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매….”
순이는 와앙하고 터트리고 싶은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남산댁이 지나가기 쉽게 엉거주춤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무가 젖은 것인가 연기만 나고 제대로 타질 않어유우….”
“나리께서 깨어나셨을 때 네 퉁퉁 불어 터진 눈깔을 보시면 퍽이나 좋아하시겠구나.”
“지 맘대루 안 되는 것을 우째유!”
“또, 또 모르쇠지.”
곁에 앉은 남산댁이 다른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넣고 느긋하게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날부터 지금껏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아씨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티고 계시는데 너 혼자 열 사람 몫의 요란을 떨어대니, 원.”
“아주매, 우리 나리… 일어나시겄쥬?”
“당연히 일어나시지. 한데 네년은 무어 이리 하루 열댓 번씩 쓸데없이 물어대며 힘을 빼는 것이냐?”
사흘 전 사냥에 나섰던 도겸이 초주검이 되어 청의 등에 업혀 들어온 날, 순이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니, 이미 절반쯤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점희의 어미를 보러 왔던 의원들보다 더 많은 의원들이 줄줄이 다녀갔다. 심지어는 임금이 직접 어의를 보내주기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도겸을 깨우진 못했다.
“아, 뭐해? 나무가 젖은 것 같으면 어서 빼내고 새로 장작을 넣어야 할 것 아니야!”
“허, 허구 있어유.”
불이 뿜어대는 연기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순이는 꿋꿋하게 아침 이슬을 맞은 나무를 끄집어냈다. 아이가 굼뜨게 움직이는 동안 남산댁은 다른 아궁이에 능숙하게 불을 피웠다. 여인의 표정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단호하고 매서웠다.
“우리는 평소처럼 하면 된다. 아니,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너도 마당 쓸기 게을리 하지 말고 안 쓰는 방도 늘 닦아놓아라. 그렇게 이 집이 여전히 잘 돌아가고 나리께서 건재하시다, 그리 보여야 하는 것이야. 알겠느냐?”
“…예.”
“울음소리 한 자락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너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어느 짐승이든 간에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순간 꿀꺽 잡아먹힌다는 걸 잊어선 안 돼.”
엄포나 다름없는 경고에 순이는 코를 한 번 훌쩍이기만 했다.
“아씨는 아직 나리 곁에 계셔?”
“예. 옆에 계셔유.”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던데, 그러다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안타까운 듯이 말을 잇던 남산댁이 곧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우리 같은 사람들 기준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니….”
“그렇다구 걱정도 못 혀유?”
울컥한 순이가 툭 쏘아붙이자 부채질을 하던 남산댁이 별일이라는 듯이 돌아보았다.
“지는 사람이니께 걱정 할 거구먼유. 우리 아씨 저러다 쓰러지시면 어쩌나, 가뜩이나 엿가락 같은 아씨 손목 더 가늘어지면 어쩌나 걱정 된단 말이어유.”
고집스레 구는 순이를 보던 남산댁이 복잡한 얼굴로 허탈한 한숨을 쉬더니 사랑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독에 당한 나리께서 저리 버티실 수 있는 건 확실히 아씨가 계셔서겠지… 그날 아씨께서 하신 일 덕분에. 아마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계신 건 또한 나리를 지키기 위함일 테고.”
잠시 대화가 멎었다. 아마 누가 먼저 말하진 않았지만 그날 목도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음이었다.
그러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순이였다. 아이는 불쑥 떠오른 질문을 삼키지 않고 그대로 꺼내놓았다.
“근데 감히 우리 나리를 해한 범인은 왜 아직 잡히지 않는 것이래유?”
“글쎄다.”
부채질을 하던 남산댁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쪼그리고 앉은 순이는 입술을 비죽이며 꿍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른들의 사정인지라 어린 제게까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눈치챈 탓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겠지. 알아도 모른 척, 모르면 더더욱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이. 순이는 짐짓 입을 꾹 다물었다.
“순이야, 이것 먹어라.”
그때 부엌에 불쑥 나타난 행랑아범이 순이의 품에 작은 광주리를 안겨주었다. 제법 묵직한 감이 있는지라 면포를 걷어보니 갖가지 떡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요즘 같은 때에 쌀떡은 구경조차 힘든 것인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났대유?”
“뭐긴, 마을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음식이며 약재를 가져다주고 있지 않느냐. 각자 먹고살기도 버거운 이들이 원.”
뜻밖의 일이었다. 도겸이 크게 다쳐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도겸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하나둘 위로의 선물을 들고 찾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귀한 비단이나 금품은 아니었지만 말린 북어부터 산에 가서 잡은 들짐승에 직접 짜낸 기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나리께서 깨어나시면 괜한 것을 받았다며 언짢아하실 터인데.”
떡을 내려다보는 남산댁의 시선이 탐탁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다면 말랑하고 찰진 떡을 덥석 입에 물었을 순이도 어쩐지 떡 바구니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무사들이 집을 저리 지키고 있으니 대문 앞에 그냥 두고 가 버리는 바람에 돌려줄 수가 있어야지요. 이 떡도 조금 전에 누가 대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보니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입니다.”
“이 떡은 수표교 근처 상전에서 파는 떡이구먼유. 옥춘 아주매가 가져다 둔 것이어유.”
주로 장보기 심부름을 하는 데다 워낙 가가호호 모르는 집이 없는 순이인지라 어디서 파는 떡인지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떡이야 사서 보낸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남산댁이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순이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유. 떡에 참기름을 바르는 집은 시전에서 이 집뿐인데 옥춘 아주매는 수수부꾸미를 안 팔어유. 나리께서 즐기시는 것을 알고 따로 부쳐서 갖다둔 것이구먼유?”
제법 예리한 관찰력을 칭찬하듯 남산댁이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네 똥 굵다, 이것아.”
“근데 이리 선물들이 쌓여 어찌합니까.”
가솔도 많지 않은 집인지라 먹을 것이 넘쳐난들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 들른 모든 이들의 선물과 이름을 따로 적어두고 있던 남산댁이 내친김에 처분을 결정했다.
“행랑아범은 필요치 않은 약재들을 혜민서에, 음식은 상하기 전에 우리가 먹을 것만 조금 남기고 모두 나리의 이름으로 설죽소에 가져다주게. 나리께는 깨어나시거든 그들의 정성만 전달하면 충분할 터이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산댁이 생각을 바꾸었다.
“선물한 이들에겐 고마운 일이나 나리께서 독에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음식들마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 말과 함께 순이에게서 매정하게 떡 광주리를 빼앗았다. 그러곤 통째로 아궁이에 집어넣어 버리는 통에 순이가 입을 떡 벌리며 벌떡 일어나 따졌다.
“이, 이 아까운 걸 내 버리면 우째유!”
“앞으로 밖에서 얻은 음식은 물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대선 안 돼. 더군다나 출처를 알 수 없다면 더더욱.”
“이건 확실하다니께유?”
“만드는 것을 직접 보고 가져온 게 아니고서야 함부로 확신해서도 아니 될 일이지!”
남산댁은 더없이 냉정했다. 그 눈빛은 단호했지만 눈길 자체는 흐릿했다. 이곳이 아닌 기억 속 어딘가를 헤매는 것도 같았다.
순이가 좀 더 자세히 살피려던 차, 떡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당분간은 직접 장에 나가 그때그때 구한 식재료로 만든 것만 먹고 마셔야 한다. 그리고 순이 너는 외출을 하거든 저하께서 보내신 무사에게 동행하여 달라 청하여 꼭 함께 나서도록 하고.”
“꼭… 그래야혀유?”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 나리께서 깨어나셔서 주변을 정리해 주실 때까진 우리가 단속을 철저히 해두어야 뒤탈이 없겠지.”
남산댁은 틈을 두지 않고 행랑아범에게도 명령을 정정했다.
“행랑아범은 출처를 아는 음식과 약재만 설죽소에 보내고 나머진 땅에 묻어 처리하는 게 좋겠네.”
“예.”
말이 나온 김에 광에 쌓인 선물들을 정리하겠다며 행랑아범이 바삐 움직였다. 아궁이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순이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너는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사랑으로 가 아씨께서 드실 깨끗한 물이나 가득 채워드리고 또 상한 곳은 없는지 살펴드려라. 숯은 내가 만들어 약을 달일 테니.”
“…그럴게유.”
“서둘러. 오후 나절이 되면 세자 저하께서 오셔서 살피실 터인데 부족함이 있어서야 쓰겠어?”
“예에….”
순이는 부엌을 나서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어쩐지 집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은 듯 편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높게 들었다.
저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데 하늘은 한결같이 고요하고 또 푸르기만 했다. 그게 못내 야속했다.
“왜 아직 안 가고 섰어!”
득달같이 남산댁이 혼을 내는지라, 순이는 느릿느릿하게나마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유….”
물을 떠 사랑에 가는 사이에 나리께서 깨어나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순이는 침울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미약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아니라면 도겸은 죽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의 곁에 앉은 청은 새삼스레 가만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놓인 서가와 문갑엔 평소 즐기던 책들이 넘쳐났고 서안 옆에 놓인 연상 위엔 즐겨 쓰는 문구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글을 얼마나 많이 적는지 붓걸이인 필가에 걸린 붓은 종류별로 빽빽했다. 눈으로 대충 개수를 세어보던 청이 질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이 공간은 최도겸 그 자체였다. 정작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최도겸이 가장 이곳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책 냄새를 맡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지 모른다고 해서 일부러 이 방에 둔 건데, 왜 안 일어나?”
문득 손을 든 청이 도겸의 이마를 가만 짚어보았다. 어찌 아슬아슬하게나마 숨은 붙어 있었지만 간헐적으로 전신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터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