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소신은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하온데 어찌 제 자식에게 그런 망언을 하였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도 제가 직접 활을 쏘아 괴한을 쓰러트리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나이까?”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재판은 심각하다 못해 미궁에 빠지고 있었다. 결코 단순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외람되오나, 소신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최 직각도 아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게.”
임금이 도겸에게도 발언을 허락했다. 도겸은 한 걸음 나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제 누이가 저를 찾아와 건넨 첫 마디가 바로,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뛰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낭자의 발언은 최 직각의 곁에 있던 소자도 함께 들었습니다.”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언이 대뜸 판에 끼어들어 도겸을 옹호했다.
“이 좋은 날에 벌어진 사소한 일은 들추지 않으려 묻어두었지만….”
서서히 궁지에 몰리는가 싶던 조익환이 허허 웃으며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사냥을 나서기 직전, 제가 즐겨 쓰는 화살이 다수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재판장을 마치 자신의 집 앞마당 거닐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긴 조익환은 노골적으로 청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한데 그 화살들이 여기 이 최 직각의 누이만 알고 있는 곳에 있다면 범인은… 구태여 더 찾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익환이 택한 전략은 모든 증거를 오염시켜 탈락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명확한 논리가 부족하고 다만 감정에 앞서 눈물만 흘리던 조설아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뒷받침되었다. 도겸은 즉각 반박했다.
“화살을 잃어버리셨다 하셨지만 이런 불미스러운 일만 없이 그 화살에 죽은 꿩들이 차후에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대감의 사냥물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 결론으로 이끌어가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습니까?”
“없어진 화살을 본 이가 저 아이뿐인데 그럼 어찌하는가?”
“그 전에 대감의 궁시를 관리한 이부터 문책하셔야지요. ‘감히’ 대감의 화살을 잃어버렸으니 말입니다.”
“문책을 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 게 아니겠나? 연유야 어찌 되었든 자네 누이는 지붕 위를 날아다닐 정도로 비범한 이라 소문이 자자하니 말이네.”
언쟁이 과열될수록 임금의 고뇌가 깊어져만 갔다. 아무리 설왕설래하여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이 조익환이 다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정히 이 일에 있어 누구의 진술이 참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우시다면 의금부로 압송 중인 죄인들을 문초하여 자백을 받아 내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조익환은 슬쩍 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리고 흔들고자 하였다. 그런 모양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지만, 어찌 임금을 설득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은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익환의 짓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늘 짙은 안개를 깔아놓고 그 속에서 칼부림을 한다.
그렇게 하여 누구에게 당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죽어가게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지금껏 조익환이 해 온 악행의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소극적으로 듣고 있기만 하던 도겸이 임금에게 고하였다.
“좌상 대감의 말씀대로 죄인들에게서 해답을 얻으려 한들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골치가 아픈지 결국 이마를 짚은 임금이 되물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는가?”
“전하께서도 분명히 목격하셨겠지만 세자 저하와 저는 괴한들의 습격을 받을 당시, 수적으로 한참 열세였음에도 그들을 생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대응하였습니다. 급소를 찌르거나 베지 않고 목숨을 살려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내금위군이 나타나 포위되자마자 그들은 스스로 자결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배후를 철저히 숨기려 한 짓이리라 예상됩니다.”
“…확실히 그랬지.”
“아마 혼절하고 있던 자객들이 깨어난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겠지요.”
스스로 죽지 않으면 어떻게든 죽임을 당할 것이다. 언이 직접 잡아들였던 양귀비 중독자들처럼. 도겸은 다른 식으로 사건에 접근하기를 시도했다.
“전하, 신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도겸의 청에 임금이 즉각 허락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소신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는 품계 낮은 규장각 각신에 불과하온데, 오늘은 전하께서 특별히 소신 또한 참석하도록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음, 그랬지. 자네와 좌상 사이에 오해가 생겼다면 부디 함께 사냥하며 잘 풀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말이야.”
“그 결정은 비단 전하께서 온전히 생각하시어 내리신 것이었습니까?”
“음?”
다소 불경한 물음일 수는 있었지만 반드시 답을 들어야 하는 문제였다. 잠시 생각하던 왕이 이내 답을 주었다.
“아니었네. 좌상이 이르기를, 최 직각은 평소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울 만큼 규장각에 틀어박혀 일이 바쁜 위인인지라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오해를 풀지 모르니 함께 사냥에 갈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 청하였지.”
“하지만 제게 그 사실을 알릴 때에 좌상 대감께서는 제가 참석하게 된 이유를 모른다는 듯이 말씀하셨지요. 또한 그 오해 역시 시사의 자격이 없는 제가 시사자가 되어 생긴 일이 아닙니까.”
“어허, 그것은 자네가 내게 활을 겨누지만 않았어도 생기지 않았을 일일세! 어찌 내 선의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억측하게 만드는가!”
예상대로 조익환이 당장 정색하며 도겸의 말에 반발했다. 모든 행동을 선의로 포장하여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대감께서 아니라 부정하신다 하여 제 누이의 행동, 그리고 세자 저하와 제가 들은 것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이 분다하여 과녁이 아니라 내게 활을 겨눈 자네의 행동 또한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겠지?”
그냥 화살이 조익환에게 향하도록 하여 쏘아 버릴 걸 그랬다. 도겸이 나직이 응수했다.
“지금 대감께서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 그리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지금 과인을 앞에 두고 무엇 하는 겐가!”
듣다 못한 임금이 중재에 나섰다. 도겸은 즉각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더는 지리멸렬하여 들어주기 어렵다. 이 사안은 이제 확실한 증좌만 가져와 논하라. 금군은 아직인가!”
“도착하였습니다!”
몇몇의 금군이 찾은 것들을 가져와 임금에게 보였다. 청이 입고 있던 옷과, 청이 말한 대로 정확히 열두 마리의 꿩 사체였다.
증거들을 면밀히 살핀 임금은 답답함을 가라앉히고자 냉수를 한 사발 들이켠 뒤 당사자들에게 말했다.
“조가 설아의 옷과 심가 청의 옷에 둘 다 핏자국이 있어 누구에게 과인의 사냥을 방해할 고의가 있었는지 판별하기가 어렵구나. 혹, 이 둘의 증언에 부언하거나 반박할 목격자는 이 자리에 없는 것이냐?”
구경하던 사람들에게까지 재판정의 영역을 확장하여 목격자를 찾았으나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 설아 아씨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다만 군중 속에 묻혀 조설아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들은 많았다.
“맞습니다. 어찌 그 아씨의 약한 손목으로 꿩을 잡아 죽인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이옵니다, 전하!”
“그만. 과인은 목격자를 찾았지 누구의 편을 들라 명하지 않았다!”
기어이 임금의 언성이 높아지고 나서야 아우성이 수그러들었다. 가라앉은 좌중을 둘러보던 왕이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단순한 다툼인 줄 알았던 일이 생각보다 심각한 사안으로 번졌으니 과연 이 일은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중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궐로 돌아가 다시 논하도록 할 것이다.”
임금은 그때까지 무릎을 꿇은 채 벌을 받고 있는 두 소녀에게도 명령했다.
“다만 과인의 사냥터에서 무단으로 꿩 열두 마리를 잡은 죄상은 너희 둘 모두에게 물을 것이다. 즉결처분을 내릴 터이니 조가 설아와 심가 청은 각자 꿩을 여섯 마리씩 구하여 사냥터에 다시 풀어놓아라.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설아가 즉각 답했지만 어쩐지 청은 답을 하지 않았다.
“청아.”
감히 왕의 명령에 불복할 셈인가 싶어 곁에 있던 도겸이 대답을 종용하려던 차, 임금이 먼저 청의 불충함을 의심했다.
“심가 청은 어찌 답하지 않는 것이냐. 과인의 명에 불복할 셈이냐?”
“꿩 여섯 마리를 다시 돌려놓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청에게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청이 사고를 치기 전에 도겸은 대신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하, 꿩은….”
“그 꿩 여섯 마리를 사냥터에 풀지 않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궐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윤허하여 주신다면 소녀, 기쁘게 따르겠나이다.”
“꿩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겠다?”
“전하께서 신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하시는 이유는 소녀, 당연히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은 적어도 굶주리는 이들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감히 불경한 짓을 저지른 소녀에게 가벼운 벌로써 은덕을 베풀어주셨으니 소녀도 전하께 받은 은혜를 다른 곳에 베풀고자 함이옵니다.”
도겸은 청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꿩을 다시 사람의 사냥감으로 내놓고자 한다면 차라리 정말로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맹랑한 아이로군. 과인이 내린 벌로써 궐 밖의 다른 백성들에게 생색을 내겠다는 것이냐?”
임금이 다소 노기 어린 투로 대꾸하려도 청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럼 두 배, 아니 네 배로 감당하겠습니다.”
그런 여인을 가만 바라보던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막 밖으로 나와 섰다. 그러곤 명령을 정정하였다.
“좋다. 심가 청과 조가 설아는 각자 꿩 열 마리, 닭 열 마리씩을 설죽소(조선시대의 구휼기관)에 보내어 빈민들이 한 끼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라.”
드디어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도사리는 위험은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오라버니.”
임금의 허락하에 벌떡 일어난 청이 도겸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섰다.