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익위사들도 없이 기습을 당하긴 했다만 능히 제압을 한데다 나도 다친 곳 없었고 최 직각은….”
정신없이 말을 잇던 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의 시선은 도겸의 몸 여기저기에 베인 상처를 하나씩 훑고 있었다. 사냥 중엔 먹고 마신 게 없으니 처음부터 독이 묻은 검에 베였으리란 계산이 섰다.
“그럼, 처음부터 놈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최 직각이었단 말인가?”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그 순간 도겸이 다시 한번 울컥 검붉은 피를 토했다. 이미 의원이 와 있었지만 별다른 처치를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세자까지 들이닥치니 환자인 도겸보다 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피를 닦아내고 진맥하는 의원의 손이 달달 떨렸다.
“어서 뭐라도 해 보게!”
그런 의원의 긴장을 살필 겨를이 없는 언이 다그쳤고, 의원은 이마가 바닥에 닿지 않을까 싶을 만큼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하오나 증상을 보니 이, 이는 사약을 마신 수준이라 별다른 방도가….”
그 말에 방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순이가 주저앉았고, 함께 있던 점희가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보듬었다.
“…나리, 어찌!”
“나리….”
행랑아범과 남산댁은 딱딱하게 굳어져 무어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떻게 손조차 쓸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익위사!”
언이 밖에 대고 크게 소리쳐 익위사를 불렀다. 그러곤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급하게 명령했다.
“익위사는 어서 가 내의원의 어의를 데려오게!”
“예!”
“서두르게. 단 일각도 지체해선 안 돼!”
“그 전에….”
긴박한 와중에 한마디도 없던 청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죽을 것 같은데.”
모두가 생각만 하고 있었으나 말이 씨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라도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속설에 구애받지 않는 청이 물꼬를 튼 것이었다.
물론 말을 꺼내기가 바쁘게 언이 분을 터트렸다.
“안 돼. 이대로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선 아니 된다!”
뜨겁기만 한 도겸의 손을 잡은 세자가 억지로 친우를 깨우려 했다.
“최 직각… 도겸아. 일어나라. 명령이다. 최도겸!”
그러나 도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의 명령에 불복한 것은.
“나리!”
방 안으로 벅벅 기어 들어온 순이가 도겸을 붙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안 돼유. 우째 이래유. 이건 아니구먼유. 나리, 눈 좀 떠보셔유…!”
다른 이들이 울며 통곡을 하는 사이에 낙담하며 물러난 언은 홀로 청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인간은 정말이지… 나약해. 스스로 해독조차 하지 못하다니.”
언이 황망하게 바라보는 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청이 벌떡 일어나 도겸의 방 한편에 고이 놓인 검집을 집어 들었다.
“너… 무엇 하려는 것이냐?”
“어차피 최도겸을 살릴 해독제가 없고, 그래서 곧 죽는다면 해 볼 수 있는 일은 해 봐야지.”
“그, 그게 무기를 집어 드는 일과는 어떤 연관이 있기에?”
묻기도 전에 청이 검을 뽑아 드는 게 더 빨랐다. 통곡하던 이들이 갑작스러운 청의 행동에 놀라 나자빠졌다.
“아, 아씨 지금 무엇 하시려는 겁니까!”
늘 차분한 남산댁마저 당황했다. 칼부림이 나는 판에서까지 침착할 수 있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입구에 머물던 익위사가 서둘러 발검하며 들이닥쳐 세자를 보호했다.
“…그 무슨!”
그러나 청은 날이 선 검을 누군가에게 휘두르지 않고 제 손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갈라진 살갗 사이로 새빨간 피가 쏟아져 하얀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러다 아끼는 물빛 치마마저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흐르는 피를 약간 벌어진 도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누구 하나 말릴 틈조차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언이 설명을 요구했다.
“피를 먹인다고 이미 흘린 피를 보충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나는 어떤 독을 마시든 스스로 해독할 수 있어. 그러니 내 피는 그 자체로 해독제인 셈이지.”
해독제라니. 언이 반색하며 익위사를 제치고 나섰다.
“그렇다면 더 일찍 썼어야지 어찌 이리 늦게!”
“내게는 해독제지만….”
감히 세자의 말허리를 잘랐음에도, 거기다 존칭은 경어조차 쓰지 않고 있음에도 이미 눈앞에 벌어진 일로 경악하고 있던 이들은 그 누구도 청의 언행을 질책하거나 행동을 막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겨를이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도겸의 입 안으로 끊임없이 청의 피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독이 될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독이 될 거야. 인간은 작은 꽃송이만큼이나 나약하니까.”
“…무어?”
“이게 미약한 심장이 몇 번 더 뛸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는 짓이 될지도 모른단 소리야.”
“어찌… 아니 된다. 멈추어라!”
기함한 언이 곧바로 청의 손목을 붙잡았다가, 이내 괴로운 얼굴을 하며 힘겹게 놓아주었다.
“그래… 일말의 가망이라도 있다면, 지금은 그게 무엇이든 해 보는 게 낫겠지.”
세자의 명이 떨어진 이상 더는 청을 저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상당한 피가 도겸의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만 피를 쏟아 넣는 청을 제외하고는 억겁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물론 청과 언이 나누는 대화가 대체 무슨 뜻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도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과감한 일을 벌이는 청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짓눌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크억!”
그러나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던 지푸라기 같은 희망은 끝내 빛을 발하지 못했다. 도겸이 재차 격렬히 검붉은 피를 토해낸 탓이었다. 청이 할 수 있는 노력이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나, 나리!”
“나리!”
“자칫 토혈이 기계(기도)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나마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망하고 있던 의원이 다급하게 소리쳤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도겸을 살폈다. 그러나 축 늘어진 그는 도통 눈을 뜨지 못했다. 어쩔 줄 모르던 순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나리… 나리, 안 돼유. 지가 천자문 떼는 것도 보셔야쥬. 책거리로 꽃구경을 데려가주시겠다 약조도 하셨구먼유. 잊으시면, 이렇게, 이렇게 편찮으시면 안 되는 것이어유….”
늘 아이를 단속하기 바쁘던 남산댁과 행랑아범도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여겼는지 차마 순이를 다그치거나 쫓아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아이가 울며불며 통 사정을 해도 도겸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지독히 어둡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
“비켜유, 비켜!”
사람들이 뭉게구름처럼 흘러가는 운종가, 그 사람들 사이로 작은 아이가 용케 틈바구니를 찾아 이리저리 새어 나갔다.
“아니, 서촌 순이 아니야? 어딜 그리 급하게 가니?”
평소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해맑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하던 아이였지만 오늘은 그럴 틈도 없었다. 아니, 며칠 전부터 아이는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약방과 서촌을 오갈 뿐이었다.
“두어. 서촌 각신 나리께서 며칠째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고 계시다잖어.”
“뭐? 나리께서?”
누군가 화들짝 놀라는 소리도 났지만 답을 해 줄 겨를도 없었다. 순이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집으로 뛰어갔다. 품엔 약재 꾸러미를 꼭 안은 채였다.
그러나 집 앞에 다다랐을 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도겸의 집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무사들 때문에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지, 지 아시쥬? 이 집 사는 순이구먼유.”
당연히 알 텐데도 괜스레 도겸의 사람임을 과시한 순이가 대문을 두드렸다.
“아자씨! 약방 다녀왔슈!”
혹시라도 제가 받아온 약재로 달인 탕약이 효험이 있을까 싶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순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행랑아범이 문을 열어주었다.
“고생했다. 자, 물부터 마셔라.”
순이는 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한시름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약재를 받아 든 행랑아범이 시원한 물을 건넸다.
“어서 약부터 달이셔유!”
“그리 뛰어다닐 필요 없다. 이미 네가 받아온 약재로 광 하나가 그득 찰 판이야. 그 많은 약을 다 달인들 나리께선 아직 의식도 없으신데.”
“아니어유! 금방 깨어나셔서 다 드실 수 있구먼유!”
물을 마시던 순이가 빽 소리쳤다. 약재 꾸러미를 다시금 빼앗은 아이가 냅다 물그릇을 넘겨 버리는 터라 행랑아범의 옷이 홀라당 젖고 말았다.
“오, 오래 잠을 제대로 줌시질 못허셔서, 그래서 깊게 줌시는 것을 두고 아자씨는 우째 말을 그렇게 한데유!”
“순이야.”
“지 바뻐유! 약탕기 화로에 넣을 좋은 숯부터 만들어야 허구먼유.”
칼 같이 자르고 돌아서 부엌으로 간 순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부채질을 시작했다.
“…우리 나리 꼭 일어나실 것인데.”
갑자기 바람을 불어 넣은 탓일까. 매캐한 연기가 일어 눈이 맵고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하지만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아씨에게 혼쭐이 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눈물이 조금만 비집고 나올라 치면 아이는 잽싸게 옷소매로 눈두덩을 닦아냈다.
“좋은 숯이 나와야 좋은 약도 나올 텐데 우째 불이 시원찮어어….”
작은 손이 더 부지런히 부채질을 했지만 마음처럼 불이 일지 않았다. 타라는 숯은 타지 않고 마음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빨리, 빨리 야무지게 타야지, 응?”
어르고 달랜들 불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숯을 만들기란 아직 순이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눈물마저도 저 스스로 멈출 수가 없지 않나. 세상에 이보다 더 원통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와 까만 눈썹이 팔자로 축 쳐져 내렸다.
“또 혼자 질질 짜고 있는 것이냐?”
홀로 울고 있는 순이에게 지청구를 내는 이는 잠시 광에 다녀온 남산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