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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92)화 (77/197)

“귀찮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식을 때까지 차가운 물이나 얼음에 가둬두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나약하디 나약해 자칫했다간 독에 죽기 전에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언의 진심어린 조언이 있었다.

청은 수건을 물에 적셔 손바닥 위에 두고 단단하게 얼린 뒤 도겸의 뜨거운 이마에 올려두었다.

“아….”

그러다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심장을 움켜쥐었다. 자잘하게나마 지나치게 여러 번 힘을 쓰니 무리가 간 듯싶었다. 그 사실로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 터라, 청은 무겁게 눈을 깜빡이며 이를 갈았다. 분노는 고스란히 도겸을 향했다.

“넌 죽으면 안 돼.”

하지만 얼음만큼 차가운 것이 아니고서야 물수건은 이마에 올리기가 바쁘게 타들어 가듯 말라 버리니 별수가 있겠는가.

천변이며 경강 물도 모두 봄이 오면서 녹아 버린 지 오래라 얼음을 구할 곳이라곤 제 힘이 전부였다. 처음 한두 번은 세자가 석빙고에서 얼음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청이 만들어 낸 밀도 높은 얼음보다 쉽게 녹아 버리는지라 그다지 쓸모도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내가 널 꿀꺽 삼켜 버릴 거거든.”

용의 힘은 심장으로 모이고, 다시 심장에서부터 뿜어져 나온다. 한마디로 혈관을 타고 다니는 힘을 억지로 뽑아내어 도겸에게 먹인 것이다. 반지 때문에 쉽사리 재생도 되지 않는 상황에 심장에 통증이 생기고 어지러운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생긴 문제일 터.

“…아니, 그냥 안 삼키고 꼭꼭 씹어 삼킬 거야. 그럼 나는 조금이나마 잃은 힘을 되찾고, 너는 죽은 게 후회될 만큼 괴로울 테니 일석이조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어?”

퉁명스럽게 도겸의 면전에 대고 무서운 말을 쏟아 내는데도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전엔 무슨 말을 하든 허점을 찾아내 요목조목 반박하던 겁 없는 인간이, 이번엔 두려운지 청의 말에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너는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인간이니까. 그리고 내 생각과 결정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한 방울의 힘도 낭비하기가 아깝다 말하기가 바쁘게 청은 도겸의 이마에 올려놓은 물수건이 녹아 관자놀이로 물이 흐르자 즉시 손을 들어 다시 물수건으로 물이 모이게 했다.

“너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이 되지 않게 분발하도록 해.”

최도겸은 참으로 건방졌다. 아무리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도 늘 청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 보호하던 이였으니까.

강한 용인 ‘파랑’이 필요하다고 한 것과 달리 행동은 전혀 그녀를 강한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늘 손에 쥐면 뭉개질 꽃 떨기를 대하듯 조심히 여기고, 몸이 닿으면 그 심장부터 요동치며 발작하지 않았나. 경외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반드시 일어나.”

언행도, 행동도, 심장의 박동마저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길 같은 사람.

그런 부분만 놓고 보면 누구보다 순수하기에 또한 청에게는 최도겸이라는 인간이 연구대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껏 살며 이런 희귀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일어나기 전까지 네 친우도 매일 귀찮게 찾아올 듯하니.”

“최 직각, 나일세.”

청이 가만 중얼거리기가 바쁘게 언이 사랑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내의원의 의관을 대동한 채였다.

“자네는 어서 최 직각의 진맥부터 확인하고 필요한 진료가 있다면 하게.”

“예, 저하.”

세자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 여인을 의아하게 생각할 만도 하건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이젠 포기한 듯싶었다. 의관은 조용히 청의 맞은편으로 들어와 앉아 익숙하게 도겸의 손목을 들어 맥을 짚었다. 그 뒤를 의녀가 따랐다.

“너는 어제와도 의복이 같구나.”

청의 곁에 앉은 언이 걱정 어린 인사를 건넸다. 청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불편한 것은 매한가지인지라, 굳이 갈아입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예를 갖추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은 도겸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키기 위함이지 결코 도겸이 당부한 일까지 거스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청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언에게 깍듯하게 경어를 썼다. 언은 심각한 와중에나마 옅게 웃었다.

“옷이 같은 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갈아입을 틈조차 두지 않고 이 녀석의 곁을 지켰는가, 나는 그것을 염려한 것이다.”

“밤이 되면 더 뜨거워져 이대로 타죽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불 한 자락 곁에 없는데 어찌 타죽겠는가. 아무리 열이 높다 하여도 타는 일은 없으니 너도 적당히 휴식을 취하며 간병하여라.”

물론 청은 세자의 백성이 아닌지라 그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청이 답하기도 전에 언은 의관을 재촉했다.

“그래. 오늘은 좀 어떠한가?”

“그다지 차도는 없사오나… 신기한 일입니다. 분명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였음에도 이리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토혈을 하였다면 장기가 상해서라도 오래 버티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차도가 없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리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차도라 할 수 있겠지.”

언은 의관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정성을 다하여 치료해주게. 내게 아주 소중한 친우이니 말이야.”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예를 갖춘 의관이 도겸의 몸 곳곳에 신중하게 침을 놓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살폈다. 언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누워 있는 도겸을 바라보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리 친하다 하여놓고, 내 친우의 몸에 이리 많은 흉터가 있는 줄도 몰랐네. 그저 부끄러움이 많아 몸을 내보이지 않는다 여겼는데.”

언은 씁쓸한 얼굴로 눈을 감은 도겸에게 명령했다.

“네가 서둘러 일어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나와 제대로 비무를 겨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도성 안에서는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제는 곁에 앉아 어려서는 이런 일이 있었네, 저런 일이 있었네 하며 기억력을 겨루어보자 하더니 오늘은 무예 타령인가. 잠자코 듣고 있던 청은 불쑥 의문을 드러냈다.

“…저하. 제 오라버니를 이리 만든 자는 찾으셨습니까?”

질문하여도 되느냐 한 번 더 짚어가는 치레는 생략된 채였다. 언은 혹시 몰라 치료를 마친 의관과 의녀를 내보낸 뒤에야 조용히 답해 주었다.

“우선 이 녀석이 대체 어떤 경로로 사약을 들이켠 것인지, 그것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혹여 그 과정에 증좌가 있다면 우선 확보해두어야 후에 범인을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지.”

언은 의원이 대충 덮어두고 간 도겸의 상처를 다시 살폈다.

“아마도 이 녀석은 그날 오전에 있던 대사례에서부터 독을 마신 게 아닐까 싶어. 네가 직접 냄새를 맡아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이 땅에서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독의 일종인 탓이 아니었겠느냐? 나는 최 직각이 워낙 술에 약하니 단순히 벌주에 취해 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워하는 것이라 여겼고….”

그날 내내 좋지 않은 도겸의 안색을 가벼이 넘긴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함께 벌주를 마신 이들도, 또한 오후에 사냥이 끝나고 주상 전하를 포함해 함께 술을 마신 모두가 이 녀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어. 그럼 설마 점심 무렵 여기서 너와 나, 최 직각이 함께 먹었던 다과에 문제가 있던 것인가? 아니, 그 또한 아니었지.”

청은 가만 세자의 설명을 듣기만 했다.

눈길은 시종일관 언제 뜨일지 모르는 도겸의 감은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던 언은 도겸의 머리맡에 놓인 물 주전자와 그릇이 놓인 쟁반을 찾아 그중 그릇을 들어 보였다.

“그날 최 직각이 마신 술은 단 두 잔. 둘 다 함께 마신 사람들이 있었지만 같이 마셔도 한 사람만 음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해. 바로 잔에 손을 써두는 것이었다. 그리 하면 일을 치른 뒤 증좌를 없애는 일 또한 손쉬웠을 테지.”

“…….”

“그렇게 이 녀석은 그날 하루 동안 총 세 번에 걸쳐 각각 죽지 않을 만큼의 독을 몸에 넣게 된 것이다. 그 세 번이 쌓여 치사량이 된 것이고. 양귀비를 바른 검에 베인 것은 그 효능 중 하나인 진통 효과를 위해서였으리라 생각되는구나. 심상치 않은 통증을 느낀 이 녀석이 완전히 중독되기 전에 치료를 받아 버리면 안 되니 말이야.”

청은 욕심도 없이 약간의 숨만 들이쉬고 내쉬는 도겸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는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며 교묘하고 치밀하게 이 녀석을 죽이려 한 것이다. 내가 뒤늦게 찾으려 하였을 때 그 술잔들과, 심지어는 사냥터에서 이 녀석을 벤 괴한의 무기들마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또 하필 그날 병조의 군사들이 숲을 뒤졌지. 그리고 병조판서는….”

빈 그릇을 든 언의 손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좌상의 휘하에 있는 자.”

그때까지 가만 경청한 청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무겁게 감았다 뜬 청의 눈빛은 싸늘했다.

“쉽게 범인을 추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판을 짰다는 것 자체가 증거인 셈이네.”

“그렇지. 너도 사냥터에서 보았지? 필요하다면 증인들까지 거침없이 몰살시켜가며 사건을 은폐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 말이다.”

“…그렇구나. 크게 배웠어.”

“그래. 아주… 응?”

무심히 청의 말에 대꾸하던 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도겸의 이마에서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내린 청이 이번엔 다시 적신 물수건을 드러난 흉부에 넓게 펼쳐 덮었다. 평소에도 들쭉날쭉하게 요동치던 심장인지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름의 처치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을 본 언이 눈썹을 들썩였다.

“호오… 신 상궁이 제발 아씨 좀 쉬게 하여 달라 간청을 하기에 내게도 또 밤새워 간병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더니.”

“쉬어둬야겠어.”

드디어 도겸에게서 눈길을 뗀 청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등 뒤에서 언이 칭찬하며 배웅했다.

“잘 생각하였다. 어서 가 푹 쉬거라. 이곳엔 내가 있을 테니.”

“…불의의 사고 정도가 적당하겠지.”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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