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어 청이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 줄 안다만 집에 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그게 아니라….”
“아무 말 말래도.”
이무기의 귀가 버젓이 열려 있는 곳이었다. 도겸은 단호히 청의 어깨를 잡아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오늘은 더 이상 분란을 일으켜선 아니 된다.”
“…….”
무언가를 말하고자 약간 벌어져 있던 청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전하께서 저하의 신속한 환궁을 명하시어 저하께서 먼저 이곳을 떠나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저하와 익위사들을 따라 먼저 돌아가거라. 금방 따를 터이니.”
순순히 따르기에 이대로 언을 따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청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도겸을 따르지 않았다.
“기다릴 것입니다.”
“뭐?”
도겸을 올려다보는 청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고 단단했다.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 서둘러 나오셔야 합니다, 오라버니.”
분명 존대를 하는데 서둘러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간담이 서늘해진 도겸은 아닌 척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리거라. 함께 집에 가자꾸나.”
집에 가면 남산댁이 빚은 술을 내어줘야겠다, 도겸은 그리 생각했다.
***
세자가 습격을 받은 일이 여전히 임금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지라, 환궁을 준비하는 궁인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래도 술 한 잔씩은 하여야 하지 않겠나.”
사냥이 끝난 뒤에 작게나마 준비되어 있던 연회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무산되고 말았다.
대사례때와 같이 상과 벌이 내려질 예정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매를 이용하여 꿩을 사냥한 임금 외엔 모두 벌주를 마셔야 할 정도로 사냥을 제대로 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임금은 이런저런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그저 사냥을 기념하여 참여한 이들에게 어사주를 한 잔씩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노라 명하였다.
“그것 참 기이한 일이로다. 꿩 열두 마리야 저 어린 소녀들로 인하여 사라졌다 한들, 활을 지닌 중신들은 어찌하여 소녀들보다 성과가 없단 말인가?”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위험으로 인하여 영의정이 서둘러 환궁할 것을 권하였지만 임금은 오히려 느긋하게 굴었다.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질려하다 궁으로 줄행랑친다면 그 자체로 적들이 원하는 광경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병조의 군사들까지 추가로 동원해 사냥터를 수색하고 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세자의 익위사들 셋이 중상을 입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으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귀한 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성심이 어지러우신 줄 압니다, 전하.”
조익환은 주군을 걱정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어주를 하사하는 임금은 의연했다.
“경들이 과인의 곁을 지키는데 두려울 게 무어 있겠나.”
중신들과 종친들 모두에게 고르게 한 잔씩 돌아가느라 커다란 술독 하나가 점차 가벼워졌다. 그리고 임금은 마지막 즈음에 서 있던 도겸의 앞에 섰다.
“아주 영특한 누이를 두었더구나.”
“망극하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심을 어지럽게 한 죄는 분명했다. 도겸의 겸허한 사죄에 임금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네와 닮았더군. 그래, 상한 곳은 좀 어떠한가?”
도겸은 어서 술을 받고 자리가 파하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청에게 가 소상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뿐이었다.
“조금씩 베인 것이 전부이옵니다. 저어하실 일이 전혀 아닙니다.”
임금이 다행이라며 술을 내렸다. 조금 다친 것이 전부라 했지만 실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네를 잃었다면 친우에게 면목이 없었을 걸세.”
기울인 술병을 다시 세울 즈음 임금이 나직이 감사를 전했다. 도겸은 고개를 더 숙였다.
“또한 저하께서 소신을 지켜 주시었으니, 제가 저하께 은덕을 입은 것입니다, 전하.”
임금은 답을 하는 대신 도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단상에 올라 자신의 잔을 들었다.
“비록 술 한 잔이지만 백성들의 피와 땀이라 여기고 꼭꼭 씹어 삼켜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아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임금의 어사주를 두 손으로 들며 합창으로 읍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이 먼저 잔을 들이켜고 아랫사람들이 주군을 따라 술을 넘겼다. 와중에 도겸은 계속해서 떨리는 손 때문에 쉽사리 잔을 올리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한 상처인데도 지혈이 잘되지 않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등에선 진땀이 났다.
잔을 놓친다면 임금이 친히 끌어 올린 분위기가 다시 살얼음판이 될지 몰라 가까스로 팔을 들어 올리던 차, 도겸은 저만치 상석 근처에서 잔을 든 채로 이쪽을 바라보던 조익환과 눈이 마주쳤다.
마찬가지로 아직 잔을 든 채로 마시지 않은 좌상이 도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설마.”
술에 뭔가를 탄 것인가. 술 한 동이를 모두 나누어 마신 것이라 당장 주상이 위험했다. 도겸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임금이 있는 상석을 향해 튀어 나가려던 차였다.
“……!”
“성은이.”
어쩐지 그 미소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조익환이 잔을 한 번 크게 들고는 읍하였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러곤 보란 듯이 술을 들이켰다. 다디단 꿀물을 마시듯 시원한 표정인지라, 도겸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망극하옵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같은 술독에서 나온 술을 마시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지 않겠나.
도겸은 조익환을 주시하며 술잔을 기울여 입 안을 적셨다. 약술은 아주 달고도….
쓰디썼다.
***
도겸을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해거름 무렵이었다. 물가에 서 있던 청은 가만 쪼그리고 앉아 손끝에 물을 적셨다. 붉은 노을에 물든 수면이 손끝을 따라 이리저리 갈라졌다.
“가엾구나.”
마음에 찰 만큼 깨끗하지도, 운용이 될 만큼 정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땅의 물을 다스리던 청룡의 신물이 없어 활기를 잃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제 손가락의 신물 때문에 물이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인가.
“그럼 왜 최도겸 집의 샘은….”
혹시나 싶어 바닥까지 전부 뒤졌지만 돌덩이뿐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청이 가만 수면 위를 종이 삼아 제 이름을 적었다.
“왜 보고만 계십니까, 오라버니?”
눈과 손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하여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까지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도겸은 혼자였다. 청은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 묶어둔 언행의 고삐부터 풀었다.
“내 이름을 적고 있었어.”
그의 단정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오늘 아주 잘 하였다. 전하께서 아주 흡족해 하시더구나.”
“그럼 뭐해. 꿩들을 죽인 범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했는데.”
“또한 네 지혜로 많은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아마 좌상이 꿩과 닭을 설죽소에 내어놓았다는 말이 돌면 그자를 따르는 이들도 줄줄이 식량을 내어놓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꿩들이 누군가의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죽는 일이 없기를 바랐을 뿐이야.”
“부덕한 인간들에게 실망이 컸겠구나.”
“괜찮아. 이젠 기대도 안 하니까.”
물에 글씨를 쓰던 것도 멈추고 일어선 청이 돌아섰다.
“어쨌든 너 숲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
원래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청은 순간 얼음이 된 듯 굳어졌다.
“…최도겸.”
맑은 눈이 커졌다. 눈으로 확인하기보다 앞서 코로 들이친 짙은 피 냄새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눈앞의 남자는 사방에 베인 상처를 입다 못해 이제 입에서도 피를 쏟고 있으니 말이다.
“청…!”
간신히 청을 부르는 순간 또 한 번 입에서 피가 터졌다. 그의 너른 가슴팍이 온통 쏟아진 검붉은 피로 엉망이 되었다. 이내 휘청하는 남자에게 재빨리 다가가자 도겸이 청의 어깨로 무너져 기대었다.
“갑자기… 이러는구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너무 작아져 있었다. 꿩의 죽음을 생각하기가 바쁘게 도겸을 잃을 지경이었다.
무언가를 죽지 않게 돌보고 지킨 적은 있어도 죽어가는 것의 이유를 파악하고 되살리는 데엔 그다지 재능이 없는지라 청은 드물게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서 양귀비 냄새가 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말을 못 하게 해서!”
“양, 귀비….”
도겸의 눈에 낭패감이 차올랐다. 다시금 울컥하며 피를 토한 탓이었다. 청에게 기대어있다 두 다리의 힘을 잃고 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가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주며 간신히 청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는… 너에게… 꼭 알려 줄 것이….”
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최도겸.”
“…….”
“최도겸!”
더 토해 낼 피가 없는지 완전히 의식을 잃은 탓이었다. 뜬금없이 두방망이질 치며 주체하지 못하던 심장마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져가는 등불처럼 미약해진 채였다.
***
“최도겸!”
사랑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이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이었다. 안에 모여 있던 이들 대부분이 황급히 예를 갖추었지만 단 한 사람, 청은 언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언은 의식을 잃은 채로도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는 도겸을 보고는 충격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분명 나와 헤어질 때만 해도 여기저기 조금 상한 것 말고는 별다른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았는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하.”
남산댁이 모두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최대한 차분하게 응했다. 와중에도 손은 펄펄 끓는 도겸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느라 바빴다.
“나리께선 중독되신 듯합니다.”
“중독이라니. 언제? 대체 어떤 놈에게, 집에 오는 길에 또 다른 습격이라도 당한 것이냐?”
직전까지 같이 있었을 사람을 아는 세자가 청에게 확인코자 했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청은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도겸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냥을 다녀온 이후로 양귀비 냄새가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