함께 있던 이도 제쳐놓고 아직 멀쩡해 보이는 2층짜리 큰 나무 장의 아래층 문을 열고 비집고 기어들어 갔다.

단단한 오동나무로 만든 장인데다 위층엔 이불이 두껍게 들어가 있어 건물이 완전히 무너진다 해도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을 터였다. 조익환은 잡히는 대로 옷을 가져다 머리와 목을 감쌌다.

“대감! 저는 어찌합니까! 저도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충격에 빠져 공황에 휩싸인 이가 밖에서 정신없이 나무 장을 두드렸지만 조익환은 결코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저 혼자 몸도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참이었다.

“내가 지금 자네까지 챙길 겨를이 있어 보이는가?”

“어찌 이러십니까!”

“살길은 알아서 찾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충격음은 연이어 몇 번이나 더 이어졌다. 천지가 뒤집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지. 설아 이 녀석은 이런 때에 대체 무얼 하는 것인가?”

품속에 손을 넣은 조익환이 작은 여의주를 꽉 쥐었다. 깨트릴 듯 손에 힘을 주었지만 결코 깨트려선 안 됐다. 사방이 무너지는 난리 통에도 더 높은 곳에서 강하게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구태여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을 때 이무기는 강바닥 아래로 들어가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지라 당장 집에 없는 게 문제였다. 부름을 받고 도착했을 때 제 목숨이 제대로 붙어있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으, 으아악…!”

함께 있던 이는 결국 뭔가에 깔리기라도 하였는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이후 조용해졌다. 귀찮은 소음이 하나라도 줄어 다행이라 여기던 차, 이후로도 몇 번인가 천지개벽하는 충격음이 귓구멍에 짓쳐 들었다.

아무리 조익환이라 하여도 다음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자 의지와 상관없이 손발이 덜덜 떨렸다.

“어찌… 어찌….”

귀를 틀어막고 어서 이무기가 와 구해 주든, 혼란이 끝나든 하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차였다.

“아직 안 죽었네?”

머리가 울릴 만큼 강한 소음이 아닌 그저 나무 장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귀에 쾅! 하는 소음이 여러 차례 박혀 이명처럼 울리던 차라 작은 소리에도 조익환이 절로 움찔했다.

“누구… 누구냐!”

“가여운 나무구나. 뿌리를 내리고 서 있지도 못하고 잘려 겨우 이런 인간의 집을 장식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런 인간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고 있다니.”

이 난리 통에 홀로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여인이었다. 혼란한 와중에도 조익환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알아차렸다.

“심…청.”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어째선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 보기를 줄 테니 너는 하나를 고르도록 해.”

“무,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지금 죽겠느냐, 아니면 죽어가는 최도겸의 목숨이 끊어진 직후에 죽겠느냐?”

이무기를 불러두었으니 조금만 시간을 벌면 된다. 조익환이 말을 고르는 동안 밖에선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마, 이무기를 기다리는 건가?”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인가. 분명 이무기의 말에 따르면 용이긴 하지만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조익환은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여기까지 쫓아오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지금 네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그야 나는…!”

답을 하기도 전에 나무 장의 문이 열리고 차가운 어둠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늑한 방 안의 촛불과 하얀 무희들의 춤이 꿈이었던 것인지,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조익환은 조심스레 밖으로 기어나가고자 하였다.

“…으헉!”

무너진 집의 잔해를 조심스레 짚고 나가려 하였으나 손바닥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지금 죽는다고? 그럼 그대로 나서면 돼.”

“그럴 리가!”

허공이었다. 상체에 조금만 더 힘을 실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면 꼼짝없이 형체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고꾸라져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던 차, 나무 장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려 조익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졌다.

“이… 이곳은 어디더냐.”

나무 장을 통째로 들고 어딘가로 옮겨온 게 틀림없었다. 풀냄새가 짙고 음습한 기운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아 어느 깊은 산속 절벽이 아닌가 가늠해 볼 뿐이었다.

조익환은 다시 한번 여의주를 쥐었다. 곧이어 하늘에 음울한 천둥이 일었다.

“내가 준 선택지 중 고르라고 했지 이무기를 부르라고 하진 않았어.”

다시 한번 나무 장이 거칠게 흔들렸다. 붙잡을 것이 없는 조익환은 다급히 문 반대쪽 벽에 기대어 떨어지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최 직각은 내가 죽이지 않았다! 어찌 내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손을 거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선은 상대의 화를 다스리는 게 급선무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조익환은 최대한 대화로 풀어보고자 했다.

“나, 나도 아끼던 이가 그리 되어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몰라!”

“아까 다른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보니 아직 죽지도 않은 최도겸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주겠다 말하는 것 같던데.”

“…….”

“감히 내 앞에서 그 더러운 혀를 놀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지?”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나무 장이 붕 떠올랐다. 조익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벽을 짚고 몸을 고정시켰다.

아래로 뚝 떨어지는가 싶던 나무 장은 모로 기울어진 채로 탁!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붙들렸다. 그러나 안도하기도 잠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위로 떠올랐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찰나에 몸이 바닥에 짓눌렸다 가벼워져 중심을 잃고 내동댕이쳐지길 반복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이 어지러워 현기증이 일었다.

“멈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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